[북한 바로보기] ‘내재적 접근론’, 김정은 체제에 적용 가능한가?

이전 글 바로 가기 : [북한 바로 보기] 단편 정보로 국가안보 정책 결정…이게 현실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일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의 첫해 성과를 강조하는 선전화를 공개했다. 선전화에서 북한은 ‘실제적인 변화, 실질적 진전’을 강조했다. 북한은 지난 1월 제8차 당 대회에서 새 국가경제발전 계획을 발표한 뒤 연일 ‘관철’을 강조하며 관련한 선전선동 활동을 진행 중이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1. 내재적 접근론

가. 내재적 접근론의 등장

앞에서 가용 첩보 부족이라는 한계로 북한의 동향과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현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 더해 1980년대 후반에 재독학자 송두율이 소개한 이른바「내재적 접근론」은 북한을 보는 시각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학계에서는 기존 냉전적 시각에 따른 북한 연구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진보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이라는 대안적 시각을 모색하는 등 북한 연구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이런 학문적 논쟁에 대해 통일부 통일교육원에서 발간한 「북한이해 2008」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북한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차원의 연구방법론은 대체로 두 가지로 대별되어 왔다. 그 하나는 외재적 접근법인데 북한이라는 대상을 객관적·외부적인 시각에서 분석하는 인식의 방법론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북한 체제의 전반적 현상을 분석한다.

다른 하나는 내재적 접근법으로서 외재적 접근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인식의 틀로서, 북한의 특수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북한 사회의 각종 현상을 이해하려는 접근방법이다.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 체제가 설정해 놓은 이념과 논리를 기준으로 북한의 사회현상을 분석해야 한다는 방법론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특정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집단 내부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관찰자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일지라도, 그곳 나름의 특수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간과한 대표적인 예가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의 선교사를 앞세운 식민지 정책이었다. 이와 반대되는 사례도 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국은 교전 상대인 일본이 아군의 생명보다 적군의 목숨을 앗는 것을 더욱 중요시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국은 이처럼 낯선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그들의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일본이란 나라를 대상으로 연구를 했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책이 루스 베니딕트의 ‘일본 문화의 유형’이란 부제가 달린 「국화와 칼」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 책의 결론에 힘입어 전후 일본에 군정(軍政)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나. 내재적 대북 접근의 문제점

내재적 접근은 특정 집단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전략과 정책을 수립하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론이지만, 이를 북한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1) ‘내재적 접근’ 방식의 방법론적 문제 : 북한 체제 특성상 적용 곤란

주지하다시피, 북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다못해 ‘북한 총인구’라든가 ‘알곡 생산량’ 등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도 제공되지 않고 있다. 이런 여건 때문에 북한 연구자, 특히 외부 학자는 거의 전적이라고 할 정도로 북한의 공간 문서나 보도 매체에 의존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1차 자료 대부분이 사실(fact)의 전달보다는 날조와 과장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친 선전·선동용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관(史官)의 손을 거친 실록이 아니라 드라마 대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료를 접하다 보면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세뇌되어 북한의 의도대로 사고를 하게 된다. 실제로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를 방문해서 노동신문만 1개월 정도 읽어보라. 처음에는 ‘말도 안 돼’라던 생각이 어느새 ‘그럴 수도 있겠다’를 거쳐 ‘맞는 말이네’로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宣傳相)이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언급한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 내부 사정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접근으로 북한을 평가하겠다고 하는 것은 ‘열역학 제2 법칙’을 무시한 채 무한동력장치를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결론적으로, 「내재적 북한 접근론」은 제한된 자료와 세뇌된 시각으로 북한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게 되는 등 외피(外皮)는 그럴듯해도 전혀 학문적 방법론이 아니며, 그 결과물도 당연히 객관적이지 않다. 더욱이 ‘내재적 북한 접근론’을 받아들이는 인사의 상당수가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에 경도되거나 최소한 호의적이라는 점은 이런 경향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6월 항쟁’으로 토론의 자유가 해금된 한국에서 강정구, 이종석 등 진보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내재적 북한 접근을 위한 방법론과 시각에 대한 논쟁이 199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게 진행됐었는데, 이는 학문의 대상이 아닌 것을 (그야말로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논의한 탁상공론일 뿐으로, 일종의 와각지쟁(蝸角之爭)이었다고 할 것이다.

더불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같은 문제는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어, ‘내재적 접근’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김정은 백두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두산에 올랐다고 2019년 12월 북한 매체가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 캡처

(2) ‘내재적 접근’ 시각의 내용적 문제 : 도착적(倒錯的) 북한관 형성

‘내재적 접근론’에 의한 북한 연구는 대부분의 연구자료가 김일성 일가의 선전물이라는 제한으로 인해, 이른바 백두혈통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집중될 수밖에 없다. 장식적으로나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지식인을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조선 사회주의 헌법 4조, 2019년 4월 11일 개정)라는 조문이 무색하게 ‘모든 권리의 원천인 인민’은 연구대상에서 거의 완벽하게 외면되고 배제되어 있다.

내재적 북한 접근론으로 김일성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송두율만 해도 그렇다. 국정원 발표(2003.10)에 따르면, 송두율은 73년 9월 재독 북한 공작원에 포섭돼 모스크바를 경유, 입북해 북한 초대소에 2주간 수용돼 주체사상 학습과 공작원 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91년 5월에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됐음을 재독 북한 이익대표부에 파견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통보받았음을 자백했다고 한다. 특히 94년 7월 김일성 장례위원으로 선임되어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참고로 송두율이 벤치마킹한 ‘내재적 동독 접근법’의 창시자인 피터 루츠 교수도 ‘20세기 최고의 첩보기관’으로 평가받던 동독 슈타지의 스파이였음이 밝혀져 독일 지성계를 경악시킨 일이 있었다.

더구나 내재적 접근론을 적용한다면, 어떤 범죄도 성립될 수 없을뿐더러, 청산되어야 할 일제의 식민지 강점 역사에도 정당성을 부여해야 하는 모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인민의 동의 없이 권력을 독점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자신과 자기 후손의 독재 권력 유지를 위해 2,50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탄압하고 그것도 모자라 핵무기로 대한민국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는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보연(進步然)하는 일부 인사들은 궤변이나 다름없는 ‘내재적 북한 접근론’에 매몰되어 도착적(倒錯的)인 북한관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발언과 행적을 몇 가지 소개하고 그 부당성을 지적해 본다.

전 통합진보당 의원 이석기는 언론 인터뷰(12.5)에서 북한의 3대 세습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론에 공감하는 편이라고 했다. 박정희,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군부독재라고 비판하고 단죄하면서도, 대를 이어 절대권력을 세습하는 백두혈통에 대해서는 무슨 이유로 그토록 관대한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송두율 등의 주장대로라면, 5·16쿠데타나 12·12사태도 내재적 시각으로 접근해서 면죄부를 주어야 하지 않는가?

더구나 박, 전 두 사람은 우리 민족이 숙명으로 여겼던 절대빈곤을 벗어나게 하고 가가호호(家家戶戶) 자동차를 보유하고 해외여행을 일상으로 만든 공()이라도 있지만, 북한 지도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만들고, 여전히 쌀밥에 고깃국이라는 구호로 북한 주민들을 희망고문(希望拷問)’하고 있다. 한마디로 진보 진영이 내세우는 내재적 접근은 저들의 불순한 저의를 달성하기 위해 궤변(詭辯)일 뿐이다.

여권의 많은 사람이 북핵은 체제 보위를 위한 것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심지어 전 통일부 장관은 사실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미국의 핵 정책이다. 미국이 수교를 해주고 끝냈으면 이런 불행이 안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사건 발생 시간의 선후(先後)를 왜곡하고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으로서,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주사파를 중심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과 유사한 논리다.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게 된 것은,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에 대응해서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투입되고 그 전쟁이 현재진행형인 휴전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주한미군은 김일성이 불러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김일성의 남침(소련에서 기밀문서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북침’, 또는 남침 유도라는 주장까지도 서슴지 않았다)이라는 사실은 외면한 채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이라는 현상에 식민지 주둔군이라는 덧칠을 해서 반미 감정 조성에 활용하고 있다.

김정은 서울 답방이 화두로 대두되던 시기인 2018, 서울에서는 김정은의 서울 방문을 환영하는 위인 맞이 환영단공개세미나(12.8)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가문에서 자란 박근혜보다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자란 김정은이 나을 수밖에 없다”(김원웅 현 광복회 회장), “김정은 위원장은 전쟁을 멈춘 위대한 인물”(김수근 환영단장)을 비롯해 종북좌파라는 프레임을 씌우기만 하면 상식적인 모든 것들이 가라앉는 숨 막히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김정은 위원장이 방문하면 숨통이 트이는 사회가 될 것이다”, “몸에 밴 예의,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을 높이는 겸손함이 있다라는 등의 발언이 이어졌다. 위인 맞이 환영단세미나와는 별도로 진보 진영인 대표적 논객인 R 씨는 김정은은 계몽군주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2,500만 북한 주민에 대한 인권유린 현실, 지상천국(?)에서 탈출한 3만여 명의 탈북자, 대한민국을 무력 점령하려는 기도와 그에 관한 숱한 증거, 그리고 고모부와 이복형을 살해한 김정은의 잔혹함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금으로 보는 1차원적인 사고에 아연할 뿐이다. 이런 현상은 내재적 북한 접근론 등 잘못된 이데(Idee)를 수정받은 결과라 할 것이다.

2018년 11월 서울남북정상회담 방해세력 제압 실천단 백두수호대 회원 2명이 태영호 공사 칼럼을 요구하며 본지 사무실을 찾아 시위하고 있다. /사진=데일리NK

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또 하나의 기망(欺罔)

내재적 북한 접근론과 함께 북한을 보는 시각을 혼란스럽게 한 화두는 진보 진영으로부터 ‘사상의 은사’라고 추앙받는 리영희 교수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리 교수가 1990년대를 전후로 해서 쓴 평론들을 모아서 1994년에 발간한 정치 평론집과 제목을 같이 한다.

리 교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 이유에 대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펜을 놓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들은 아직도 위대한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감이 든다. 아무래도 제정신들이 아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백주 노상에서 남의 허벅다리를 찌르지 않나, 무슨 책을 냈다고 지금도 잡아가질 않나, 누군가의 사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어린 학생들의 주리를 틀지 않나! 그 모든 짓이 라는 것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어찌 이리도 유치할까?

가 뭐고 가 뭔고? ‘는 절대로 나쁘고 는 절대로 옳다는 전도된 사고방식은, 그런 위험하고 유치한 이분법의 대표적 신봉자인 레이건이라는 사람조차 이제는 부정하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남의 나라 사람의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제시 잭슨이라는 미국 흑인의 말이 좋다. 대통령 입후보 경선에서 미국 사회의 제도적인 병폐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시 잭슨에게 라는 사람들이 라고 비난을 하였다. 잭슨이 점잖게 반박한다.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

나는 뉴스를 보면서 잭슨, 말 한 번 잘한다라고 감탄했다. ‘라는 것을 무슨 신성한 것인 양 받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아무 대꾸도 못하고 나는 새만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그 새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날개는 멀어서 자로 잴 수는 없었지만, 나의 눈에는 그 모양의 크기가 꼭같아 보였다.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左翼)와 오른쪽 날개(右翼)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의 원리가 아닐까? (중략)

8·15 이후 근 반세기 동안 이 나라는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악하다는 위대한 착각 속에 살아왔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은 진보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새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1988915)

리영희 교수의 주장대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여기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빠른 아킬레스는 앞에서 출발한 거북을 따라잡지 못한다’라는 제논의 역설과 비슷한 함정이 있다. 제시 잭슨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올바르게 유지해 나가는 방법을 새의 ‘좌우 날개’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리 교수의 좌우익은 표제어만 같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일제 식민지 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좌와 우는 각각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의미하며 이는 독재체제와 민주 체제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국가는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과 달리- 독재와 민주가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리 교수는 북한 도발 위협이 엄존하는 특수한 안보 상황은 배제한 채, ‘새가 하늘을 나는’ 방식의 겉보기만을 동원하여 한국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한편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원체험(原體驗)에서 비롯된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를 희석(稀釋)하는 데 이용했다. 이는 당시 분위기가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진보적’이라는 지적(知的) 허영심에 편승한 것으로 일종의 기망행위였다고 할 것이다.

한편 1989년 남북작가회담 참석차 평양을 다녀온 황석영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방북기를 출판(1993년)했는데, 주 내용은 ‘그곳에도 남한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이다. 이 또한 교묘하게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서 북한의 모순적인 체제를 호도하고 있다. 사실 석기시대의 원시인들은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생존해 왔고, 지금도 사막이나 극 지대와 같은 극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21세기라는 시대 환경에 걸맞게 자유를 누리고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느냐인 것이다.

라. 소결론

「내재적 북한 접근론」이 소개되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화두가 등장한 무렵인 1980년대 후반은 한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채택이 포함된 헌법 개정 등 민주화운동이 결실을 맺고 있었다. 한편 유럽 지역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개혁개방을 추진한 것을 비롯해 동구 제국의 민주화 요구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중국도 -천안문 사건(1989. 6)이라는 곡절이 있었고, 정치적으로 공산당 통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시장경제 체제는 ‘호랑이 등에 탄 격’이었다. 바야흐로 70여 년간의 공산주의 실험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 무렵 진행된 ‘88서울올림픽’에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 진영 국가들이 대거 참가한 것도 냉전 종식이라는 시대적 추세를 보여준 행사였다.

문제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의 민주화가 한국의 민주화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한 세력인 이른바「386세대」의 목적은 사회주의적 변혁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를 타파하는 것이었지만, 세계사적 흐름은 그와는 정반대로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념적으로 북한(의 김일성)과 직·간접적인 연계를 맺고 있던 이들에게는 대단히 반동적인 움직임이자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위기에 처한 이들 진보 세력과 민주화운동에 이론적 정당성과 생존술을 제공한 것이 궤변이나 다름없는 ‘내재적 접근론’과 ‘좌우익 공존론’인 것이다.

공산사회는, 관념적으로는 이상향(Utopia)임에 틀림이 없지만, 현실에서는 스탈린과 같은 희대의 독재자를 양산했을 뿐 절망향(絶望鄕, Kakotopia)이었다는 점에서, 공산사회 건설이라는 시도는 진작에 종언을 고했어야 할 실험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회주의적 개혁을 시도하는 한국 진보 세력은 겉보기만 진보일 뿐 어느 집단보다 수구적이라 할 것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