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친일파’, 뻔한 그들의 정치적 속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는 1964년 12월9일, 서독의 수도 본에서 있었던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의 회담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강하지 못해 세계를 몰랐고 그래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제 독일에 와서 라인강의 기적을 배우고 우리도 독일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 공산국가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강국이 되고자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일제시대였지요.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목적은 경제발전에 필요한 돈을 빌리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총리와의 예정된 40분을 서독 정부의 재정지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데 모두 써버렸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비서를 통해 회담 시간을 30분 더 연장하라고 지시한 후,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각하, 일본하고 손을 잡으시지요.” 박 대통령은 이 말을 전해준 통역사에게 화를 냈다. “뭐? 돈 좀 꿔달라는 데 일본 얘기는 왜 꺼내?” 박 전 대통령의 표정을 본 에르하트르 총리는 통역사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각하, 우리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상 마흔두 번이나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 총리는 드골과 만나 악수를 하면서 이웃 나라끼리 손을 잡았습니다. 한국도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



박 대통령도 맞받아 쳤다. “우리는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싸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몰래 힘을 키운 일본이 침략했을 뿐입니다. 그래 놓고도 지금까지 사과도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라와 어떻게 손을 잡으라는 말입니까?”



에르하트르 총리도 재차 권유했다. “각하, 지도자는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두 나라 사이에 협력관계를 만들어야 공산국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손을 잡으십시오.”



박 대통령은 오른손 바닥을 왼손 등 위로 포개면서 “이렇게 눌려 싸웠는데도 말이오?”라고 다시 물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인자한 표정으로 박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예, 각하. 눌려 싸운 것이나 대등하게 싸운 것이나 모두가 과거의 일입니다. 일본과 손을 잡고 경제 발전을 이루세요. 우리가 뒤에서 돕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에 감격한 표정으로 총리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르하트르 총리는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재정차관 2억5천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사실, 한국사회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함정에 갇혀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달려왔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우리는 일본제국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 관심을 두면서도 그것이 도를 넘지 않는 지혜를 발휘했다. 누구를 고발·처벌하는 것이 역사청산의 본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제국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이식된 근대문명과 우리의 전통문명 가운데 생명력 있는 것들을 융합한 기초 위에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여 배고픔의 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역사청산의 길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해방 이후, 우리 사회를 끌어온 지도자들은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혀 다양한 모습으로 제국의 역사에 짓눌려 살아온 동포를 사냥하는 일에 국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민족의 잠재력과 국민적 에너지를 아끼고 모아 발전과 번영을 위해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선진한국의 문턱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지난 60여 년 동안 ‘발전’과 ‘번영’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슬기롭게 ‘역사청산’을 마무리한 것이다.



8일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60여년에 걸쳐 우리 민족과 국민이 피땀 흘려 이룬 실천적 역사 청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일부 학자들과 우리 사회의 발전을 주도해온 세력을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사회주의 세력(또는 과거 사회주의 세력)들이 모여 만든 것이다.



현 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다. 친일했던 사람을 골라내고, 그들을 공격하고 박해하는 것이 역사청산이라고 믿는다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얕은 역사인식과 편협한 역사관을 탓할 수밖에. 그러나 자신의 정적(政敵)을 친일파로 엮어 폭로하고 그 반사이득을 얻어 보려는 철지난 사회주의세력들은, 우리 사회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목적은 퇴행적인 역사 청산론과 얄팍한 역사인식을 정치적 무기로 삼아 한국사회의 눈부신 발전 성과와 그것을 주도한 정치세력을 부정함으로써 정치·사상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있다. 이들은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관학교에 가기 위해 쓴 맹세문과 편지를 근거로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의 정치적 속셈이 뻔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교사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느 날 군인이 되기 위해 군관학교에 갈 결심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규율과 질서 아래 절제 있게 생활하는 군인을 동경했던 그는, 그 즈음 자신의 기질이 군인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문제였다. 일본군은 19세 이하만 지원할 수 있었는데, 그의 나이는 이미 24세였다. 그는 호적을 고칠까도 생각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혈서를 써서 자신의 결의를 보이면 받아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본 육사보다 조금 덜 까다로운 만주국 만주군관학교에 혈서를 보냈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라고 썼다.



일본 제국시대에 조선은 없었다. 일본 제국시대에 조선인 출신 의사, 교사, 군인, 공무원, 기업인, 체육인 등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공식적으로는 일본인이었다. 일본 의사, 일본 교사, 일본 군인, 일본 공무원, 일본 기업인, 일본 체육인들이었다. 일제시대 조선인 젊은이들에게도 꿈은 있었다. 의사가 되고 싶은 젊은이도 있었고, 교사가 되고 싶은 젊은이도 있었다. 당연히 군인이 되고 싶거나 공무원이 되고 싶은 젊은이도 있었다. 박정희는 그런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일제시대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그렇게 조선인 출신 일본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어느 조선인이 제국과 식민의 역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조선 백성들이 생존을 위해 일본인으로 살아야 했던 사실은 단죄의 대상이 아니라 보듬고 치유해야할 역사적 상처이자 아픔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덮어버린 채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우리 민족의 쓰리고 아픈 역사적 상처를 헤집어 놓고, 그것을 얄팍한 정치투쟁의 불쏘시개로 쓰고 있다. 더구나 21세기를 새로운 시대의 비전과 역량을 세우기 위해 국민적 에너지를 모을 때, 허구적인 ‘역사바로세우기’를 앞세워 국력과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천박한 역사관과 위선으로 무장한 그들의 투쟁을 비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