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비밀파티’ 김일성 ‘요정정치’가 원조?

▲45년 9월30일 평양요정「花房」에서 조만식(맨왼쪽)과 김일성(맨오른쪽)이 처음 만났다

김정일이 1970년대부터 측근을 관리하고 당∙정∙군 실력자들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작한 ‘비밀파티’는 김일성이 해방 이후 1948년 건국까지 당시 북한 내 주요 정객들을 설득∙포섭하기 위한 ‘요정정치’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해방 후 평양에 주둔하면서 북한에 군정을 실시했던 전 소련 25군 사령부(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정치담당관 그레고리 코노비치 메크레르(당시 83세)씨가 지난 91년 8월 중앙일보 특별취재반에게 김일성의 특별한 요정정치에 대해 증언하면서 처음 밝혀졌다.

당시 소련 극동군의 정치장교였던 그는 스탈린 정부의 지시에 따라 중좌(중령) 계급장을 달고 1945년 9월 초 평양에 급파돼 1946년 9월 초까지 1년 동안 소련군 제 25군 정치사령부에서 국내 주요 정치 지도자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메크레르는 “(김일성은)정치적 리더십과 계략이 뛰어났다”면서 “새파란 청년이 정치적 현안들이 있을 때마다 주요 인사들을 요정으로 초청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문제를 풀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일성의 요정정치는 조만식(曺晩植)은 물론이고 김용범(金鎔範)∙오기섭(吳淇燮) 등 1940년대 국내 공산계열 지도자들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고 말했다.

메크레르는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정책∙당조직 등에 대한 학식을 갖추지는 못했다”면서도 “정치적 리더십과 계략은 뛰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김일성이 당시 조만식에게 민족지도자로서 예의를 갖추고 조선민주당 창당을 권할 때도 수십차례 집을 찾아 예의를 갖추면서 건국문제 등을 상의했다고 말했다.

메크레르는 그러나 “김일성이 겉으로만 조만식을 대선배로 받드는 척했을 뿐 자기들끼리 모이면 ‘반동 영감쟁이’ 조만식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김일성의 이중적 태도는 인민의 신망이 큰 조만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를 포섭해도 좋다는 양해를 스탈린에게까지 구해놓고 있는 소련군의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지목된 1970년대 초부터 비밀파티를 시작했는데, 이는 단순히 놀기 위한 파티가 아니라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정치행사였다. 우리에게는 ‘기쁨조’가 공연을 하는 파티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은 김정일의 용인술의 일환으로 준비된 자리였다.

이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 비교적 ‘부부장급’이 많은 이유도 김정일이 1970년대 당 내 주요 자리를 자기 사람들로 채우기 위해 이 파티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982년 남한에 입국, 9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된 이한영이 14년의 침묵을 깨고 1996년 출판한『대동강로얄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지에 대해 ‘술과 여자를 통해 분위기를 돋구고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을 직접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술과 여자가 등장하는 요정이나 파티를 이용해 확대해 간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닮은 꼴이다. 김일성은 생전에 “사람 다루는 솜씨는 아들(김정일)이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주변에 말한 적도 있다.

3대 세습을 준비하는 김정일이 자신의 아들에게도 술과 여자를 통한 용인술을 가르칠지 궁금하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