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아프리카 순방과 등거리 외교의 비애

박근헤 대통령의 뜬금없어 뵈는 아프리카 순방을 두고 일각에서는 뒷말이 무성하다. 일본에서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아베 총리의 초대까지 거부하며 아프리카에 가야 했던 급박한 이유가 뭐냐고 ‘직무유기’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다. 더군다나 퇴직한 지 오래된 전직 수반들이 모이는 제주포럼에 현직 반기문 UN사무총장이 참석하여 온통 지면이 뜨거워진 하필 상황에서 말이다.

청와대가 몰라서 대통령의 일정을 그리 짰을지 만무하다. 여기엔 깊은 비애가 있다. 박근혜 식 등거리 외교의 슬픈 자화상이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생존에 유리하다는 자기기만. 아이러니하게도 등거리 외교로 말하자면 김일성이 원조다. 1960년대 중소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북한의 선택은 비판적 중립이었다.

허나 실상은 중국과 소련의 눈치를 극도로 살펴야 했던 거다. 이는 북한의 국가 정체성이 한없이 허약했다는 방증이다. 양편을 교조주의와 수정주의라 비판하며 적당히 실리를 챙기자는 계산은 캐스팅보트를 쥐지 못한 최약체국의 서글픈 자기변명이었다.

그랬던 등거리 외교가 남한에서 부활하다니 역사는 정녕 반복된단 말인가? 중국과 소련 사이를 오갔던 김일성의 외교궤적을 이제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선 박근혜 대통령이 재현하는 것은 남북이 처한 현실이 실은 동일하다는 암시인가.

미국의 뜻을 모른 척, 중국 전승절에 참석할 때는 중국으로 기우는 건가 싶었지만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논란으로 다시 미국 편에 서는가 싶더니 이제는 중국의 심기가 불편해질 걸 염려해 G7에 가지 않음으로 다시 여지를 남기는 외로운 줄타기.

그 빈자리를 반기문 UN총장이 들어선 모양새는 우연 같지만 시사하는 상징성이 크다. 역사는 우연도 필연으로 만드는 신의 관장 사항이나 언제나 교훈을 남긴다. 그것은 스스로 서지 못하는 국가의 운명은 항상 강한 이웃의 영향력에 예속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딛고 서느냐에 따라 국운이 갈린다. 북한이 핵에 운명을 걸었다면 남한은 자본(돈)을 택한 것만 같다.

결과는 중국발(發) 중금속 오염먼지로 ‘푸르른 5월’이 잿빛으로 변해도, 고작 고등어구이 타령이나 하고 국내 경유차와 화력발전소나 없애자는 자기비하성(?) 목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비겁함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한다는 거다. 덩치 큰 이웃에게 소리칠 수 있는 힘은 지적이고 이성적인 정신력에 달렸는데도 스스로 비굴해지는 길을 재촉하고 있다.

1960년 2월 모스크바에서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의가 열렸다. 참관국으로 참석했던 중국은 소련이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을 재천명하자 그간 쌓여왔던 불만을 공개적으로 터뜨렸다. 10년을 이어갔던 중소분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를 지켜본 북한은 소련과 중국을 각각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라고 비난하며 이념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한다.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 발아(發芽)하는 지점이다. 북한이 핵무장을 걷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이때 핵무기만이 최후의 생존보루임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중국이나 소련이 북한의 비판을 별반 신경이나 썼을 리 만무하지만 노선투쟁에서 이념비판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작이 된다. 김일성이 중·소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실리를 추구한 방식이 인민의 이념무장이었다는 것은 현실 공간에서 사상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독재는 지배 이념을 독점적으로 장악할 때만이 가능한 일임을 일찍이 알았던 것이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모태-을 세워 국가장학생을 집중 육성한 것은 북한의 이념전략을 간파한 까닭이 크다.)

역사는 바뀌어 50년이 흐른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소극적’ 등거리 외교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소극적’이라 명명한 이유는 독자적인 자기 목소리 없이 양편을 오가는 수동적인 모습을 연출한 데 있다.

반면, 김일성은 양편-중국과 소련-을 비난하며 자기 길(주체사상과 핵무장)을 제시했으니 ‘적극적’이라고 해야 할까? 박 대통령으로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애석할 지도 모른다. 김일성만큼 긴 시간을 갖고 있다면 자신도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아쉬워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찌하랴, 이것이 민주국가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니 말이다.

박 대통령의 이번 아프리카 순방에 대한 비난은 별반 주목을 끌지 못할 것이다. 중국을 배려했다는 걸 잘 아는 야당이나 언론이 이를 크게 부각시킬 리 없다. 때로 대통령이나 야당이나 여당이나 언론이나 적어도 대중국 비겁한 자세에서 만큼은 ‘초록이 동색’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