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여성 두번 울리는 출산정책

▲아이를 돌보고 있는 북한여성<사진:연합>

북한에서 국가적으로 출산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후반이다.

당시 북한사회 전역에는 다산(多産) 문화가 뿌리 깊게 확산되어 있었다. 흰 위생복 차림의 의사들은 저녁마다 인민반에 나와 방금 퇴근해온 사람들을 모아놓고 다산문화의 불합리성에 대해 해설하곤 했다.

60년대까지는 다산문화가 지배적

유치원 시절의 내가 어머니 치맛자락에 묻어 따라가던 인민반 회의에서 들은 해설 내용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다산문화는 낡은 사회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병원이 적고 의료시설도 변변치 않던 사회에서 여성들의 임신은 출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가구당 7~8명의 자녀를 낳는 일이 많았는데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다 보니 자식에 치여 사람들이 문명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녀 1명당 양육비를 계산한 분석표를 알려주었었는데 자식이 많을 수록 생계유지에 드는 비용이 막대했다.

강연을 나온 의사는 자식 많은 집 치고 잘사는 집 없었고, 자식 적은 집 치고 궁색한 가정이 없었다고 하면서 저출산의 우월성을 끈질기게 설명했지만 그 말을 듣는 청중들 속에선 대책이 없다는 듯 한 웃음소리만 난무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법으로 알며 살아온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에 거역하는 저출산 문화가 불가항력적으로 느끼는 듯 했다.

80년대에 이르러 저출산 문화 자리잡아

북한당국의 저출산 정책과 이에 무관심한 군중 사이의 괴리는 십 여년 동안 계속됐다.

북한은 ‘동(洞), 리(里)의 인민병원화’ 정책을 내놓고 군(軍) 병원체계의 인민병원을 동, 리까지 만들도록 했으며, 이 병원들에 산부인과를 우선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 병원에서는 여성들의 임신 초기부터 관리하며 정기적인 검진을 실시하는 한편 자녀가 2명 이상인 여성은 위협반, 설득반으로 임신중절을 강요했다.

북한 당국의 끈질긴 저출산 정책의 결과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대부분 북한 여성들은 2~3명의 아이를 낳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

1980년대 중반부터는 국가가 저출산 정책을 특별히 장려하지 않아도 여성들 스스로가 알아서 아이를 적게 낳았는데, 일부 여성의 경우 한 명의 자녀만 원하거나 아예 자식을 낳지 않는 부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식량난 때문에 기형적인 인구감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대미문의 식량난이 장기간 이어지는 통에 인구 급감현상이 눈에 띠게 초래되자 정부는 저출산 정책을 급진적인 다산정책으로 바꾸었다.

모든 병원들에 임신중절 수술을 금지하는 법적 조치가 하달되었다. 만약 수술을 해준 사례가 발각되면 해당 의사를 처벌을 하거나 의사 면허를 취소하는 특별조항까지 설정되었다.

이미 저출산의 편리함을 맛본 여성들과 국가의 엄명을 받은 의사들간에 충돌이 생겼다. 아이를 원하지 않거나, 생계유지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들은 어떻게든 중절수술을 받으려 했고 의사는 법이 허용하지 않는 시술을 하다 애꿎은 희생양이 되는 화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산사람도 입에 거미줄이 생기는 판이라 결국 사정이 급한 임산부 쪽에서 능력만큼 병원측에 뇌물을 바칠 수 밖에 없었는데 국가에서 배급을 받지 못했던 의사들은 이런 환자들의 뇌물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뇌물 바칠 능력이 없는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아야 했고, 형편이 더 어려운 여성들은 방금 낳은 아기를 철도역이나 장마당 같은 곳에 놓고 자리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를 낳아도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사회

북한정부의 비현실적인 다산정책에 대해 북한 여성들이 반항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평양에서 막 추방되어 청진시내에서 두 달간 머물던 때였다. 시내의 어느 시장에 들어 갔다. 시장입구에 빵을 팔던 중년여자가 주위를 얼른거리는 대 여섯 명의 꽃제비들을 보고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을 목격했다.

“여자들에게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만 하지 말고, 국가가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나 제대로 건사해야 할 것 아냐? 산 사람마저 저렇게 꽃제비가 되어 굶어 죽는 통에 아이를 또 낳아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그 여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옷차림이며 얼굴 모습이 비록 남루하긴 했지만 분명 교원 출신인 듯 했다. 집 없이 방황하는 어린 아이들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해온 듯 했다. 자신도 식량난으로 교단을 떠나 일개 빵 장수가 되긴 했지만 자기 제자 또래의 아이들에 대한 본능적 고민은 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 앞에 머리를 수그렸다. 그녀만큼 어린이들에 대해 고민을 해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북한여성들이 북한당국의 다산정책에 대해 반발하는 현상은 단순히 생활고 때문이 아니었다. 건강한 인구증가를 위한 현실적인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머릿수만 늘이는 것으로 감소된 인구수를 보충하려는 북한당국의 태도에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최진이/ 前 조선작가동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