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혁명군, 김일성이 가공해 만들어낸 군사조직

김일성이나 최현의 회고록에서는 공히 유격활동을 주도했던 군 조직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을 내세우고 있다. 북한의 공간문헌에서도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설적인 항일유격대 투쟁이 선전되고 있으며 현재 조선인민군의 모태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조선인민혁명군은 실체가 없었던 군 조직이다. 김일성이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 후 자기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항일투쟁 업적을 왜곡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된 군사조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일성은 “대중을 속일 때에는 엄청난 거짓말을 하라”는 히틀러의 명제를 충실히 체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현의 회고록(p.122)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 1934년 3월에 편성됐다고 언급돼 있다. 당시의 반일 유격대를 기초로 하여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이 개편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완전한 날조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0년대 만주지방에서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혁명군’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소비에트 홍군이라는 명칭을 취소하고 다시 성립할 것을 지시했던 코민테른의 ‘1월 서한’에 따라 결성한 ‘동북 인민혁명군’의 명칭을 조합해서 고안해낸 가공의 조직이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결성됐던 동북항일연군의 역사를 조선인민혁명군의 그것으로 기술하는 역사 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같은 해 10월 12일 중국 공산당중앙은 ‘만주 병사공작지시에 관한 지시’를 내려 항일 유격대를 건설할 것과 이 유격대를 농촌으로 확대하여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는 각 지역별로 공산 유격대가 형성됐다. 남만 유격대, 동만 유격대, 그리고 동북 인민혁명군 등이 그것이다. 김일성, 최현 등은 모두 동만 유격대 소속으로 분류된다. 동만 지역의 유격대는 1932년 초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연길, 왕청, 훈춘, 화룡 등 4개 현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최현이 속한 연길현 유격대는 대장이 한인인 박동근이었다. 김일성을 비롯하여 최광, 오진우 등은 왕청 유격대 소속이었다. 김일성은 당시 왕청 유격대의 대장이 아니었다. 이 유격대 대장은 양성룡으로 역시 한인이었다. 1933년 9월에 왕청 유격대와 훈춘유격대는 중국 구국군 오의성부대와 연합하여 동녕현성을 공격했다. 이때 김일성은 왕청 유격대의 일개 소대장으로 처음 항일전쟁에 참가했다.


“(중략) 33년 9월 오의성군은 동년현성을 공격했다. 오의성군은 1100명이었다. 사충항이 인솔하는 구길림 구국군 제3단도 가세하였다. 여기에 왕청, 훈춘의 유격대가 참가하였다. 그들의 병력은 200명 정도였기 때문에 구국군의 작은 부분을 구성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왕청의 부대는 양성룡이 인솔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김일성도 참가하고 있었다. 구국군은 성내로 진격하였지만 점령할 수는 없었고 결국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다 하루끼 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 p.106.


한편,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을 지은 백봉(白峯)은 1933년 6월 김일성이 오의성을 방문하여 연합이 성립되고 동녕현성 전투가 이뤄졌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와다 하루끼는 김일성의 방문 면회가 이뤄졌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며 동녕현성 전투는 어디까지나 오의성군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은 김일성이 최초로 참가했다는 동녕현성 전투가 사실 김일성이 주도했던 전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최현이 소속했던 연길현 유격대가 한인 위주로 구성됐으며 항일투쟁의 독자적 활동을 했던 반면, 김일성의 왕청 유격대는 한인이 중심이 된 구성이긴 했으나 후에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며 항일 투쟁의 자율성을 발휘하진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일성이 최현을 처음 만나 마치 자신이 주도했던 것처럼 언급했던 동녕현성 전투도 기실은 중국 구국군 오의성부대의 지휘를 받은 것이었으며, 당시 김일성은 처음 전투에 참가했고 일개 소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이 소대장을 맡고 있던 왕청유격대의 제 3중대장은 황해룡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최현의 자신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이 이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친 것처럼 최현을 대했다.


“(중략) 그 상봉을 마련해 준 계기가 동녕현성 전투였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통신원의 불찰로 참전명령을 제때에 받지 못하여 행차 뒤 나발격으로 때늦게 마촌에 도착한 최현은 그때 동녕현성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해하였다. 그는 통신원을 두고 오만가지 쌍욕질을 다하고 나서 분이 좀 가라앉은 다음 나에게 물었다. ‘왕청도 참가하고 훈춘도 참가하고 구국군패들까지 다 참전했는데 유독 연길의 시라소니들만은 동녕현성대문앞에 가보지도 못하고 엉덩방아만 찧고있었으니 이거야 어디 분통이 터져서 견디겠습니까. 김일성대장님, 또 다른 곳을 칠 계획은 없습니까.’ 최현은 마레샹 보총으로 불뭉치를 들고 곡식 낟가리에 달려드는 적병 한 놈을 단방에 쏘아눕히였다. 적과의 거리가 약 500미터나 되었으나 그는 매번 단발명중으로 적들을 쓸어눕히곤 하였다. 그의 사격솜씨는 실로 만사람을 감탄시킬만한 것이었다.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한이 이제는 좀 풀리였습니까.’ 전투가 끝난 다음 최현에게 이런 질문을 했더니 그는 입을 다시며 머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좀 풀리긴 했지만 아직은 냠냠하우다.'”–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4’ (조선 로동당 출판사, 년도 불명), 5. 백전로장 최현 파트.
 
이 대화에서 “김일성 대장님, 또 다른 곳을 칠 계획은 없습니까”라는 최현의 물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녕현성 전투 당시 김일성의 계급은 대장이 아니었지만 마치 그가 동녕현성을 주도적으로 공격한 듯한 뉘앙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동녕현성 공격의 주도자는 오의성부대의 오의성이었다. 그는 원래 마적 출신이었다. 와다 하루끼의 기술을 따라가보자.


“장군들뿐만 아니라 동북군의 하급 지휘관들도 궐기하였다. 연길의 27려 677단 제3영 영장 왕덕림(王德林)의 궐기는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1903년부터 반청항러의 군사행동을 전개했던 녹림(마적)의 두목이었다.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부하 공헌영(孔憲營), 오의성(吳義成)과 함께 1917년부터 길림군에 편입되어 옹성라자에 주둔하고 있었다.”– 와다 하루끼 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 p.69.


김일성의 상관인 오의성이 과거 마적 두목이던 왕덕림과 의형제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유격대 조직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내용은 김일성을 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마적들과 어울리면서 행했던 행적을 능히 짐작케 해준다. 한편, 1935년 중국공산당 중앙의 ‘8.1 선언’에 따라 1936년 2월 만주성 위원회는 동북 인민혁명군 6개 군과 각종 소규모 유격대들을 규합하여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을 결성했다. 1941년 일본의 토벌작전이 강화되고 제1로군 사령관이던 중국인 위증민이 병사함으로써 사실상 와해되기 전까지 동북항일연군은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과 크고 작은 유격전을 감행하며 일본군에 커다란 피해를 안겨 줬다. 그러나 1941년 후 일본군의 토벌이 강화되자 김일성을 비롯한 살아남은 유격대원들은 소련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이들이 소련으로 도피한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산시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군과 한국 임시정부 김구 휘하의 한국광복군 등이 악조건 속에서 일본군과 투쟁하고 있었다. 이들 독립군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지 않고 안전지대로 도피한 중국 유격대가 비겁한 무리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동북 항일연군은 조선인민혁명군과는 전혀 다른 실존했던 군사조직이었다. 심지어 북한이 ‘혈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중국조차도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를 부인했다. 예컨대 1962년 4월 25일 평양에선 항일유격대 창설 30주년 기념행사를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 초청된 중공측 수뇌급 간부 팽진(彭眞)은 이 점을 피력했다. 쉽게 얘기하자면, 중국 측은 김일성이 주도하여 조직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은 날조된 것이며,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의 일개 지방당의 말단 조직원으로서 당의 지도 하에 행동했던 자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현재도 4월 25일을 조선인민군 창건기념일로 선정하여 매해마다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으며 북한의 날조된 역사가 우리 백과사전에까지도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한국어 위키백과사전은 동북 항일연군 또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 하여 현재까지도 두 조직을 동일시하는 오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당시의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항일 역사는 대부분 사후에 왜곡 조작된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사실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투쟁이 거의 다 그랬다.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을 따진다면 김구의 한국광복군을 우선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과 최현의 업적만을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면 오히려 김일성의 심복이자 절대 충신이었던 최현의 투쟁사가 보다 더 무장투쟁의 역사로 정통성을 지닌 것이었다. 최현은 출신성분부터 독립군 집안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반일, 항일 사상을 체현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전투에 직접 지휘 또는 참가했다.


그렇다면 이렇다 할 업적도 없는 김일성은 어떻게 해방 후에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김일성은 소련에 순종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에 스탈린(Joseph Stalin)으로부터 낙점을 받은 것이지 그의 전략전술이나 무장투쟁 업적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나 성품도 결하고 있었다. 6.25전쟁 시기 전술적 실패 사례나 부하들에 대한 대우, 그리고 중국과의 갈등 사례에서 나타난 중국의 무시 등을 보면 그의 민낯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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