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랍(舊臘) 북한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무엇으로 선정할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에 달려 있다”고 위협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리태성 북한 외무성 미국담당 부상은 지난해 12월 3일 발표한 담화에서 “우리가 미국에 제시한 연말 시한부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지만, 미국은 지속적이며 실질적인 대화 타령만 하고 있다”며 “(우리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무엇으로 선정하는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은 ‘북한의 선물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우려 섞인 관심을 가지고 북한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선물의 정체는 전례가 드물게 4일간 진행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드러났다. 마라톤식으로 진행된 회의에서 결의한 내용은 ‘적들의 제재 압박을 무력화시키고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활기를 열기 위한 정면돌파전을 강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미협상 종결을 선언하지도 않았고, 북한이 예고해 왔던 ‘새로운 길’도 제시하지 않았다.
한편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신년사를 대체한 결산 보고에서 “조미(북미) 간의 교착 상태는 불가피하게 장기성을 띠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세기를 이어온 조미 대결은 오늘에 와서 자력갱생과 제재와의 대결로 압축되어 명백한 대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기어이 자력부강, 자력 번영하여 나라의 존엄을 지키고 제국주의를 타승하겠다는 것이, 우리의 억센 혁명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또 당 전원회의에 앞서 김정은 지도하에 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3차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국가방위사업 전반에서 결정적 개선을 가져오기 위한 중요한 문제들과 자위적 국방력을 계속 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핵심적인 문제들을 토의”(19.12.22 노동신문 보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북한은 이미 올해 초대형 방사포를 포함해 총 13차례에 발사체를 쏘아 올렸으며, 지난 12월 7일과 13일에는 동창리 서해 위성발사장에서 ‘중대한 시험(실험)’을 실시한 바 있다.
일련의 동향을 종합해 보면, 북한의 의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미 확보해 놓고 있는 핵·미사일 능력을 ‘어떻게든’ 계속 유지하면서, 둘째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이로 인한 경제난은 ‘자력부강, 자력번영’의 구호로 버텨내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당은 또다시 간고하고도 장구한 투쟁을 결심했다”는 김정은의 언급이다. ‘간고하고도 장구한 투쟁’은, 결국 ‘승패는 결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전투만 이어지는’ 참호전(塹壕戰)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지난시기 4년간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900여만 명의 사망자와 2200여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무기체계가 대량 살상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이유는 대부분의 전투가 참호전으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참호전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에서의「페젠데일 전투」는 영국 연방군이 1917년 7월부터 11월까지 약 4개월에 걸쳐 독일군 방어선을 뚫기 위해 돌격 작전을 감행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단 8km만을 전진하는데 5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군은 25만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야말로 끝이 없는 인력의 소모전이었다. 그리고 참호전의 희생자는 대부분이 초급장교와 지도자들이 벌인 전쟁의 이유도 모른 채 전장에 끌려온 병사들이었다. 이처럼 참혹한 전쟁의 모습을 그려낸 수작(秀作)이 다름 아닌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이다.
북한 주민들의 참호전은 이미 시작됐다. 노동신문(1.6)은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강령적 과업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평양시 궐기대회가 5일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이날 궐기대회는 김재룡 내각 총리와 김덕훈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일철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당과 내각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의 토론과 결의문 낭독 및 채택, 군중시위 순으로 진행됐다.
보도에 따르면, “참가자들의 얼굴마다에는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강령적 과업을 결사 관철하여 자력부강, 자력번영의 불변침로 따라 신심 드높이 나아가는 내 조국의 힘찬 전진은 그 무엇으로도 멈춰 세울 수 없다는 역사의 진리를 조국청사에 빛나게 아로새길 굳은 맹세가 비껴있었다”고 보도가 아닌 선동을 했다.
이제 평양을 시작으로 지역·직장별로 궐기대회가 끝나면, 남은 것은 제시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해 ‘맨몸으로’ 경제건설 현장에 투입되어 천리마·만리마 속도전을 벌이는 것뿐이다. 북한이 이번에 ‘자력부강, 자력번영’의 구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는 지난 60여 년간 북한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온 자력갱생 원칙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 일상이 된 21세기 지구촌 시대에 ‘자력(自力)으로 갱생(更生)하겠다’는 것은 무정란(無精卵)에서 병아리가 부화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이 감내해야 할 희생과 고통이 안쓰러울 뿐이다.
끝으로 사족(蛇足) 한 마디. 북한은 이번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기는 하지만, 평화와 번영을 내걸고 추진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도 결국 ‘항상 시작일 뿐’(semper initium)이었던 역대 정부들의 대북정책과 마찬가지의 처지가 될까 상당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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