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얼핏 동북아 안보질서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북한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 러시아와 서방 국가 사이에 끼인 우크라
이나의 향배가 북한으로서는 좋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이 한반도 상황과 대등하진 않지만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생생한 교과서라 불러도 될 만큼 우크라이나의 현재는 동북아 질서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이 주시하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관전 포인트는 뭘까?
첫째,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특수성이다. 우선 러시아와의 긴 악연은 뿌리가 깊다. 18세기 후반 강력한 영토확장을 꿈꾸었던 제정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가 직면한 첫 번째 과제는 부동항(不凍港)의 확보였다. 대유럽 진출의 전략적 요충지 1순위로 꼽힌 곳은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유일한 바닷길인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이때 일어난 러시아-터키 간 전쟁이 크림전쟁(1853년)이다. 러시아의 야욕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한 결과, 1856년 파리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빈손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러시아는 다시 터키와 전쟁을 치르지만 이번엔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의해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두 번의 전쟁 사이에 슬라브민족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들은 러시아의 특이한 문화와 제도를 찬양하고 서구적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러시아는 독특한 나라로서 습관, 신앙, 제도가 고유의 독자성을 띄고 있다는 주장이다. 정치적으로 보수반동체제를 찬성하고 전제주의와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표출했다. 이렇게 등장한 범슬라브 민족주의에 힘입어 러시아는 끊임 없이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기회를 엿보았고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막고자 했으니 발칸반도가 ‘유럽의 화약고’로 불린 것도 당연하다.
결국 예카테리나 2세는 보스포러스 해협까지는 가지 못하고 지중해와 잇닿아 있는 흑해의 작은 반도(Crimea)에 부동항(Sevastopol)을 얻는 것으로 군사적 야망을 일단 접어야 했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 결국 크림반도는 구(舊) 소련의 영토로 편입된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유일하게 러시아 인구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우크라이나는 발칸반도를 서편에 두고,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의 서진(西進)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핵심국가이다. 1954년 소련 서기장이 된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를 다시 우크라이나로 넘긴 것은 자신이 우크라이나 출신이란 점이 작용한 것이지만 전략적으로 최고 요충지인 크림반도를 푸틴의 러시아가 서구 영향권 아래로 내어줄 리 만무하다.
둘째, 우크라이나의 과거 핵 역량이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가 전 세계 3위의 핵무기 보유국이었다는 사실은 러시아가 핵 냉전시절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국제 핵 레짐(NPT)의 관리 체제 아래 들어갔다. 1994년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 반환하고 영토와 안보를 보장받는 조약(부다페스트 양해각서)을 안보리 핵 국가들과 맺는다.
이 조약은 핵 비확산이라는 국제 핵 관리 목표에 성공적인 모범으로 기록되는데 바로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이 적용된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간 비핵 국가들은 1968년 UN안보리 결의안으로 채택된 ‘적극적 안전보장(Positive Security Assurance)’, 즉 ‘비핵국이 핵무기 보유국으로부터 핵 공격을 받게 되면 UN이 개입해서 보호하겠다’는 구두 약속은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줄기차게 개별적 안전보장을 요구해 왔던 차였다.
그래서 1978년 UN군축 특별총회에서 NSA로 개념화된 것이 ‘핵 비보유국에 대한 핵무기 불사용 보장’선언이다. 그럼에도 비핵국들은 여전히 NSA도 선언에 불과하므로 국제협약 형태로 NSA에 구속력을 부여할 것을 요구해 왔는데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해체 과정은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 첫 사례이다.
그렇다면 왜 우크라이나는 순순히 비확산의 길에 들어섰을까? 1986년 일어난 체르노빌 원전사건이 계기가 됐었으리라 본다. 당시 사고로 피폭된 인구만 20만 명, 사망자는 2만 5천 명에 이른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8%가 방사능에 오염됐다고 분석됐다. 우리로 치면 한반도 영토의 25%, 남한의 절반 정도가 핵 오염됐다는 의미다.
그때 미봉책으로 시행한 것이 사고원전의 원자로를 6층 건물에 해당하는 콘크리트로 그냥 봉쇄해버리는 것이었는데 아직까지도 원자로를 덮은 콘크리트의 표면 온도가 상승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결국 1996년 우크라이나는 비핵 국가로 공인을 받고 그 대가로 4억 6천만 달러의 경제적 지원을 얻는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오늘날 우크라이나가 금년 한해 갚아야 할 부채는 135억 달러나 된다.
셋째,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전략적 가치이다. 2013년 11월 푸틴은 EU와 NATO로 기울던 우크라이나에 150억 달러 상당의 원조계획이라는 결정적 한방을 던진다. 강한 친러성향 대통령이던 야누코비치는 기다렸다는 듯 진행 중이던 EU와의 협상을 거부했다. 우크라이나에 잠재돼 있던 친러시아계와 비러시아계의 이질감이 시위와 탄핵으로 표면화되는 순간이었다.
최근 EU도 부랴부랴 110억 유로(약 16조 5천억 원)의 지원의사를 밝히고 미국은 당장 10억 달러 규모의 긴급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우크라이나가 다시 하나로 봉합되기란 요원해 보인다.
지난 20년간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 운영됐던 KEDO(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의 총 사업비가 46억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러시아가 약속한 150억 달러는 이의 약 3.5배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최근 4개월간 중국이 우크라이나에 차관이나 투자의 형태로 투입한 자금도 80억 달러나 된다. 우크라이나가 유럽과 아시아의 길목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이 실은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제적 지표이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 은행단이 보유하고 있는 해외채권이 1340억 달러 수준인데 절반이 우크라이나에 물려 있다는 점이다. 서구 전문가들이 분석하길 푸틴이 크림반도를 포기하지는 않아도 사태가 전쟁으로까지는 악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주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어쩌면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국민들이 알아서 러시아편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에 미국의 대화제의에 순순히 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러시아로서는 양날의 칼을 쥐고 있는 셈이다. 사태가 악화되면 우크라이나에 물린 러시아 은행단의 부실화는 뻔히 예측되는 일이지만, 국제 가격이 오르고 있는 천연가스와 석유의 달러 결재를 루블화로 환전할 때 얻는 재정이익은 러시아 경제를 강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현재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나 미국 등 서방 국가들에게 몸값 비싼 서유럽 역사의 유산인 셈이다. 정치군사적으로 일사불란한, 사실상 1인 통치 러시아의 발 빠른 결단을 이해 당사자가 복잡한 민주적인 체제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현대 국제관계의 역사가 보여주듯 힘 빠지는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도 결국 러시아에 판정패 하지 않을까?
지원규모로 봐도 핵무기 해체 만으로 우크라이나가 받은 경제지원 규모는 주변국과 복잡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상태에서 얻을 수 있었던 금액의 일부에 해당했다. 북한은 이 점만 보더라도 핵 무기 해체만으로 얻을 수 있는 반대급부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을 할 법하다. 오히려 경제적 이해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 그들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 헌금액을 높일만한 무언가의 개발이 시급할 터인데 폐쇄적인 체제로선 한계가 클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가 차지하고 있는 군사전략적 중요성, 러시아 천연가스관의 출구역할을 한다는 지리적 가치가 동북아 구도 속에서 북한에게는 제한적이다. 미개발된 북한의 천연자원을 해외자본이 개발할 기회를 주어서 정치적 지렛대로 활용하고 싶은데 이마저 높은 정치적 위험으로 쉽지 않다. 중국형 특구 개발형태는 이미 실패로 끝났다.
더욱이 동북아에는 단 세 개의 강대국들만 자리하고 있어 유럽처럼 여러 국가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용이한 구조도 아니다. 결국 북한은 내부단속을 공고히 하면서 핵 가치를 더 높여 놓는 일이 판돈을 키우는 뚜렷한 길이라고 믿지 않을까?
북한으로서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북아에서는 상대적으로 입지가 작았던 러시아의 위력(?)을 새삼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스런 점을 들자면, 한반도에는 태생적으로 친중이든 친러든, 인종적 언어적으로 이질감 있는 인구가 없다는 점이다. 한민족은 중국인, 러시안과는 문화정서적으로 일치된 공감대를 이루기 어렵다는 고유의 존재감을 갖고 있다.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이라는 부동항을 확보하고 있는 러시아가 동북아에서는 일본과만 영토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그것 말고는 달리 푸틴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반영할 이슈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제정치의 실질 변수가 안보 이슈 보다 경제적 이유가 정책 결정의 가장 큰 동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다른 실례이다.
북한의 딜레마는 고립·폐쇄 체제를 어설프게 여는 순간, 정치적으로는 한번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겠다. 경제는 자본적으로, 정치는 집단지도 체제로 분리시켜 성공한 중국을 따라 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러나 저러나 북한의 핵 집착은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