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이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되던 해에 저는 중학생이었습니다. 부모형제들은 다 남한으로 내려가고 언니만 결혼해서 자강도 산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언니도 살림 형편이 좋지 못해서 나를 도와 줄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신의주 방직공장의 직조공으로 일했습니다. 학비를 벌어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복을 입은 채로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저는 너무나 키가 작아서 바닥에 큰 널판자를 놓고 그 위에서 천을 짰던 기억이 납니다.
주경야독,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는 신의주에 있는 야간 학교에 입학을 해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몸이 너무도 지쳐서 건성늑막염에 걸려 공장에서 노동력 상실자로 판정받게 되었습니다. 보름 동안은 공장 병원에서 치료해 주었는데 그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더 이상 일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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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수희 1931년 자강도 출생 1996년 탈북 현재 중국 長春에 거주 |
저는 공장 부지배인을 찾아가 내 가정실정을 다 말하고 공부가 더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공장부지배인은 옷과 이불, 기숙사비는 보내 줄 터이니 학비, 학용품 값은 자체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는 근근이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고,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사범과가 생겨서 그 반을 졸업하여 교원자격증을 땄습니다.
기숙사비와 교복은 공장에서 부담해 주었지만 학용품과 학비는 자체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에는 우리학교 근방에 있는 개인직물공장에 나가서 돈 벌이를 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학교에서 키우는 돼지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는 일도 했습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범과 교원자격증을 받아 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학급을 많이 맡으면 그만큼 보수가 높았습니다. 오전은 유치원, 오후에는 소학교 2학년, 밤에는 한글학교에서 문맹자들에 한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월급날에 내 봉투는 항상 두툼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차츰 내 생활의 기초도 마련되었습니다. 지금 한평생을 되돌아보면 그때 처음 교원생활을 시작했던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강도 산골 교원으로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언니가 살던 산골 동네의 교장선생님이 학교로 찾아와 “우리 학교로 발령이 났으니 나를 따라가자”며 날벼락 같은 말을 던졌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산골에 살고 있던 언니가 “다 큰 처녀가 객지에 나가서 부모도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다”며 자기네 동네 교장 선생님에게 저를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교원이 부족했던 산골 학교 교장선생님은 얼씨구나 하고 손을 써서 제 발령장을 이미 다 만들어 왔습니다.
저는 정말 언니가 괘씸했습니다. ‘이제 내가 교원 월급이라도 받게 되니 나를 찾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창시절 언니를 찾아갔을 때는 학비를 도와줄 형편이 안 된다고 야박하게 거절해서 울면서 되돌아 왔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신발이 닳아질까봐 벗어서 손에 들고 신의주 방직공장으로 찾아가 일을 시켜달라고 애원했던 일, 엄동설한에 손등이 툭툭 터져서 피가 나는 손으로 돼지 죽 끓이던 생각들이 스쳐 지났습니다. 남한으로 갔다는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언니가 너무 미워서 선뜻 언니네 집으로 갈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찾아서 남한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렵게 얻은 교원자격증을 남한에서도 인정해줄지 걱정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나이 스무 살이 된 큰 처녀가 혼자 생활하는 것도 조심스러웠습니다.
골똘히 생각 끝에 할 수 없이 언니네 집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서둘러 학급 인계사업을 끝내고 아침 일찍 그 교장선생님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차도 없었습니다. 큰 고개를 두 개나 넘어 첩첩산중 길을 걸었습니다. 미운 언니 밑에서 눈치 밥을 먹어야 할 생각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언니집에서 거처하며 새 학교에서 교원생활을 계속하던 중 전쟁이 터졌습니다. 언니는 전쟁 난리통에 둘째 아이를 해산하다가 몸조리를 잘 못해서 ‘아메바적리’(원충증: 급성 고열, 복통, 설사, 호흡기 장애를 일으키는 병-편집자)라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산사람도 막 죽어 나가는 전쟁통에 그런 병을 고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언니의 생명을 구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형부도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던 때라 저 혼자 죽어가는 언니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언니
부모형제는 다 월남하고 이제 한 분 남은 언니마저 세상을 뜬다고 생각하자 나는 외롭고 서러웠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심청이 아버지처럼 조카를 안고 젖을 얻어 먹이고 나서 학교로 출근했습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살아날 희망이 없는 언니를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밤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목 놓아 울었습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설움에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런데 곁에 누가 와있다는 것도 모르고 한참을 울다 보니 어떤 낯선 인민군 군관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이 고개 넘어 부대에 있는 군관입니다. 동무가 하도 서럽게 울길래 무슨 사연인가 하고 동무의 울음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죽어가는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놨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군관은 자기를 따라 부대로 함께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를 따라 갔더니 중국지원군 연합부대에서 중국 의사에게 부탁해서 에메찡 주사 5대를 받아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제 알사탕이며 여러 간식까지 건네 줬습니다.
저는 사양할 염치도 모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생각도 못하고 주사약만 손에 쥔 채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 왔습니다. 언니의 모습은 참혹하였습니다. 우선 주사를 한 대 놔 주었습니다. 조금 후에 신음하던 언니는 약 기운에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물수건으로 언니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며 언니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언니는 세 시간 정도 편안한 얼굴로 깊게 잠을 자더니 이윽고 “물 좀 달라”하며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해서 언니는 생명의 위급한 순간을 벗어났습니다.
병에서 회복된 언니는 이 주사약에 대한 사연을 듣고 그 군관에게 너무나 고마워 했습니다. 하루는 그 군관이 언니의 병문안 겸 교장 사택으로 인사하러 왔습니다. 언니는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며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신발을 삼아 드려도 그 은혜는 갚을 수 없다며 고마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에메찡 주사 5대’ 때문에 제 일생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메찡 주사 준 군관과 결혼
언니는 완전히 이 군관에게 용해되었습니다. 이 군관은 차츰 우리 집 문턱을 드나들게 되었고 언니와 자기 가정문제까지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동부전선의 전쟁상황이 아주 치열했던 전시였습니다. 하루는 학교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일곱 살짜리 큰조카가 뛰어 나오며 “오늘 밤에 이모 잔치한다. 지금 엄마가 맛있는 것을 만들고 있어!”라며 제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집에 들어서 언니에게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니 오늘 밤에 그 군관과 간이 약혼식을 올리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니는 내 얼굴은 살피지도 않고 시간이 다 됐으니 얼른 세수를 해라, 자기 치마저고리를 꺼내 입으라며 부산을 떨었습니다. 언니의 속셈을 알아차린 저는 너무도 당황스럽고 너무도 서러웠습니다.
‘이제 전쟁에서 승리해서 통일되고 부모를 찾은 다음에 시집을 가도 될 것을, 무엇이 바빠서 이 난리통에 시집을 가라고 성화인가? 이제 나를 데리고 있기가 싫증이 난 것인가?’
저에게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통에 소련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저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며 약혼식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언니의 태도는 확고했습니다. 언니는 “너같이 성분 나쁜 사람을 6년이나 기다려 줄 것 같은가? 어떤 남자가 외국 유학생이 되어 돌아와서 나이 삼십이 다 된 늙은 처녀랑 결혼하겠는가? 그래도 저 군관은 너의 출신성분은 시비삼지 않는다!”며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습니다.
96년 언니도 굶어죽고…
꼼꼼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언니의 말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이 전쟁 통에 행복하면 또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내 무슨 낯으로 좋은 혼처를 바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습니다.
이 군관은 전에 결혼을 한 적도 있었고, 연령도 많고, 볼품은 없었으나 마음만은 진실했습니다. 나같은 성분 나쁜 월남자의 딸을 결혼 대상으로 삼아 준 것이 고맙긴 고마웠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 군관과 약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2달만에 결혼식은 생략한 채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전시여서 임시로 남의 집의 방 한 칸을 빌려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부대는 퍽이나 먼 곳에 있었으나 매주 토요일 오후에 집에 와서 일요일 밤에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있으니 마음에 의지가 되었고 정도 들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삼 년간의 가열찬 전쟁은 휴전이 되었습니다. 남녀노소가 길가에 차고 넘쳤습니다. 울고 웃으며 모두들 깃발을 들고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삼 년간의 고통 속에서 생명만은 건졌으니, 죽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서도 좋아라 춤을 췄습니다. 그러나 가족들과 헤어지거나 전선에서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은 대성통곡이었습니다.
‘제 손으로 제 눈깔 찌른다’는 말처럼 김일성씨가 제 나라와 조선민족 앞에 빚어 놓은 비극이었습니다. 조선전쟁은 아무런 전과도 없었습니다. 다만 아까운 젊은 청년들과 조선인민들만 피 흘리게 하고 알거지로 만들었습니다.
휴전이 되고나니 군대들은 군복을 입은 채 전후 복구 건설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때 우리 남편도 ‘동평양건설여단’으로 부대를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남편을 따라 평양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남편은 전시에 폭격을 맞아 척추에 파편이 박힌 것 때문에 척추 결핵이 생겨 팔 년 동안을 병원 생활을 하다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세대주’가 되어 기업소 유치원에서 일하며 아들을 키우고 살게 된 것입니다.
한평생 자강도 산골에서 살던 우리 언니는 96년 여름에 죽었습니다. 95년부터 시작된 굶주림의 시절에 언니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해 죽어갔습니다. 처녀시절에는 에메찡 주사 5대로 언니를 살려 낼 수 있었지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던 시절에 언니를 도와 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평생 미웠던 언니지만 평생 불쌍하게만 살다 갔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의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