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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론자들은 흔히’사상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를 채택하고 있는 이상에는 조선노동당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상’에 대해서도 ‘자유’를 허용해야 앞뒤가 맞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유일사상체제에 대해서는 “북한은 원래 그런 체제이니까 우리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인 셈이다.
한마디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를 하기로 한 체제이니까 김정일 하수인들의 반(反) 대한민국 활동까지도 허용해야 하지만, 김정일 수령독재는 처음부터 수령독재를 하기로 한 체제이니까 반(反)김정일 활동은 고사하고 일체의 다른 목소리를 압살한다 해도 그것은 시비할 바가 아니라는 소리다.
‘사상의 자유’ 2중 잣대는 궤변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기 양심에 따라 폐지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고, 폐지해선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그것을 개정하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만은 완벽해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
이런 요청에 비추어 본다면 일부 폐지론자들의 그런 2중 잣대는 참으로 웃기는 소리다. 자유체제는 체제파괴 활동까지도 당연히 허용해야 하되, 독재자가 반독재 언동을 억압하는 것은 그 역시 당연한 것으로 봐줘야 한다는, 이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은 차라리 한편의 저질 코미디로 쳐야 할 것이다.
일부의 이런 2중 잣대는 비단 국가보안법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나 탈북자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리고 우리의 대북지원에 대한 논란이나 김정일의 대남도발, 핵 개발, 마약밀수, 달러위조, 납북자 문제 등이 거론될 때마다 그들은 으례히 그런 2중 잣대를 내세우며 한사코 김정일의 악행을 감싸려 한다.
그러면서 말이 궁해지면 그들은 또 이런 논리 아닌 궤변을 늘어 놓는다. 북한은 약자이고 우리는 강자이니까 ‘맏형’처럼 이해해 주어야 한다. 같은 민족끼리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 자꾸 그렇게 따져서 전쟁하자는 것이냐. 그런 이야기는 수구냉전 반통일 세력이 꾸며낸 중상모략이다. 수구꼴통들 하고 같이 놀고 싶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운운…
모두가 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억지에 불과하다.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은 미국보다 약자지만 강자인 미국인들의 생명을 한꺼번에 수천 명씩이나 앗아갈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 김정일의 북한도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수백 수천 개의 장사포와 미사일과 생화학 무기로 우리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호언하고 있다.
약한 자가 동정이나 존중을 받으려면 착한 짓을 해야지, 약자라고 해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법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기들이 우리보다 산업, 군사면에서 훨씬 우세했던 6.25 때는 왜 ‘이해’ 아닌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 왔는가?
민주적 좌파집단은 이제 사라졌다
같은 민족이니까 김정일이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왜 우리만 일방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인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은 또한 이름 좋은 ‘한 울타리’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크메르의 폴포트 정권은 같은 민족을 300만 명이나 학살했다. 그때 학살당한 사람들에게 ‘같은 민족’이라는 말이 과연 무슨 서푼짜리 의미와 가치를 가질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들이 혁명을 할 때는 같은 민족을 향해 ‘무자비한 투쟁’을 자행하면서, 자기들이 필요할 때만 ‘같은 민족’을 들먹이니 이런 마구잡이 논법이 말이 되는가?
이제 수많은 탈북자들이 내려오고, 그곳 정치범 수용소의 생체실험 사실 등이 점차 알려지고 있는 요즘에 와서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위선 그 자체다. 어떻게 대학깨나 나왔다는 사람들이 그처럼 철면피일 수가 있다는 것인지, 도대체 멀쩡하던 사람도 그런 사상에 한번 물들면 저렇게 되는 것인가?
또 ‘북한의 암울한 현실’ 운운하는 것은 수구냉전 반통일 세력이 꾸며낸 거짓말이거나 과장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자기들이 적극 나서서 북한의 실상이 정말 어떤지 최대한 접근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칭 ‘진보’치고 진정한 ‘북한 바로 알기’를 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금성출판사가 발행한 현대사 교과서 같은 ‘북한 감싸기’와 ‘남한 깎아 내리기’나 있을 뿐…
결국 이런 2중 잣대와 억지, 궤변들은 한국 수구좌파의 논리적 파산과 도덕적 파산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밖엔 안 된다. 한국의 이념지형에서 이제 지성적인 민주적 좌파(democratic left)란 적어도 하나의 집단으로서는 사라지고 없다.
류근일 / 본지 고문 (前 조선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