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진보소통합’은 무엇인가?

1. 진보소통합은 ‘죽도 밥도’ 아닌가, 창조적 요리인가?


진보 3당의 합당은 너무 늦었다. 지방선거 전에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이루었다. 때를 놓쳤으니 축하의 말도 듣지 못한다. 우리라도 축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른바 ‘안철수 바람’에 밀려 국민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손호철 교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고 있다. …. 그들만의 리그로 끝났다.”고 악평하였다.(<<프레시안>> 2011.11.20)


“솔직히 얘기하면,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민주당과의 대통합이 낫다고 본다. 참여당과 통합을 할 수 있는데 민주당과는 안 된다고 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소통합을 할 바엔 차라리 민주당을 포함한 대통합으로 가야 한다. 민주당이 참여당보다 오히려 더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손호철 교수의 비판은 진보소통합이 죽도 밥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실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 탈당파들이 합당을 하면 규모는 작지만 질적으로는 이미 ‘노동당’이 아니고 ‘노동+자유당’이다. 이미 큰 경계선을 허물어버렸다고 할 수 있고, 형해화된 ‘진성당원제’ 외에는 민주당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소통합은 대통합으로 이어질 것이고, 대통합의 완성은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특히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자신들의 통합안이 부결되었음에도 승복하지 않고 진보신당을 탈당한 정치인들에게 비난이 쏟아진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지도자로서 말에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리 될 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였거나, 아니면 상황에 따라 말을 자꾸 바꾸었다. 결국 개념을 먼저 정리하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일관해왔기 때문이다.  


“이 통합이 총선 용이고, 그래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는 시각도 있다. 전략적 개념이 없고, 다만 전술적 계산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그 발걸음은 ‘노동당’의 길을 버리고 (영국식으로 말하면) ‘노동+자유당’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은 (미국식으로 말하면) ‘민주당’의 길이다.
  
국민참여당은 이미 상당수의 당원들이 민주당과의 대통합으로 기울었고, 유시민도 양다리 걸치기를 해온만큼 명분만 주어지면 다시 대통합을 시도할 것이다. 그래서 한번 구르기 시작한 돌은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굴러갈 것이다. 죽도 밥도 아닌 진보소통합은 오래갈 수 없다. 의미가 있다면, 슬프지만 ‘노동당’의 꿈을 포기한 데에 있다. 


2. 민주노동당은 과연 ‘노동당’이었던 적이 있는가?


관념 속 ‘노동당’은 많은 노동자들과 청년들이 순정을 바친 대상이다. 눈물어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당’은 죽고 새로이 ‘노동+자유당’이 탄생하였다. 이것은 이미 3년 전에 예견된 일, 아니 예정된 일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이 두 개로 깨어질 때 한국에서 노동당이 성장 발전하여 양당 체제의 한 축으로 올라설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가 되었다.


한국에서 영국 노동당과 같은 ‘노동당’이 등장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는 이미 일차로 2006년 일심회 사건으로, 이차로 민주노동당의 분당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마음 속에서 죽은지 이미 오래된 민주노동당이 이제 사라지고 있으니 그리 애석해 할 일도 아니다. 일심회 이후에 민주노동당은 주사파라는 한 종파의 당에 지나지 않았다.


윤효원은 민주노총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본다. 진작부터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을 멀리해왔다. 진보신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민주노총의 ‘노동당 만들기’의 실패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민주노동당에서 NL과 PD라는 먹물 활동가들의 영향력을 점차 줄여 나가 그것을 노동자의 정서가 지배하는 진짜 대중정당으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


2011년 9월 23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를 버릴 것인가?>에서 윤효원은 국민참여당과 합당을 추진하는 이정희 등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진작부터 민주노총과 거리두기를 하고 ‘우경화’해 온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싸잡아 비난하였다. 그러나 민주노총 자신의 무능과 무관심, 한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은 과연 명실상부한 노동당이었던가? 사실은 여태 한번도 노동당이었던 적이 없다. 운동권 당이었고, 먹물 활동가들의 당이었다. 거기에 순수한 노동자의 정서는 없었다. 쿨하게 인정하자. 한국 노동운동은 노동당을 만들고 키우고 나아가 자유당을 넘어서게 할 힘이 없다. 물질적인 힘보다는 정신적인 힘, 지적이고 도덕적인 힘이 없다.


민주노총은 이른바 NL파와 PD파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들의 다툼을 말리거나 제지하지 못했다. 한국 노동운동은 자기 월급 올리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지극히 좁은 시야를 가진 노동운동이었다. 사상이 없고 어떤 나라를 만들지 비전이 없는 노동운동이었다. 바로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발전이 2004년 총선, 바로 거기까지였던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3. 진보신당의 지난 3년 동안의 실패는 어디서 왔는가?


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찬탈한 ‘주사파, 종북주의자’들을 규탄하면서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도로 민주노동당으로 들어간다? 참으로 의아하다. 왜 진보신당 3년은 실패했는가? 이를 보고 우리는 흔히 왕자병(공주병)에 걸린 헛똑똑이들이 죽을 길로 가고,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 자기 살 길을 찾는 데는 더 영리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진보신당이 실패한 이유를 다른 말로 하면 전략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달리 말하면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려는 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진짜 노동당’을 하고자 했다면 상대를 ‘가짜 노동당’으로 몰아붙이면서 그와 생존경쟁을 치열하게 벌여야 했다. ‘사민당’이라 자칭하면서 민주노동당의 공산당 비슷한 모습과 차별화를 해야만 했다.


아니면 녹색당을 만들어서 블루오션으로 진출해야만 했다. 민주노동당과는 같은 영역에서 생존경쟁을 벌이지 않아야만 했다. 그런데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쫓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어정쩡한 자리에 서서, 이것 저것 모두 다 하려고 하니 국민들의 눈에는 어느 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잔류 진보신당이 혹시 진정으로 독자 생존의 길을 찾고자 한다면 ‘사민당’과 ‘녹색당’의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대중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당내 당’을 20년쯤 할 각오를 한다면 더 좋다. 통일과 헌법 개정과 연방제와 하나의 광역시도를 선거구로 하는 선거법 개정 등이 이루어지면 독립하라.


혹시 ‘당내 당’이라는 생존 방식이 싫다면 ‘녹색당’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진보신당의 잔류파가 이제 막 탄생하고 있는 녹색당의 손발이 되어주는 것, 그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한국에서도 녹색당이 나올 때가 되었고, 녹색당은 나름의 뚜렷한 이념과 깃발을 가지고 100년을 내다보고 나아가기 때문에 내년 총선의 결과 따위에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두베르제의 법칙’이 중력의 법칙처럼 작용하는 소선거구제 하에서 굳이 대중정당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대통합 야권 신당 내에서 ‘당내 당’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명한 생존 전략이 없이는 결국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하는 과제와 선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 두 과제 사이의 모순과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 한국에선 지금 어떤 정계개편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자본주의가 발전하였다. 그 결과 중산층이 붕괴하고 양극화, 청년실업과 노인빈곤 등이 급증하고 있다. 기적같은 성공의 결과가 세계 최고의 자살율이라니! 모두들 당황해하고 있다. 사회 문제의 해결이 정치의 과제가 되었고, 선진국형 정치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에 도달하였다. 이런 사정은 1930년대 미국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비슷한 정치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존의 지역정당들이 전국정당이 되고, 비로소 진보, 보수 양당체제로 재편될 것이다. 공화당보다 더 보수적이고 남부에서 사실상 일당 독재를 하던 미국 민주당이 뉴딜정책으로 전국정당, 진보정당이 되고 북부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게 된 것처럼 한국 민주당도 우여곡절을 거쳐 진보정당으로 거듭날 것이다.


“1932년, 이 나라는 공공정책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전환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기가 꺾인 채로 지리멸렬해 있던 민주당을 이용했다. 이는 민주당이 그 과제를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라서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그것이 이용 가능한 유일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1932년 선거는 한 정당의 패배 이상을 의미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전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1930년대의 민주당은 자신이 계획하지도, 만들어 내지도 않았던 혁명을 마지못해 실행하는 도구가 되었다. 정당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책무를 수행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당시의 민주당만큼 준비가 덜 된 정당도 없었을 것이다.”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 박수형 옮김, 149쪽)


“전체적으로 보아, 1930년대에 뉴딜 진보주의가 지향하고 있던 방향은 유럽의 중도 좌파 정권들이 시도하고 있던 것과 같은 복지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루스벨트의 민주당 행정부는 당시의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회민주당, 프랑스의 사회당처럼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이주영, <<미국의 좌파와 우파>>, 11쪽)


일찍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대전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보와 보수가 경쟁하면서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 20년 간 진보는 복지국가 건설, 보수는 통일에서 공을 세울 것이다. 현 야권은 진보정당으로 진화하여 서울, 부산 등 도시에서 우세하고 현 여권은 보수정당으로 진화하여 호남, 경북 등 농촌지역에서 우세한 정당체제가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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