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패착: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I. 북쪽의 풍경


북한이 언어로 구사할 수 있는 협박은 이미 최대치에 도달했다. 그러나 한국 국민의 무관심은 요지부동이다. 반응은 ‘겁이 난다’보다는 ‘짜증난다’가 훨씬 더 많다. ‘분분초초’ 다가오는 핵전쟁의 위협에 대해서는 어제 한 이야기인지 작년에 한 이야기인지 구별도 하지 않는다. 다만 ‘집과 직장에서 할 일과 걱정할 일이 태산 같은 데 왜 내가 이런 전쟁협박까지 당해야 하나’라는 것이 화가 날 뿐이다.


그러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나기는 김정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고 존엄의 야수적 협박’이 ‘미키 마우스 돼지의 서커스’로 비쳐지고 있다는 것처럼 체면 구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손광주 데일리NK 통일전략연구소 소장의 전언에 의하면, 어느 외국 특파원이 진심어린 표정으로 북한의 행태가 ‘만화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오늘이나 내일 미국에 핵공격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김정은의 정신(건강) 사태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제 김정은에게 남은 일은 개성공단이나 서해에서 살라미 전술을 사용하여 협박과 도발의 수위를 야금야금 올림으로써 한국 국민의 혈압상승을 뇌졸중의 공포로 연결시키든지, 아니면 한 판 확실하게 질러 우리 정부와 국민을 길들이고, 이후 ‘최고 존엄의 조폭적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니면 ‘최고 존엄의 혁혁한 무공’은 조선노동당의 전통 깊은 프로파간다 기구를 동원하여 북한 내부에서만 날조하고, 이쯤해서 발광을 누그려 뜨리는 길도 있기는 하다. 사실  망나니 같은 자식이라도 아주 미약하나마 반성의 기미를 보이면 부모는 잔치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유엔제재?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입에 달고 다니는 박근혜 정부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 무슨 관심이겠는가? 이미 ‘先제재 後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김정은이 ‘협박 끝, 신뢰 시작’의 길을 가지는 않을 것이다. 최고 존엄의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아 이것저것 돌다리도 두드리며 확인하고 일을 하는 유형이 아니다. 화폐개혁은 한국의 구멍가게 주인이라도 실패할 것을 예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질렀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은 한국 국민에게 깊은 분노를 안겨주었을 뿐 북한에게 가시적인 어떤 이익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혹시나 하고 질렀다. 6.28 경제개혁도 인프라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질렀다.


이런 점에서 파격적이었다는 올해 모란봉악단의 신년경축음악회는 작품비평 하듯 분석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등이 훤히 보이는 가수 한 명이 김정은 부부에게 꽃다발을 선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당과 함께 끝까지’는 거대한 실내 체육관에서 평양의 상류층 집단을 불러 놓고 자본주의 코드, 섹시 코드로 넘치는 ‘환상의 노래방’을 연출하였다. 심지어 전원 기립하여 경배해야 하는 ‘공화국 애국가’마저 전자기타, 전자바이올린, 전자첼로, 전자피아노로 지지고 볶고 드럼으로 두들기며 자본주의 POP-Music화 하였다.


이어지는 노래들 모두가 한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노래방 반주에 공화국 스타일의 노래가 겹치고 있다. 그것은 미니 스카트, S-라인이 그대로 들어나는 반짝이 드레스, 목걸이, 귀걸이, 팔찌, 쇼트컷, 남성컷 등 섹시 모드로 감싼 미녀 악단이 혁명의 위대함을, 따라서 혁명의 강박을,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혁명의 실패를 카바레 음악으로 포장하면서 청중들의 실제 관심을 혁명이 아니라 바로 이 화려하고 에로틱한 감각에 집중시키고 있다.


장군님과 에로틱이 융복합된 이 음악회는 일제하인 1920년대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절망과 에로틱이 뒤섞인 시 ‘나의 침실로’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북한식 유미주의(唯美主義), 북한식 탐미주의(眈美主義)인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음악회에서 특유의 북한식 서정, 북한식 에로틱에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실 바로 이 무대가 바로 평양이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환상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징적인 것은 무대 아래서 춤을 추는 평양 남녀의 모습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열린 음악회’와 구별이 안 되는 ‘열린 기쁨조’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무대 아래에서는 저고리 입은 여자들이 전통적인지 공화국적인지 혹은 자본주의 지향적인지 구별이 안 되는 어정쩡한 춤을 추고 있었다. 평양의 엘리트들도 따라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또 이번 신년음악회 연출에 깊이 개입했다는 미스에스 리가 미국의 사죄사신 로드맨을 만나 ‘자신이 낳은 예쁜 딸’ 이야기만 하였다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던 마리 앙트와네트를 연상시킨다.


김정은의 행태에는 공통점이 있다. 급하게 서두르고 무조건 지른다는 점, 주관적 희망과 현실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위의 ‘당과 함께 끝까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노래는 은하 3호 발사성공을 배경으로 부르는 ‘단숨에’라는 곡이었다. 가사라고는 오직 ‘단숨에’라는 부사 하나 뿐이다.


김정은은 평양의 놀이동산 건축, 몇몇 호화 아파트 건축, 특권층 백화점의 풍성한 물품, 화끈한 신년 음악회 등 자신이 평양에서 연출할 수 있는 화려한 무대를 현실로 착각하거나 착각하고 싶을 것이다. 원래 김일성 가문의 DNA에 과대망상기가 있지만, 3대에 이르러 이 악성 유전자가 마구 발현이 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비록 후궁 빈(嬪)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원하는 것이 곧바로 현실이 되는 청소년기’를 보낸 왕자 김정은이 어떻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겠는가?


II. 남쪽의 풍경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만용을 부리기는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대북정책의 실패가 예외 없이 대통령과 그의 보좌진들이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주관적 희망에 빠진 것이 원인이었다는 점은 이미 밝힌 바 있다. 특히 햇볕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잘못은 북한정권의 도덕적 파탄, 북한인민과 절멸수용소의 현실을 보라는 우파의 충고와 비판을 대북강경주의자 내지는 전쟁광, 심지어 극우파의 이념편향적 주장이라고 호도하고 햇볕정책의 실패를 ‘나중에는…성공할 텐데’라는 변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일호(一毫)의 차이도 없이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이른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기원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2002년 5월 김정일을 방문하고 돌아와, 김정일이 자신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지켰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신뢰가 남북관계의 기반이어야 한다는 점을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7월에 출간한 그녀의 자서전 『시련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2002년 5월과 2007년 7월 사이에 한반도에서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대통령이 신뢰의 희망을 안고 북에서 돌아온지 불과 한 달 후에 제2차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2006년 북한은 제1차 핵실험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5년 사이에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처참한 상황이 부정할 수 없는 정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점에 대해서 그녀의 자서전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남북관계가 남북의 최고 당국자 간의 인간관계인 것처럼 보고 있는 듯하다. 바꿔 말해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정당화하였던 현실적 기반이란 김정일이 지켰다는 소소한 현안 4~5가지 밖에는 없다. 나머지는 그저 ‘인간이나 국가는 서로 신뢰해야만 한다’는 당위성과 출발한 주관적 희망에 불과하다.


여기에 남북관계가 오로지 화해와 상생협력 그리고 평화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낭만적 당위성에서 출발하여, 현실도 그럴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신뢰’에 박수를치며 현실을 호도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개성공단 국제화 계획이다.


여기서 북한이 남북 통신선을 끊겠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계획을 발표했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계획을 발상한 것 자체와 정부 내에서 이런 계획을 비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류길재 장관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한국업체에게 테러위험성이 높은 지역에 공장을 세우면 테러리스트도 주민 생계를 생각하여 테러를 중단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유치를 제안한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외국업체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개성공단이 매우 안전함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한국정부의 임무이지, 개성공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외국업체를 유치한다는 것은 외국업체에게 지뢰밭을 먼저 걸어가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외국업체가 중국의 회사라고 해도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한국 정부가 국가 안위의 문제를 외국의 사적 회사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망발이지만, 어떻게 이런 언어도단적 발상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개성공단의 유지가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최고의 가치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최고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무릅쓸 수 있으며, 또 이런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만용 뒤에는 ‘설마’라는 주관적 희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의 더 큰 위험성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자신의 ‘멋진 외교구상’을 중앙일보에 발표하면서 밝힌 ‘북핵 폐기 프로세스’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상호 선순환 구조에 있다. 필자는 이미 여러 번 중·단기 임무인 북핵폐기와 중·장기 임무인 신뢰확보가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류길재 장관이나 윤병세 장관도 이점을 분명히 알고, 류 장관은 북핵폐기를 후순위로 밀어 넣었고, 윤장관은 그것을 ‘프로세스’의 인플레를 통해서 호도하였다. 바로 며칠 전에 대통령이 ‘북핵을 이고 살 수는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프로세스란 여유가 매우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정책의 표현이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통해 핵탄두 소형화를 현실화하면 지금보다 훨씬 강한 압박과 도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윤장관은 중·장기 과제인 남북신뢰확보에 북핵폐기 문제를 연결시켰다. 한 마디로 북핵폐기는 ‘나중에’라는 말로 미룬 것이고, 이 보다 더 못된 점은 남북신뢰에 요구되는 막대한 경제지원을 북핵폐기를 이유로 합리화 시키려는 윤장관의 꼼수에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막대한 지원을 신뢰라는 이름에서 제공하겠지만 결코 북핵을 폐기시키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근혜 정부 하에서 햇볕정책의 완전한 귀한이라는 참담한 현실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대북정책이 유화정책이 아니며, 북한의 도발에 강력 응징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안보는 결코 김관진 국방부 장관 혼자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애를 써도 조정 내의 간신들과 정책 혼선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기억을 하지 못하는가?


국민이 선택한 박근혜 정부를 정권 초기부터 무조건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신의 대북정책에 대하여 다시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신뢰회복’이란 적대적 위기의 순간에 위기극복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행태는 일반적으로 공포를 피하기 위한 ‘타협’이나 ‘투항’이라고 부른다. 신뢰관계의 형성에는 반드시 전조(前兆)가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하려 할 때 상대는 그것을 약점으로 파악하여 위기를 증폭시킨다. 동기는 전혀 다르지만, 남북의 당국자들이 모두 현실을 보지 않고 주관적 희망에 사로 잡혀 있다는 점에서 현재 한반도의 위험 요소는 김정은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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