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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가장 원대하고도 중요한 목표는 한반도 전역에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김정일은 ‘강성대국(强盛大國)’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강성대국론은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서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취임한 이후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대외용 구호이자 경제위기에 헤매고 있는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대내용 구호의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이후 사상, 군대, 경제부문을 핵심대상으로 선정하여 1990년대 초반에는 ‘사회주의 3대진지론’을, 1998년에는 ‘강성대국 3대 기둥론’을 제시하였다.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면, 강성대국건설과정에서 사상강국과 군대강국은 이미 달성되었으나 ‘경제강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북한은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북한이 이미 정치·사회적 안정과 군사적 안정은 유지되고 있으나 경제적 불안정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한 것이며, 앞으로 경제강국 건설에 더욱 매달릴 것이라는 전망을 시사하고 있다.
현실과 괴리를 보인 경제개선조치
그러나 이러한 경제강국 건설은 사회주의계획경제체제라는 토대를 절대 흔들지 않는다는 모순된 원칙과 상충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김정일식 경제정책의 가장 큰 한계이다.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북한 또한 개혁 개방의 길로 갈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언들이 쏟아져 나올때 김정일은 신사고, 실리주의, 과학중시사상이라는 표현들을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우선 신사고 – 남한의 학자들이 붙인 용어이지만 – 는 2001년 신년공동사설에서 ‘근본적 전환’, ‘새로운 관점’ 등 변화지향적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외생적 변화(exogenous acculturation)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 왔던 북한이 변화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신사고는 정치·사상 우선의 원칙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도덕적 자극’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북한 내부 경제사정을 살펴보면 한계가 역력히 느껴진다.
김정일은 1998년 이후 북한경제 전반에 실리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법·제도를 정비하고 공업조직의 개건에 힘을 쏟았다. 1998년 헌법개정을 통해 시장경제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했고, 경제관리 운용에서 합리성을 강조했다.
또한 북한공업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연합기업소가 관료조직화, 기업소간 내부거래를 통한 비효율성, 기관본위주의의 심화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자 공업조직의 재구축과 공장·기업소의 기술개건을 추진하여 공업조직의 합리적 개선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말뿐이었다. 법과 제도, 조직은 정비하였을지 모르지만 역시 북한 내부를 들여다보면 의미 있는 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주의경제의 비효율적 특성을 본질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한 기술개건과 조직개편은 외피만 바꿔 씌운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과학중시사상이다. 북한은 김일성 생전에도 과학기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최근 과학중시사상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특히 금세기 초반 두 차례에 걸친 김정일의 중국방문으로 북한은 단번도약(leap-frog development)의 과학중시사상을 천명하였다. 북한의 단번도약의 발전전략은 농업화 → 산업화 → 정보화라는 산업발전단계에 따라 산업화에 주력할 경우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판단아래, 산업화를 생략하고 바로 정보화에 주력한다는 논리이다.
물론 정보화가 미래 사회의 경쟁력임에는 두말 할 것도 없지만 북한처럼 기본적인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고 심각한 경제난으로부터 회복되지 않은 형편에서 정보화를 앞세우는 것은,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것보다 무모한 일이다. 더구나 정보화의 관건은 첨단장비를 반입하는 것인데 미국의 경제제재가 계속되는 한 이것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북한 경제의 가시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2002년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가 있었다. 가격체계의 개혁, 분배제도의 개선과 기업경영관리개선을 통해 대량생산·확대공급을 달성하고자 하는 구도로 이해된다. 그즈음, 대외적으로는 경제특구를 설치하여 외국자본과 기술을 유치함으로써 생산효율성의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도 잇따라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신의주, 개성, 금강산지역을 경제특구로 추가 지정하였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일련의 정책들은 ‘공급확대’를 통해 주민의 생활향상을 도모하려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체제유지와 공급확대는 양립할 수 없는 목표
경제활성화를 위해 공급을 확대하는 것은 일단 경제학에 있어서는 기본에 해당하는 일로, 적절한 방향이다. 그러나 전개된 현실은 어떠한가. ‘7·1조치’는 일단 혁신적 내용으로 인해 눈길을 끌었지만 끝내 국가의 중앙집권적 지도를 포기하지 않아 주민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키고 ‘안하느니만 못한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제특구’ 역시 다를 게 없다. 신의주지역은 중국과의 마찰로 특구로서의 역할은 끝난 상태이며, 그나마 ‘민족공조’라는 미명하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개성공단이 얼마전에 화려한 데뷔를 하기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볼때 남한기업만으로는 성공적으로 운영되기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대북경제제재가 정치적으로 타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경제적 이익보다는 체제안정을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갈수록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를 설득하려면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하여야 하지만 북한의 정치적 현실을 감안하면 그러한 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
김정일이 이미 알고 있는 바대로 경제강국이 되려면 우선 공급이 확대되어야 한다. 공급이 확대되려면 내부 경제의 자율성을 높이고 외자를 끌어들여야 한다. 내부경제의 자율성을 높이려면 주민들에게 그동안 빼앗았던 자유와 권리를 상당부분 돌려주어야 하고, 국제사회에서 그동안 잃었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만한 조치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체제의 안정이 위협받는다. ‘체제유지’라는 김정일의 욕심이 바뀌지 않는 한 북한의 변화는 요원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이 김정일식 경제정책이 갖는 가장 큰 한계이다.
조영기 / 통일미래연구소 운영위원장, 경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