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끝내 폐주 연산군의 길을 가려는가

선대 성종(成宗∙재위 1470~1494년)에 이어 열아홉의 나이로 조선조 10대 왕에 오른 연산군의 재위 기간은 11년 10개월(1494∼1506년)이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폭군(暴君) 연산군이 재임하던 기간에는 수많은 사대부의 희생이 동반된 사화(士禍)만 두 번(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 발생했다. 


그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쫓겨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정적에 대한 처형과 사자에 대한 부관참시, 남은 가족을 종으로 만들고 재산 몰수를 추진했다. 적몰(籍沒)이라 불렀던 재산 탈취는 해당 집안의 재기 능력을 완전히 말살하는 조치였다. 어머니 폐비(廢妃) 윤 씨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까지 처형을 멈추지 않던 연산군은 결국 이 만행의 부메랑을 맞고 서른하나에 폐주(廢主)가 됐다.


이덕일의 ‘조선왕조 독살 사건’에 나오는 대목이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中宗∙재위 1506∼1544년)이 왕이 되자 반정(反正) 공신들은 명나라에 새로운 왕의 계승을 알리기 위해 국서를 보내면서 정당성 확보 목적으로 폐세자를 비롯해 네 명의 왕자를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요구했던 신하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산군의 가신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영의정 유순(柳洵)과 좌의정 김수동(金壽童)은 연산군이 쫓겨나던 시절까지 영의정과 좌의정을 했던 인물이고, 유자광과 구수영(具壽永)도 충성파로 분류되던 인물들이다. 특히 구수영은 연산군과 사위관계로 팔도 미녀를 그에게 받쳐 총애를 받았다.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도 연산군이 사대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무과 출신을 인사권이 있는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삼는 등 고위직 특은(特恩)을 베푼 인물이다.


연산군은 1506년 9월 2일 반정 당일 진압을 위해 활을 가져오라고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그의 명을 따른 자가 없었다. 어제까지 충성을 다짐하던 당대 사대부가 모두 그에게서 돌아서자 막상 반군이 포위망을 좁혀와도 곁에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연산군이 폐주로 전락한 배경에는 그의 포악한 행동뿐만 아니라 유교 이념과 왕-사대부 공동정권이라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왕권을 추진한 점이 있다.


자신들을 공동 통치세력으로 인식하는 사대부들을 왕권 강화를 통해 짓누르려고 했던 시도가 결국 통치자의 고립을 불러왔다. 여기에 적몰 재산을 사취하면서 탐욕스러운 면까지 적나라하게 노출했다. 또한 계속되는 인명 살상은 무고한 사대부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키웠고, 정작 측근세력은 과신했던 탓이 컸다.


최근 김정은의 행보를 불안하게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그는 권력 승계 1년 만에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인적 교체를 단행했다. 북한처럼 지휘계통보다 인맥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는 그 파장은 일파만파가 된다. 여기에 당 출신 인사인 최룡해를 군 최고 핵심요직인 총정치국장에 임명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군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사건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식량난 이후 군부대 물자 보급 재원이자 군 장성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외화벌이 사업의 상당 부분을 내각으로 이전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정도면 아버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선군(先軍)정치는 말뿐이다. 김정일이 군부 장악을 위해 강온 양면 전략을 써온 데는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하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막는 일종의 공동운명체 전략이었지만, 김정은은 그런 신중함이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은 북한에서 그동안 낯설었던 공동정권이다. 주위에 있는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지금은 그가 영원한 주군(主君)인 듯 행동하지만 기울어 가는 국운을 보며 훗날을 기약하고 있을 것이다. 장성택은 김정일 시대에도 하지 않았던 수첩 비서 역할을 하며 바짝 엎드려 있지만 처세의 달인이자 야심가라는 평판이 정확하다면 자신의 측근들과 상황 변화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의 최근 행동은 뭔가에 쫓겨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데, 이를 인적 교체나 힘의 과시를 통해 돌파하게 되면 그 부작용도 적지 않기 마련이다. 권력은 부리는 재미가 있겠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다. 50년 수령체제의 뿌리가 굵고 깊이 박혀있는 만큼 그 체제에 적응한 당과 군 관료들의 이해타산도 수만 갈래로 서로 얽혀있다. 연산군이 학질에 걸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를 지켰던 군관이나 병사 누구도 그와 같은 병에 걸리지 않았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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