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초대보위부장 김병하는 왜 자살했나?

▲ 김정일의 밀착호위를 맡은 경호원

남한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북한의 정보기관은 ‘국가안전보위부’다. 이를 줄여서 국가보위부, 또는 보위부로 불린다.

국가보위부는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조직이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 오로지 세습독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수령 일인독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러나 ‘애국자’로, ‘충신’으로 칭찬받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중 북한의 최초 보위부장(당시는 ‘국가정치보위부장’)을 지낸 김병하도 있다. 그는 자살했다.

84년 2월에 있었던 ‘김병하 사건’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공포의 대명사로 불린 ‘정치보위부’의 위상이 한층 아래로 떨어진 김병하 사건에 대해 북한주민들도 정확한 내용을 잘 모른다.

1960년대 후반까지 김일성은 남로당파, 소련파, 연안파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마지막 반대파인 ‘갑산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면서 1인체제의 독재기반을 완전히 구축했다.

1967년 당중앙위 조직비서(당 2인자) 박금철, 선전비서 이효순을 비롯한 갑산파와 前 여맹위원장 박정애(초대 북조선 공산당 당수 김용범의 처), 1968년 숙청된 민족보위상 김창봉, 인민군 총정치국장 허봉학은 대부분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김일성은 “종파 놈들 때문에 내 머리가 세졌다”며 “종파를 뿌리뽑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를 위해 주민들 속에서 종파가 생겨날 수 있는 온상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시했다.

전형적인 정보맨 김병하

김일성은 72년 헌법개정을 통해 수상제를 주석제로 변경했고, 김정일은 74년 2월 당 선전일꾼들 앞에서 ’10대원칙’을 당 강령으로 채택했다. 김일성을 절대화하는 수령독재체제로 가기 위한 수순이었다. 10대원칙을 세우기 위해서는 수령절대화를 수행할 기구가 필요했다.

김정일은 주민들 사이의 정보사찰기구를 필수로 생각하고, 사회안전부(경찰)로부터 독립적으로 정보사업을 할 수 있는 부서를 만들 것을 계획했다.

1973년 2월15일 사회안전부에서 정치보위부를 독립시키고, 당시 사회안전부장이던 김병하를 초대 국가정치보위부장으로 임명했다.

갓 탄생한 정치보위부의 구호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였다. 이 구호는 1992년 11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를 위하여 한 목숨 바쳐 싸우자”로 바뀔 때까지 정치보위기관의 공식구호로 등장했다.

김병하는 계급적 원칙이 강하고 뛰어난 경호감각, 순발력을 지닌 전형적인 북한형 ‘정보맨’이었다. 그는 보위부 일꾼들을 소련에 파견해 국가안전위원회(체까)의 정보활동 방식과 테러방지를 심층적으로 연구해 북한에 보급한 전문가였다.

자카르타 폭탄테러에 김일성 보호

김병하가 초대 보위부장의 직위를 따낸 데는 그럴 만한 스토리가 있다. 1965년 김일성을 보좌해 23세의 김정일이 인도네시아를 공식 방문했을 때 인민군 호위국 부국장이었던 김병하는 두 사람의 호위를 맡았다.

김병하는 테러에 대비해 김일성의 위치와 좌석, 실내 도청장치 유무상태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한 호위사업계획을 김정일에게 보고, 비준(결재)받았다.

남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김일성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때 폭탄테러가 있었다. 자카르타 대통령 궁전을 방문하는 시간에 궁전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 테러가 수카르노 정권을 노린 것인지, 김일성을 노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때 김병하는 궁전으로 들어가기 전 김일성보다 인도네시아 내무상을 먼저 지나가도록 했는데,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 일로 김병하는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확실히 눈도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호위국 부국장의 직책에서 단숨에 사회안전부장으로, 초대 정치보위부장으로 승승장구 했다.

10대 원칙 집행한 보위부

권력을 잡은 김병하는 정치보위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김일성의 반대파들과 출신성분이 나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북한의 계급성분을 핵심군중과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규정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정치보위부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원칙’에 위배되는 현상은 무조건 적발했다. 어쩌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또 <노동신문>으로 담배를 말아 피웠다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고갔다.

필자가 북한에 있을 때 김병하와 당 세포위원회에서 근무한 바 있는 정주시 보위부부장 정명학(사망)은 “지금 우리제도가 조용한 것은 그때 반대파들을 거의 숙청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치보위부는 주민들 속에서 악의 대명사로 각인된 반면, 당일꾼들 속에서 “보위부가 너무 권한행사를 한다”는 반발을 낳았다.

1980년대 초 김일성이 남흥화학연합기업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공장 보위부는 어느 공로가 있는 기술자의 계급성분이 나쁘다며 그를 김일성의 접견명단에서 제외시켰다. 보위부의 권한행사에 불만을 갖고 있던 공장당 책임비서는 “보위원들이 당의 군중노선을 방해한다”고 김정일에게 제기했다.

보위부가 당의 지시를 거부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중앙당 8과(보위부 담당) 부부장을 책임자로 하여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특별 그루빠(그룹)를 파견해 정치보위부에 대한 집중적인 검열을 진행하게 했다.

중앙당 검열 거부하고 자살

중앙당 지도그루빠는 “10대원칙 재토의, 재검토”를 정치보위부에 강하게 내밀었다. ’10대원칙 재토의, 재검토 사업’이란 정치보위부가 군중을 대상으로 10대원칙을 따지던 것을 중앙당이 정치보위부를 대상으로 10대원칙을 검열하는 것을 말한다. 처지가 거꾸로 뒤바뀐 셈이었다.

중앙당 검열 그루빠가 닥치면 북한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사돈의 팔촌까지 샅샅이 뒤지는 것이 중앙당 검열이다. 당중앙의 명령이 떨어지면 무엇이든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앙당 그루빠가 들이닥치자 김병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당의 검열을 거부했다.

김병하의 반응이 보고되자 김정일은 그를 그대로 두면 당을 우습게 볼 것이라고 계산하고 비밀리에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중앙당 검열이 김병하의 여자관계까지 파고 들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그는 84년 2월 사무실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자살의 길을 택했다.

국가안전보위부 연혁
1945. 11. 19
보위기관 창립절, (김일성 남포시 보안간부훈련소 현지지도)
1949. 6
내무성 정치보위국
1951. 3
사회안전국 창설, (내무성과 별개)
1972. 12
사회안전부 정치보위국
1973. 2. 15
김일성 사회안전부에서 정치보위부로 독립 지시
1973. 3
국가정치보위부 독립(초대 정치보위부장: 김병하)
1982. 4
정치보위부를 국가보위부로 개칭(국가보위부장: 이진수)
1992. 11.12
국가안전보위부로 개칭(제 1부부장: 김영룡)

백명규/ 前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근무(2004년 입국, 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