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8일] 김정일 사망 2주기를 맞아

▶전날 북한 주민들이 청취한 대북 라디오 방송 중 주요 내용을 소개 합니다.


<자유조선방송/12월 17일>


특집방송-김정일 사망 2주기 특집


세계 최고의 독재자였던 김정일이 죽은지 2년이 지났습니다. 김정일의 통치 아래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고, 그의 폭정 아래서 많은 북한 주민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유훈통치라는 명분 아래 권력을 세습하면서 김정일식 독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유조선방송은 김정일 사망 2주기를 맞아, 특집 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이 방송을 통해 김정일의 죄악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십니까 진행을 맡은 김민수입니다. 오늘은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의 민심을 함경남도 농장원의 증언을 통해 들어보고, 전문가들이 분석한 김정일에 대한 평가, 끝으로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 조준현 기자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럼 먼저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 주민들의 민심, 박지민 기자가 함경남도 농장원 정수철 씨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했습니다.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 내부 민심>


김정일이 사망한 것은 지난 2011년 12월 17일, 하지만 북한 당국은 이틀이 지난 후에야 김정일의 사망 사실을 알렸습니다.


인서트1(리춘희):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 100,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 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알린다. 주체 혁명 위업의 계승 완성을 위해서 한평생을 바쳐오셨으며 사회주의 조국의 강성번영과….


당시 외부세계에서는 북한 당국이 19일 낮 12시에 중대발표를 한다고 예고해 관심이 집중돼 있었습니다. 조선중앙텔레비전에서 김정일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크게 술렁였는데요, 정작 북한 주민들은 이 소식을 뒤늦게 들었습니다. 정수철 씨의 증언입니다.


인서트2(정수철): 12시에 발표는 했는데 일반 주민들이 안 것은 10%나 알았을까? 12시 방송까지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고 공장, 기업소에 출근했던 사람들이 집에 와서 식구들한테 알려줘서야 알았다. 혹시 그리고 동사무소나, 가까운 보안기관 사람들이 서로 연락해서 알았다.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야 알았던 것은 전기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그동안 보내주지 않던 전기를 김정일 사망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잠시 공급했는데, 정작 주민들은 이 특별방송을 보지 않고 한국 영화와 연속극을 봤다고 합니다.


인서트3(정수철): 12월 19일 점심에 전기가 잘 오지 않다가 갑자기 전기가 오니 주민세대들은 무슨 일인가 했고, 그러나 다들 중앙텔레비(방송)는 보지 않고 집에 있던 CD나 DVD 록화기를 보았고 그래서 그 소식을 몰랐는데 공장이나 기업소 사람들은 직장에서 먼저 알게 됐고 오후 2시나 3시에 집에 와서 식구들한테 물어보니 다들 그 소식은 보지 않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서 몰랐다.


김정일은 살아 생전 자신의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인민들에게 필요한 전력 같은 사회 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김정일이 파괴하고 방치한 전력 사정 때문에 상당수의 주민들은 김정일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인서트4(정수철): 3시부터 정리사업이 시작됐다. 김정일이 죽었다는 소식이 나왔기 때문에 도로통행을 차단하고 음식가게들 문 닫고 유아판, 영생탑 이런 것들에 대한 청소사업 진행했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이게 맞구나 (알았다). 그리고 5시 보도를 통해서 (김정일 사망) 소식을 처음 접했다.


김정일이 죽은 이후 북한 당국에서는 전 인민들이 애도하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통곡하며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목격됐습니다. 하지만 인민들의 겉과 속은 정반대였습니다.


인서트5(정수철): 그때 당시 사람들의 감정을 보면, 94년에 김일성이 죽었을때는 전 국민이 다 슬퍼했다. 그러나 그때 감정에 비하면 질적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할 때 김정일의 밑에서 사람들이 자기네 부모 형제, 처자가 굶어 죽는 것을 제 눈으로 보고 너무 못살고 힘들던 생각이 나니까, 또 김정일이 정치를 잘 못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김정일이 죽어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죽을 놈이니 죽었겠지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싸늘한 민심은 김정일에 대한 애도 기간이라면 당국에서 통제를 시작하자 더 악화됐다. 김정일은 살아 있을 때도 그랬지만 죽어서까지 인민들을 못 살게 굴었다.


인서트6(정수철) 북한 주민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쌀 사먹고 사는데 그날 오후 3시부터 갑자기 장마당을 다 철폐하고 장마당에서 들여보냈다. 그리고 공표한 것이 술을 사고파는 것을 못한다, 장마당도 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당장 먹을 쌀을 사두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그때 나온 것이 사는 사람도 처벌받지만 파는 사람은 더 엄중하게 처벌한다, 인민반에서 그렇게까지 말을 했다.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될게 아닌가, 왜 장마당까지 못 서게 하는가.


김정일은 죽는 순간까지 인민들을 삶을 파괴했다. 삶과 죽음이 일치했던 세계 최고의 독재자 다운 모습이었다.


인서트7(정수철) 결국 녹는 건 인민들밖에 없다. 국가에서 주는건 없고 다 장마당에 매달려서 거기서 자기가 넘겨왔든, 만들든 팔아서 남는 리윤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쌀이나 생활필수품을 사건데 그 류통이 되고 있는데 그 한고리를 끊어놓으면 연쇄고리도 다 끊어지게 되고 종결점은 먹어야 할 사람들이 먹지 못하는 상황이 조성된다. 그러니 하루나 이틀만 장마당을 못 보게 하고 물품을 통제하게 되면 인민들의 생활은 파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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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생애 평가>


네, 지금 여러분들은 김정일 사망 2주기 자유조선방송 특집을 듣고 계십니다. 2년전 김정일의 영결식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추운에 덜덜 떨던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자애로운 지도자였다면 인민들을 생각해서 간소하게 장례를 치러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김정일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가 결코 그럴 수 없는 인간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 김정일의 생애를 평가해 보겠습니다. 이성희 기자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 네, 안녕하십니까?


진행: 어떤 분들이 김정일의 인생을 평가해 주시나요?


이: 네, 김광인 북한전략센터 소장, 손광주 데일리엔케이 통일전략연구소 소장, 장해성 전 조선중앙방송 기자, 오경섭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홍순경 전 북한 외교관, 심주일 전 평양방어사령부 정치부 조직지도원, 끝으로 고 황장엽 전 중앙당 비서가 김정일의 인생을 평가하겠습니다.


진행: 자, 그럼 김정일의 경력부터 정리해볼까요?


이: 네. 김정일은 1941년 2월16일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유라였는데요, 하지만 김정일은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출생지를 조작했고, 김일성의 생일과 꺾이는 해를 맞추기 위해 출생년도까지 조작합니다. 김광인 북한전략센터 소장의 설명입니다.


인서트1) 김광인
김정일도 훗날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은 자기가 하바로부스크다,. 하바로부스크 파치코에 라는 곳이 있었는데 일명 브야츠크라고도 하기도 해요..러시아 발음이니까 조금 다를 수 있는데 자기가 거기가 고향이라고 했고 김일성 종합 대학에 입학 할 때까지도 러시아 이름인 유라라는 이름을 썼었고 나중에 인제 정일이라는 이름을 개명하게 되었구.. 자기 고향은 하바로부스크다 라고 스스로 이야기를 했었구요..훗날에 백두산으로 둔갑을 하게 되는데 82년부터..그것은 훗날 만들어진 백두산 출생 신화지요..북한에서는 뭐..백두산 혈통이라고 그래 가지고     허구로 꾸며진 신화를 만들었어요..그것은 그야말로 꾸며진 허구입니다,.


진행: 탄생 자체가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정일이 정치를 시작한 게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64년부터입니다. 당시만 해도 삼촌 김영주가 2인자였습니다. 김정일의 정치적 입지가 확대된 게 1967년부터인데, 숙청의 피바람이 기회가 됐죠?


이: 네. 김일성이 1967년 5.25교시를 내놓으면서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지는데요, 갑산파는 국내공산주의 세력으로서 김일성이 1966년에 내놓은 국방경제병진노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군수산업보다 인민경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손광주 데일리엔케이 통일전략연구소 소장의 설명 들어보겠습니다.


인서트2) 손광주
당시에 조선노동당 내부에는 이 갑산파가 있었는데요, 그 리더는 이제 박금철이었죠, 박금철 등을 비롯한 이 갑산파가 이 인민 경제를…이…주장을 많이 했는데, 사실 인민 경제는 노선이고 사실은 내부적으로는 권력투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 당 내의 직제를 보면은 위원장 제도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조직위원장, 선전위원장…어…조직부위원장 뭐 선전부위원장 그런 식이었죠, 그래서…어…당시의 이 위원장 제도가 비서국 비서제로 바뀌면서 갑산파들이 대거 입지가 축소될 그런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인민 경제 우선론을 택하면서…어…말하자면 김일성한테 일부 도전을 한거죠, 그래서 김일성 입장에서는 국방경제병진노선을 택하면서 중공업으로 빨리 발전을 시켜야되고 남조선 해방을 해야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내 종파는 안된다는 그런 어떤 그 입장을 내보이면서 갑산파들을 다 쳐내는데 그 때 김…김정일이 아버지를 도와서 크게 활약을 하게 됩니다,


진행: 손광주 소장은 갑산파 숙청 사건의 본질이 노선의 대립이라기 보단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권력투쟁이었다고 보고 있는데요,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네. 갑산파는 김일성에게 반대할 만한 세력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김일성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당시 부수상 박금철은 당 서열 4위였는데요, 1966년 10월 당중앙위원회에서 당중앙지도기관의 직제개편이 단행됩니다.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총비서로 이름이 바뀌고,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제도가 폐지됩니다. 그리고 비서국이 새로 설치되면서 조직비서와 조직지도부장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는데요, 이 자리에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오르면서 2인자로 부상을 했습니다. 후계자 자리를 염두에 두었던 박금철의 갑산파가 반발을 했고, 김일성이 이를 누르기 위해 숙청을 했습니다.


진행: 1966년부터 67년까지 2년간 진행된 갑산파 숙청 사건은 최근 있었던 장성택 사건과 비슷한 사건으로 평가가 되는데요, 이 무렵부터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사회로 변해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김정일이 큰 역할을 했지요?


이: 네. 김정일은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본격적으로 벌이게 되는데요, 둘 다 김일성의 신임을 얻기 위해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경쟁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갔고, 북한은 수령의 나라로 변질돼 갔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당의 유일사상 체계확립의 10대원칙’도 김정일이 권력 투쟁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손광주 소장의 설명입니다.


인서트3) 손광주
북한 현대사가 저렇게 수령 절대주의로 변질되게 되는데는 여러 가지 내외적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서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어가는 권력 투쟁도 북한이 기형적인,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아주 기형적인 체제를 오늘날 가지게 된 역사적 배경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에..그러고 나서 이제 김정일은 후계자로서의 더욱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김일성 우상화를 작업을 벌이게 됩니다, (중략) 김정일이 만약에 김일성…자신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러한 김일성 우상활 하는데 모든 경제적인 국가의 중요 자본을 투하 하지 않고 실제로 경제 건설을 위해서 투자했다고 그러면은 북한이 1990년대 중반에 저렇게 300만 명이 굶어 죽는 떼죽음을 당하진 않았을 겁니다


진행: 김정일은 독한 성격으로 삼촌 김영주를 쳐내고, 이어서 계모 김성애와 배다른 동생 모두를 곁가지로 몰아 정치적으로 매장 시켰습니다. 김정일은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후계체제를 구축하게 되는데요, 이 시기에 그가 벌인 사업 중에 ‘3대혁명소조운동’과 ‘70일 전투’가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 어떻습니까?


이: 네. 우선 1973년 김정일이 후계체제를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3대혁명소조운동에 대한 장해성 전 조선중앙방송 기자의 평가 들어보겠습니다.


인서트4) 장해성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그 나간 3대 혁명소조…나 같이 당원이기도 하고 제대군인이기도 한건 나은데 이건 당원도 아니고 그냥 제대군인도 아니고 그냥 학교만 곧옷이 올라온 아이들은 스물 서,너 살밖에 아니 되거든, 이런 애들이 농촌에 나가서 그 리당 비서 관리위원장, 그 다음에 분조소 소장 다 나이가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벌 되는 사람들한테 ‘이 양반 왜그래? 그렇게 하면 안돼’ 소조 말인데 어떻게 거역하나 그니까 그거 또 그 할 수 없이 집행하다보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았단 말이예요, 근데 이게 농촌뿐 아니라 그 공업 부문엔 더구나 공업이란 건 다 기술과 관련된 문젠데, 아, 대학을 금방 댕기다 나온…금방 졸업했건 나온 놈이 알면 뭘 알겠어요, 근데 내가 와서 이렇게 공장에 와서 막 큰소리치고 이렇게 하니까 생산 라인이 다 파탄되기도 하고 엉망진창이 된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이: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벌였던 경제정책이 70일 전투인데요, 70일 전투 역식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홍순경 전 북한 외교관의 평가입니다.


인서트5) 홍순경
전국적인 <70일 전투>를 했는데 그때 전국적으로 최대로 긁어먹을걸 긁어먹었는데 그것이 끝나면서 그 뒤로는 예비굴진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채탄을 할 것이 없었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났다. <70일 전투>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의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진행: 김정일은 경제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통치하면서 북한 주민들이 피땀흘려 마련했던 경제적 기초를 모두 허물어 버렸지 않았습니까?


이: 그렇습니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김일성에 대한 대대적인 우상화 사업을 벌이면서 경제에 큰 무리를 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경제를 무시한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였고, 특히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무리하게 개최함으로써 북한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김정일의 실정과 무능으로 1990년대 중반 3백만 명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인민들이 굶어죽고 있던 1995년에도 식량은 사지 않고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사업을 벌였습니다. 오경섭 세종 연구소 연구위원의 설명입니다.


인서트6(오경섭)
김정일이 그 시기 했언 것이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사업에 8억 9천만 달러를 지출한다. 이 8억 9천만 달러 이걸 가지고 옥수수를 사면 북한주민이 3년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옥수수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김정일이 인민을 위한 통치자라고 볼 수는 없다. 김정일의 모든 관심사는 인민들의 굶어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자신의 권력, 김일성, 김정일 일가의 권력을 강화하고 인민들에게 김일성, 김정일을 우상화시킬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집중돼있었다 하는 점이다.


진행: 김정일의  죄는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1990년대 말에 벌어졌던 심화조 숙청 사건을 비롯해, 2009년에 있었던 화폐교환 조치, 3대 세습을 하면서 북한을 봉건왕조국가로 만든 것, 그리고 한국 동포들을 향해 벌인 테러와 각종 도발 사건, 이런 김정일의 생애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이: 네, 역시 전문가들의 의견을 차례로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평양 방어사령부 정치부 조직지도원을 지낸 심주일씨의 평가 들어보겠습니다.


인서트7(심주일)
평가를 정말 하자면 우리 한민족 역사에 어떤 시대의 왕도, 지도자도 김정일만큼 호의호식한 사람이 없다. 기쁨조 있는 왕이 있었나? 왕궁에 춤추는 여자가 있긴 했지만. 그 뿐만 아니라 김정일은 경제파탄자, 수백만을 죽인사람, 그럼 우리가 보건대 핵 하나 만든거 갖고 일 많이 했다고 볼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 볼 수 없는거 아닌가. 이 사람은 해 놓은게 하나도 없다. 아무 것도 없어요. 그저 아무호의호식하다 죽은 사람이에요.


이: 황장엽 전 중앙당 비서가 살아 생전 남겼던 김정일에 대한 평가입니다.


삽입7: (황장엽 前 조선로동당 비서)
“수백만 사람이 굶어 죽였지,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었지, 핵무기 개발해 위협하고 있지, 이 자체가 비정상적이라는 거,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입니다.”


진행: 네. 자루 속의 송곳을 감출 수 없듯이 북한 당국이 김정일의 인생을 아무리 미화하려고 해도 그의 죄는 결코 덮어지지 않습니다. 이성희 기자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이: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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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


네, 지금 여러분들은 김정일 사망 2주기 자유조선방송 특집을 듣고 계십니다. 앞에서 김정일의 죄를 살펴봤는데요, 그가 남긴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는 인민의 권력을 사유화해서, 북한을 김씨 왕조국가로 만든 것입니다. 유례없는 3대세습 체제가 시작된 지 2년이 흘렀는데요,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준현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기자: 네, 안녕하십니까?


진행: 먼저 김정일이 사망한지 2년이 됐는데요, 한마디로 3대세습체제 강화를 위한 2년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기자: 네, 김정은은 3대 세습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공식적인 자리들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12월 30일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4월에는 노동당 제1비서,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됐습니다. 당과 군에서의 권력을 모두 차지하게 된 건데요. 이어 7월에는 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으면서 김정일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진행: 하지만 3대세습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를 통제하는데 상당히 신경을 썼지요?


기자: 그렇습니다. 당규약과 유일사상 10대원칙을 고치면서 김정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강요하고 3대 세습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리고 개정된 유일사상 10대원칙에 맞는 생활총화와 반성문 제출을 강요하는 등 주민들에 대한 사상통제를 강화했습니다. 최근에는 자본주의 문화를 차단하겠다며 109상무를 통해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시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진행: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그동안 유명 무실했던 당의 공식 회의체계를 강화시킨 건데요, 당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겠죠.


기자: 네 맞습니다. 김정일이 군대를 중시 했다면 김정은은 노동당을 중심으로 북한을 통치하려 했습니다. 과거 열리지 않던 노동당의 공식 회의체계를 가동시키며 당 기능 정상화하는가 하면, 빈자리로 있던 당 주요 기구에 인사를 충원했습니다. 이외에도 대규모 기층조직 행사를 열어 아래로부터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진행: 노동당을 강화하면서 군대의 힘을 빼기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했던 2년이었나 이렇게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자: 네. 김정일이 발탁한 리영호 군 총참모장과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 김정각 군 총정치국장,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등을 제거하거나 교체했습니다. 이 과정에 민간인 출신인 최룡해가 총정치국장에 오르면서 군부 힘 빼기를 본격화 했습니다. 이후 군부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인민무력부장과 총참모장, 작전국장 자리는 수시로 교체하면서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진행: 최근 장성택의 숙청은 상당히 큰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장성택 숙청도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기자: 네 김정은은 후견인으로 분류됐던 리영호와 장성택을 숙청하면서, 유일지배체제를 공고히 했습니다. 이 둘은 김정일이 김정은이 자리를 잡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세워둔 사람들인데요. 이들을 제거하면서 김정은의 홀로서기는 시작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진행: 화제를 돌려서 김정은의 정책도 살펴볼가요?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6.28방침을 비롯한 경제문제였는데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기자: 농업부분과 기업소 운영에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산설비나 자재가 너무 부족했고, 북한 당국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이 없다보니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경제특구 확대와 관광산업을 키워보겠다며 이래저래 노력하고 있는데요, 별 성과는 없는 상태입니다.


진행: 김정은 정권이 이처럼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기자: 김정은 입장에서 충성도가 땅바닥에 떨어진 북한 주민들에게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선, 경제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데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선 외국의 투자가 유일한 방법인데요, 외국의 투자를 받기 어려운 정책들만 내놓고 있어 답답하기만 합니다.


진행: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개혁과 개방을 해도 못 자랄 판에, 그와 상충되는 핵무력, 경제건설 병진노선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기자: 외국의 신뢰를 얻기 위한 정책만 펼쳐도 성공할까 말까 확신할 수 없는데요, 국제사회의 투자를 막는 핵개발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고,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정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진행: 그나마 가지고 있는 돈과 자재도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고 있지 않나요?


기자: 네, 지난 2년 동안 5억 달러를 우상화와 각종 전시성 사업에 쏟아 부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영생탑과 모자이크 벽화, 대형 동상을 세우는데 2억 달러를 썼습니다. 또 스키장과 승마장, 물놀이장 등에 3억 달러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장 성과가 보이는 곳에만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진행: 대외 관계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죠. 김정은이 등장한 직후부터 대외 관계가 악화됐죠?


기자: 네.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모든 나라들과 관계가 악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친한 나라죠. 중국과 사이가 안 좋아졌는데요. 중국이 이례적으로 대북제재에 찬성을 하는가 하면, 중국 내 북한 은행의 계좌를 동결시키기도 했습니다. 또 중국의 지도부들도 북한에 대해 회의적인 발언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을 포기하진 않겠지만 피를 나눈 형제 국가라는 특수한 관계에서 일반적인 국가 관계로 바꾸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진행: 그리고 앞에서 말했지만 김정은 정권은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함으로써 미국이나 한국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쉽지 않은 상태죠?


기자: 네, 그렇습니다. 미국이나 한국, 일본은 대화를 원한다면 김정은 정권이 비핵화를 위한 행동을 먼저 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데요, 이미 핵보유국을 선언한 마당에 김정은 정권이 어떤 조치를 취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또 2.29 합의를 김정은 정권이 일방적으로 깨면서 국제사회도 더 이상 김정은 정권을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앞으로 대외관계가 쉽게 풀리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 마지막으로 김정은 정권 2년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기자: 김정은이 개인적 관심사에 주력했던 2년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스키장, 물놀이장, 승마장 등 자신과 일부 특권층만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만 만들었고,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모부까지 처형하고 다음날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대외관계에서는 오락가락하는 모습만 보여줬던 2년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진행: 네, 조준현 기자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기자: 네, 감사합니다.


진행: 김정일 사망 2주기를 맞아 준비한 특집 방송은 여기까집니다. 김정일은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 처벌의 대상입니다. 그는 죄 값을 치르지도 않고 편안하게 숨어 거뒀습니다. 김정일이 살아서 치르지 못한 죄 값은 역사가 반드시 심판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김민수였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열린북한방송/12월 17일>


여기는 서울입니다


진행] 한 주간 있었던 남한과 서울 이야기 전해드리는 <여기는 서울입니다> 시간입니다. 오늘은 박근혜 대통령의 상설화 추진 내용과 대선 이후 1년을 맞아 정치권 소식을 알아 보구요. 연말정산을 앞둔 정부의 월세 공제율 확대안과 연말정산 똑똑히 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서울시에서 흥행하고 있는 심야버스에 대한 소식 준비돼 있습니다. 오늘 서울소식 전해주러 노영래 방송원이 자리해 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인사)


진행] 네, 반갑습니다. 서울입니다 2주 만에 뵙네요? (대답) 그런데 2주 동안 한반도엔 일이 참 많았어요. 장성택 실각설 터지고 곧바로 처형 소식 나오고 북한에서 일이 많으니까 남한 역시 정국이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방송원] 네 맞습니다. 오늘은 또 김정일이 2주기가 되는 날이잖습니까? 이에 따라서 남한정부도 북한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는데요. 오늘 첫 소식은 박근혜 대통령의 상설 사무조직 추진 소식입니다. 어제 박 대통령은 어제 국가 안전보장회의를 열고, 상설 사무조직을 설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인 국가 안전실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에 대응하겠다는 의미로 비춰집니다.


진행] 네 그런데 현재 국가 안보실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방송원] 네, 그렇습니다. 안보실은 있지만 상설조직이 필요할 만큼 현재 한반도의 상황을 좀 엄중하게 본 것 같습니다. 남한정부는 장성택 처형 이후 비상근무 체계를 유지해온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중심으로 북한의 내부 상황과 군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고 있는데요. 이런 한반도의 안보상황을 감안해서 어제 이런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성 사무조직 설치를 지시한 것 같습니다.


진행] 네, 이 사무조직은 이명박 정부때 폐지됐고, 이번 정부 들어서는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간사로 있는 국가위기관리 센터에서 관련업무를 담당해왔죠?


방송원]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장성택의 처형 이후 제대로 된 제어, 통제 기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 대통령은 향후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불투명하다며 무모한 도발 같은 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군과 경찰은 서해 5도를 비롯한 북한 인접 지역의 감시를 강화하고 당분간 비상근무를 유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진행]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작년 이맘때였죠? 대선 대통령 선거가 있었잖습니까? 딱 작년 12월 19일 이었는데,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방송원]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8대 대선 1년을 맞아서 정치계를 한 번 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해봤습니다. 당시 대선후보들이었던 3명이 있었죠? 당선되어 1년 운영을 이어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민주당의 문재인 의원, 무소속 안철수 의원인데요. 현재 이들은 어떤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진행] 네 재밌겠네요. 사실 일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들의 정치권 싸움이 끝나질 않은 것 같아요.


방송원] 네 그렇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신경전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될 것 같은데요.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승자가 되었지만 국내 정치 불안과 정통성 시비 속에서 축배를 들 여유도 없이 지내고 있고, 문재인 의원과 안철수 의원은 정치 재개를 위한 생존 투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진행] 네, 먼저 박대통령의 지난 1년부터 볼까요?


방송원] 네 박 대통령은 일단 외교와 안보 분야에서 성과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구요. 취임 이후 높은 국정 지지율을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재 51.6%의 국정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대선불복과 부정선거라는 논란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고, 경제 민주화나 복지 공약을 후퇴시키면서 그에 대한 비판이 거셉니다.


진행] 네 맞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비판이 거센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군요.


방송원] 네 박 대통령은 이런 지적을 염두해 둔 듯 모든 초점을 국민일에만 맡긴다면 어떤 비판도 감수할 인내심도 생길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진행] 네 다음은 문재인 의원입니다.


방송원] 네, 민주당의 문 의원은 대선에서 패배한 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지난달 말을 기점으로 다시 정치활동에 나왔죠? 주요 고비마다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현재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부분 회복한 편입니다. 하지만 지난 2007년 노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 포기 발언논란과 관련해서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하자고 제안했다가 대화록이 없자 사초실종이라는 공세에 시달리며 곤혹을 겪은 바 있구요. 대선에 다시 출마할 가능성을 시사 하면서 당내외적으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진행] 네, 문의원은 그동안 여러 논란 때문에 하고싶은 정치를 못했다라는 주장도 있었는데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정치행보를 계속해나갈 것 같군요. 마지막으로 안철수 의원의 1년도 소개해주시죠.


방송원] 네 무소속의 안 의원은 당시 지난 국회의원 보궐 선거 때 당선되면서 예비 신당 지지율이 야권 중에서 1위를 얻었을 정도로 당시에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하지만 신당 창당과 인재 영입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새 정치의 모호성에 대한 지적을 받았었죠. 현재 안 의원은 신당 추진 기구와 함께 오늘부터 전국 순회 설명회에 들어갑니다. 이 신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을 넘어서는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아보입니다. 더딘 인재 영입과 창당 등이 정치적 한계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진행]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음 경제소식으로 넘어가 보죠?


방송원] 네 연말을 맞아서 남한에서는 연말정산 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실 텐데요. 연말정산을 앞두고 정부가 카드공제율을 축소하고 월세 공제율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진행] 네 그렇군요. 북한에 계신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은 연말정산이 대체 뭐지? 하실 거 같아요. 소개 좀 해주시죠.


방송원] 네,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기 때문에 한 회사에 소속돼 일을 해면 일한 만큼의 댓가를 받습니다. 이걸 월급, 급여라고 하죠? 그리고 국민들은 이 급여에 따른 세금을 나라에 내게 됩니다. 버는 급여액에 따라 세금 내는 액수다 다 다른데요. 많이 벌수록 더 많이 내죠? 연말 정산이란, 지난 12개월간 내가 낸 소득세에 대해서 그 과부족을 정산하는 걸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 세금이 정당했는가를 따져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내 소득보다 세금이 과했다 하면 나라에서 세금을 돌려주기도 하구요. 너무 적었다 하면 더 부과하기도 합니다.


진행] 네, 맞습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이 연말정산을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잘하면 환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연말이 되면 모두들 이 연말정산에 바쁩니다.


방송원] 네 그런데 국세청에서 이런 연말정산의 내용을 조금 수정했는데요. 현금영수증 공제율을 20%에서 20%로 높이고, 대신 신용카드 공제율은 20%에서 15%로 낮췄습니다.


진행] 네 그렇게되면 현금영수증을 더 많이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늘겠고, 신용카드 사용률은 반대로 줄어들겠군요.


방송원] 네 또 총급여 5춴만원 이하 무주택자를 중심으로 월세 소득공제율은 40%에서 50%로 확대됐구요. 학생들의 교재 구입비도 공제대상에 포함됐습니다. 또 한부모 가정,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거나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집에는 950달러씩이 추가 공제됩니다.


진행] 네, 저소득층을 위한 방안인 것 같네요. 고소득자에 대한 과도한 소득공제를 없애기 위한 방법은 없나요?


방송원] 네 있습니다. 보험료와 의료비, 교육비, 청약저축, 신용카드 사용액 등의 9개 항목에 소득공제 종합 한도를 뒀습니다.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소득공제 혜택을 덜 주게 해둔 것이죠. 그리고 국세청은 연말정산이 끝난 뒤 소득공제 내용을 분석해 과다하게 소등공제를 받은 혐의가 있는 근로자와 원천징수의무자에 대해 가산세금을 부과할 예정입니다.


진행] 네, 그렇군요. 이런 연말정산은 그래서 어쩌면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존재지 않습니까?


방송원] 네 그렇죠. 그래서 다들 어떻게 하면 알뜰하게 연말정산을 챙길 수 있을까 고민들이 많을 텐데요. 이런 분들을 위해서 똑똑하게 연말정산하는 방법이 소개가 됐습니다.


진행] 아 그래요? 뭐죠? 궁금하네요.


방송원] 아 그런데 안타깝게도 맞벌이 부부에 한해 도움이 되는 소식이라 저만 잘 알아둬도 되겠네요. 하하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 소득이 높은 배우자가 생계를 같이하는 형제자매나 부양가족에 대한 소득공제를 받으면 절세효과가 커집니다. 부양가족에 대한 소득공제가 부부중 한명만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의료비나 신용카드 등은 급여가 적은 배우자가 지출하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 어우 상당히 복잡하네요. 혼자 살 때는 내꺼만 하면 되니까 편한데.. 네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 소식은 서울시의 심야버스 소식이죠?


방송원] 네, 그렇습니다. 서울시가 올해 33개 주요 정책을 대상으로 시민들과 공무원들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올해 10대 뉴스를 선정했는데요. 심야 전용 올빼미 버스가 1위에 올랐습니다.


진행] 네 심야버스, 올빼미 버스라고도 하죠? 늦은 시간에 귀가해야하는 시민들을 위해서 새벽까지 연장 운행을 시행했었는데요. 아주 반응이 좋았어요. 그렇죠?


방송원] 네 그렇습니다. 그런에 이 서울의 심야버스가 인기를 얻으면서 반면에 심야버스의 원조격인 경기도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경기도민들의 심야버스 확대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인데요. 서울지역에서만 운행되는 이 버스는 사실 경기도나 다른 지역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연계되는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 집 근처까지 버스를 이용하고, 택시를 타야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진행] 아 그랬군요. 대중교통이 다 끊겨버린 심야에 이동하기 쉬운 이 올빼미 버스에 서울시민들은 환영했지만, 반대로 경기도민들의 불만이 커져 버렸네요?


방송원] 네, 기대가 커져버린 거죠. 하지만 경기도는 손실을 보전해주는 준공영제인 서울시와 달리, 민영방식으로 운영됩니다. 그래서 적자가 나면 버스회사에서 직접 감수해야하기 때문에 이는 사실 불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십여년 전 서울시보다도 먼저 심야버스를 도입했었던 적이 있었는데요. 수익성 문제 때문에 폐지됐습니다.


진행] 네 그럴수도 있겠네요. 경기도는 또 거리도 멀고 정류장 간의 간격도 길어서 비용부담이 상당하겠어요. 우리 경기도민들은 질투가 나도 좀 참는 수밖에 없겠네요. 아참 아까 서울시민들이 꼽은 올해 10대 정책 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좀 더 소개좀 해주세요. 궁금하네요.


방송원] 네 원전 하나 줄이기 정책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추진이 2, 3위를 차지했고 이어서 국공립어린이집 확충, 환자안심병원 등이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이밖에 아파트 관리 실태조사 등의 내용을 담은 ‘맑은 아파트’ 정책과 지하철 9호선 재구조화, 여성안심특별도시 추진, 시민청 조성, 임대주택 8만호 등이 순위에 들었습니다.


진행] 네, 죽 보니까 주로 시민 생활과 밀접한 정책이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은데요. 내년에도 더욱 더 시민들의 말에 귀 기울여 피부에 와닿는 정책을 추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네, 오늘 저희 준비한 소식은 여기까집니다. 노영래 방송원 수고하셨습니다. (네)


closing] 네, 오늘은 남한 서울에서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소식들을 알아봤습니다. 이 방송을 통해서 남한 서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증은 많이 해결되셨나요? 앞으로도 다양하고 유익한 소식 가지고 찾아 뵐 테니, 기대해 주시고요, 지금까지 열린 북한 방송에서 보내드리는 <여기는 서울입니다> 시간이었습니다.


<북한개혁방송/12월 17일>


북한인권특강


북조선동포 여러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먼저 시간에 이어서, 유엔이 지난 1948년 12월 10일 역사적인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지 65주년이 된 것과 관련해서 ‘세계인권선언’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며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올해는 유엔총회가『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해서 선포한지 65년째 되는 해이고, 12월 10일은 ‘세계인권기념일’입니다. 이 날은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성대하게 기념하는 날입니다. 남녘의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는 해마다 이날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펼칩니다.


지난 시간에는 ‘인권’이란 무엇이고 ‘세계인권선언’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대략 말씀 나누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살펴 보면서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세계인권선언’은 (1)전문과 (2)인권 일반 원칙(1-2조) (3)시민·정치적 권리(3- 21조) (4)경제·사회·문화적 권리(22-26조) (5)인권 이행 관련 사항(27-30조) 등 다섯 개 분야 총 30개 조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전문은 인권의 개념과 가치, 목표를 제시했고. 인권 실현의 방법으로는 전제와 탄압에 대항하는 저항권과 법의 지배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와 함께 인권의 국제적 보장과 회원국의 의무도 명시했습니다.


둘째, 인권의 일반 원칙으로는 제1조에서 자유·평등·박애를, 제2조에서는 평등과 비차별을 규정했는데 이 조항은 이후 인종차별철폐협약(1965), 시민적·정치적 규약(1966), 여성차별철폐협약(1979), 장애인권리협약(2006) 등 각종 국제조약을 제정함에 있어서 차별 철폐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셋째, 시민·정치적 권리로는 ▶생명·신체의 자유 ▶법의 보호 ▶인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프라이버시권 즉 개인의 사생활 보호권 ▶거주·이전·국적 선택 권리 ▶가족·재산의 권리 ▶사상·표현·집회·결사의 권리 ▶정치권을 규정했습니다.


넷째,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현대에 와서 중요성이 더 커졌습니다. 고용·의료 등 사회보장을 가질 권리와 일할 권리, 동일 노동·동일 임금의 원칙 등을 규정했습니다. 그 밖에 의식주 등 적합한 생활을 누릴 권리와 초등교육 등을 무상으로 받을 권리를 명시했고 다섯째, 인권 이행 관련 조항은 인권이 실현되기 위한 환경으로 국제 평화 유지를 강조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인권을 지킬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규정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전문에서 “인류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자유와 정의와 세계평화의 기초는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는데 있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고 강조했는데 여기서 지적한 야만적 행위는 바로 전쟁이나 폭력 등 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0개 조항으로 된 본문에서는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제3조).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제4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모욕,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제5조)…”는 것 등을 규정했습니다.


또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제6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떠한 차별도 없이 동등하게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제7조). 모든 사람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 법원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제8조).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본인의 뜻에 어긋나게…체포,구금,추방을 당하지 않는다(제9조 )”고도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또한 그 나라를 떠날 권리가 있고, 다시 돌아올 권리도 있다(제13조).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다(제14조). 모든 사람은 사유재산 소유권,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제18조). 의사표현의 자유(제19조).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제20조)….”고 규정했습니다.


다만 ‘세계인권선언’은 법률이 아닌 ‘선언’이기 때문에 구속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엔은 그 선언을 바탕으로 구속력을 지니는 국제법인 여러 ‘규약’과 ‘협약’을 제정했습니다. 1965년의 ‘인종차별철폐협약’, 1966년의 ‘시민적·정치적 규약’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규약’, 1979년의 ‘여성차별철폐협약’, 2006년의 ‘장애인권리협약’) 등이 그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구속력을 지닌 국제법규인 것입니다.


그런데 북조선의 경우, 중요한 국제 인권규약이나 협약에 가입해 있으면서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지탄과 소외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제사회는 북조선 당국이 인민의 인권을 침해하는데 대해 여러차례 시정을 촉구해 왔고 금년 들어서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직접 조사에 나섰습니다.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은 이미 국경을 허문 상태입니다. 북조선 당국의 각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 이 시간에 말씀 계속 나누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