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피투성이 선생님 얼굴에 내리던 하얀 눈

아직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벌써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지만 잊으려 해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압록강변의 그 처절했던 영상들이 아직도 눈앞에 안겨 온다.

새해도 보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찌뿌둥한 날씨는 아침부터 뭐가 내릴 듯 내릴 듯 하면서도 오전이 다 갔다. 점심 때 지나서 나는 뒷집 성녀 아주머니와 함께 물동이를 이고 집을 나섰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골목길을 지나 압록강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얼마나 많이도 다니던 그 길인가. 인민학교 중학교에도 그 길로 다녔고 학교를 졸업하고 혜산 예술선전대에 다닐 때에도 그 길로 달려가고 달려오던 길이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발걸음은 더 무거워졌다.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러다 혹시 잡히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래도 당의 노선과 정책을 예술로 근로자들 속에 전파하는 선동대원인데? 혹시라도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 듯싶어 얼굴 전체를 가리다 시피하고 머리를 한껏 숙였지만 그래도 가슴은 방망이질 하고 두렵기만 했다.

그런데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녀 아주머니는 말도 없이 씨엉씨엉 잘도 걷기만 했다.

절망에 사로잡힌 날 따뜻하게 안아준 선생님

생각해 보면 눈물이 났다. 나도 고등중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는 다른 모든 친구들과 함께 꿈이 많았다. 대학으로 갈까, 직장으로 갈까, 아니면 군대에 가서 보기에도 깜찍한 해군 쎄라복이라도 입어 볼까…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도 하얀 위생복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건 자신을 그려보며 평양 의학대학으로 갈 푸른 꿈에 한껏 젖어 있었다.

정말로 그때 생각 같으면 마음만 먹으면 저 하늘에 별이라도 따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교문을 나서게 되었을 때에야 우리 모두는 누가 어디로 가고 싶어하건 말건 각자에게 이미 가야 할 길이 엄격하게 지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대학 평양의학대학 같은 대학은 일반 애들로서는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북송 재일동포 2세였다. 다른 이유도 없이 그 하나의 이유로 나의 푸른 꿈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에 사로잡혀 울고 있을 때 그때 나를 안아 따듯하게 일으켜 세워 주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었다. 고등중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곧 우리를 담당하여 온 담임선생님, 평양 제일사범대학을 졸업하고도 성분문제가 걸려 평양에 근무하지 못하고 혜산으로 배치되었다는 우리 선생님은 정말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선화야, 그래 이것이 사회 현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울고 앉아 있어서야 되겠니. 울어서 해결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내 생각에는 이제라도 울고 앉아있을 것이 아니라 허락되는 범위에서 새 출로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구나.”

그러면서 선생님은 내가 어려서부터 학생예술소조에 다닌 것을 생각하시고 예술부문으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말씀하셨다. 결국 나는 담임선생님의 말씀대로 혜산철도관리국 기동예술선전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고 보니 그것도 못된 애들로서는 참으로 선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길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들어가고 보니 나는 기타가 전문이었는데 선전대에는 이미 기타 전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다시 절망의 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때도 선생님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 일으켜 주셨으며 드럼연주를 배우도록 이끌어 주셨다. 하여 나는 마침내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화려한 조명등 무대에서는 아니었지만 빛나는 태양 내리 쪼이는 불볕 밑에서도 공연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온갖 시름을 다 잊으시고 환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을 보았다.

“선화야 봐라. 결국 쉽게 굴복하는 게 아니야. 뭐 꼭 흰 위생복을 입고 청진기를 들어야만 당에 충실하고 행복을 찾는 길이겠니. 지금처럼 무대에서 아름다운 공연을 펼쳐도 그것으로 남들에게 기쁨을 준다면 그것이 곧 당에 충실하고 행복을 찾는 길이야.”

그날 선생님은 진정 자기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우리 선생님은 바로 그런 분이었다. 언제나 옳고 바른 길로만 가라고 그렇게도 간절히 가르치시던 선생님…

하지만 난 그날 앓아 누우신 어머니를 위해 누군가 꾸어간 옥수수 대신 가져다 놓은 구리 덩어리를 가지고 몰래 압록강에 쌀 바꾸러 나가는 것이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디선가 선생님이 지켜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압록강 둑에 이르도록 아무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간을 빼가는 세상

하긴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 모두가 춥고 배고프고 저 살기도 어려운 때인데 누구라고 여유가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이나 한가하게 보고 있으랴. 압록강 둑 밑에 이르렀을 때였다. 둑 너머로부터 여인네의 앙칼진 소리가 귀청을 어지럽혔다.

“야, 이년아 놓지 못하겠어. 그게 어떻게 네 것이야. 이년, 눈을 뻔히 뜨고 있는데 생앙탈을 부리네. 놔라, 놔. 놓지 못하겠어.” 깜짝 놀라 둑위에 올라갔다.

승냥이 같은 여인네 네, 다섯이 한 여인을 둘러싸고 개 패듯 패면서 손에 쥔 무엇인가를 빼앗으려고 악을 쓰고 있었다.

“아니예요. 아니란 말이예요. 저도 저 중국 사람한테서 받을 것이 있단 말이예요.”

그 여인은 마치 무슨 자기의 귀한 목숨이나 되는 것처럼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한눈에도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압록강 연안 여인네들은, 아니 여인네들 뿐 아니라 남자들도 같았다. 중국 사람들한테 구리면 구리, 쇠붙이면 쇠붙이를 닥치는대로 넘겨주고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아 그것으로 가까스로 꺼져가는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할 사람들은 많고, 그 허접 쓰레기 같은 쇠붙이를 요구하는 중국 사람들은 적다보니 자연히 절박한 쪽에서 속는 수가 많았다. 결국 이 날도 그렇게 된 것이 분명했다.

“야, 이 년아. 네가 저 놈한테서 받을 것 있는 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걸 놔라. 놓지 못하겠어. 이건 우리 거란 말이야.”

둘러싼 여인네들은 쓰러져 있는 여인을 마치 나무통 굴리듯 굴리며 꼬집고 할퀴고 쥐어뜯고 하였다. 실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사악해질 수 있을까. 성녀 아주머니가 나를 다그쳤다.

“가자 뭘 저런 걸 가지고 그러니. 여기서는 저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야.”
“저 아주머니들이 왜 저러는 거예요. 저러다가 저 아주머니 죽기라도 하면 어쩔려구요.”
“흥. 사람 목숨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줄 아니. 보나마나 저 아주머니도 되놈들한테 물건만 떼이고 만 모양이지.” 성녀 아주머니는 별일 아닌듯이 말했다.

“너도 여기 몇 번 나오면 알게 되겠지만 여긴 그런 세상이야. 중국 되놈들이 정말로 얼마나 돼먹지 못했는지 여기서는 바싹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눈을 감으면 간을 빼 가는 판이라니까.”

그랬다. 거기는 정말로 눈을 감으면 간을 빼 가는 세상이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거기서 그런 일이 있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다.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직장과 학교를 다니면서 비록 잘 먹고 잘 살지는 못했지만 남들 모두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저 세상 모두가 그렇거니 큰 불평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세상은 하루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점차 늦어지던 배급 날짜가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뚝 끊어지면서 사람들은 말 그대로 먹고 살아가기 위해 처절한 싸움판에 뛰어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북도 등 곡창지대와 줄을 대기 위해 몸부림 쳤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지자 점차 강 건너 중국을 건너다보기 시작했다. 중국은 그때 개혁개방으로 나날이 잘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삼이며 생복이며 북에서도 귀한 해산물을 중국쪽에 받치고 쌀을 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해삼, 생복이 그리 많아 그 많은 굶주린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모두 채울 수 있겠는가. 낙지와 명태, 해산물이면 무엇이든 가져다주고 쌀을 바꿔왔다.

그러나 그것도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자 나중에는 구리, 망간, 코발트 심지어 녹슨 쇠붙이까지 중국 사람들에게 갖다 받치게 된 것이다. 방금 전까지 돌던 전동기를 멈추고 구리줄을 풀어내는 것도 그때의 일이다. 물론 불법이었다.

나 자신이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워

사람들은 그렇게 풀어낸 구리줄이며 쇠붙이들을 중국 사람들에게 넘기고 그들로부터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아 그 돈으로 굶주린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사기꾼들이 날뛰었다. 굶주린 이들로부터 물건을 받고도 돈을 안 주는 것이다. 그러면 온 가족이 굶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싸움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나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이 창피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냥이 같은 아주머니들은 그 쓰러진 아주머니를 마구 꼬집고 할퀴었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았다. 아마도 그 꼬깃꼬깃 비닐에 싼 것에 그의 가족 전체의 목숨이 달려 있으리라. 그쯤 되자 둘러싼 아주머니들도 더는 손에 쥔 것을 빼앗을 생각을 포기했는지 그냥 패기만 했다. 그 아주머니는 정말로 죽기라도 했는지 피투성이 되어 쓰러진 채 움직이지 조차 않았다.

이러다 그 아주머니가 정말로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과 꼭 같이 구리를 중국 사람들에게 넘겨주려 왔다는 사실도 잊고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악을 쓰며 쓰러져 있는 여인을 몸으로 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이러다 정말로 사람 죽이겠어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른다. 내 뒤를 따라 성녀아주머니도 내려왔다. 그제야 그 아주머니들은 갖은 욕설을 다 퍼부으며 둑 넘어로 물러갔다.

쓰러진 여인은 조금이라도 매를 피해 볼 양으로 그랬는지 고개를 도랑 쪽에 박고 있었다. 하지만 피는 흘러나와 눈 위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핏줄이 파랗게 드러난 다리… 언제부터인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성녀 아주머니가 여인을 안아 일으켰다. 몽땅 피투성이다. 아니 피투성이가 아니라 해도 얼굴이 너무 부어있어 누군지 알 수조차 없었다. 성녀 아주머니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순간 그 피투성이의 얼굴에서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러나, 그러나… 그 여인은 바로 나의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

나는 죽은듯이 쓰러져 있는 선생님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한송이 두송이 내리기 시작한 눈이 선생님의 얼굴에서 녹고 있었다. “선생님, 이게 웬일입니까. 이게 웬일인가 말입니다.”

억장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이것이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당에 충실하기 위해 걷는 길입니까. 선생님!”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있지 않아 나는 바로 압록강을 건넜다. 당을 위해 걷는 길? 아니다. 나는 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길을 택했던 것이다.

박련화(가명, 탈북자)

※ 탈북자 방송 <자유북한방송>의 양해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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