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지] 서해갑문은 北 몰락의 기폭제였다

▲ 북이 자랑하는 서해갑문 전경

2박3일 일정의 북한 방문을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4일) 남포에 위치한 서해갑문을 방문한다.

서해갑문은 북한 남포항에 입항할 수 있는 선박의 규모를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초대형 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국제적인 규모라는 것은 북한의 선전에 불과하다. 홍수조절 기능도 이번 여름 수해에서 알 수 있듯이 서해갑문 때문에 오히려 악화됐다고 탈북자들은 말한다.

서해갑문은 북한과 특히 김정일 위원장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곳이다. 서해갑문 건설의 발기 및 감독, 공사책임자가 사실상 김정일 이고 또 이후 북한의 경제난과 밀접한 연계가 있기 때문이다.

서해갑문 건설공사가 북한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자원까지 소진하게 만드는 등 10년 후 일어나게 될 ‘고난의 행군’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공사기간중 예상치 않게 발생한 1984년 남한의 수해에 대규모 전쟁비상물자까지 털어내면서 이후 북한 주민들의 궁핍한 삶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북한이 90년 대 중반부터 겪은 격심한 경제곤난과 수백만의 대량아사가 어느날 한 순간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김정일의 실정이 쌓이고 쌓인 결과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한 일본인 건설기술자의 추산에 따르면 북한이 서해갑문 건설에 쏟아부은 건설비는 총 60억 달러다. 이는 총 40억 달러의 거금이 들었다고 공식 발표한 북한의 발표보다 20억 달러가 더 많은 금액이다.

북한이 서해갑문을 건설한 목적은 27억 톤의 담수능력을 지닌 인공호를 조성하여 남포항의 접안능력을 2만 톤에서 5만 톤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등 대동강 홍수 조절과 농경지 확보, 항만 개발을 위함이다.

하지만 당시 북한 주민들 속에서는 서해 백령도에서 직접 대동강을 통하여 침투하는 남한 간첩(특수부대)들을 차단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있는 평양의 치안을 지키려고 건설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직접 받는 대동강을 바다로 부터 차단하려는 북한 당국의 의도도 한 몫 했다는 것이다. 실제 남한에 침투하던 북한의 연락소 요원(간첩)들은 밀물과 썰물만 잘 이용하면 별도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한강하구 서울쪽에 침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해갑문은 지난 1981년 공사를 시작해 5년만인 1986년 완공됐다. 북한은 당초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1개 군단 규모의 군병력과 각지에서 동원된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북한이 공사기한을 3년으로 잡은 것은 아니다. 초기 북한 설계자들과 관계자들은 서해갑문 건설시기를 20여년으로 잡았다. 이는 낮은 북한의 토목공사기술과 워낙 방대한 공사규모를 감안했기 때문이다.

또 20여리 날바다를 막아야 하는데다가 공사현장 작업지역의 유속(물흐름)이 초속 11m로 빠르고 수심또한 최고 30m로 깊어 작업조건이 지극히 나빴던 것도 한 원인 이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당시 70세를 내다보던 김일성의 나이를 감안하여 “수령님이 살아생전 보지 못하는 공사는 그 의미가 없다”고 일축하고 “남들이 10년, 20년 걸려서 하는 공사라면 우리는 3년, 5년 내에 할 수 있다”고 공사단축을 지시했다.

이후 대규모의 인민군 건설부대들이 투입되어 수많은 인명사고를 내는 무모한 공사를 추진했다. 북한은 수중용접이나 위험한 작업에 군인들의 자원참가를 높이기 위하여 ‘영웅’칭호를 내세우기도 했다. 서해갑문 건설이 끝나고 북한에 많은 ‘영웅’들이 생겨난데서도 알 수 있다.

다시말하여 생명의 위험이 따르는 위험한 작업에 참가하는 군인들을 ‘영웅’칭호와 각종 ‘훈장’들로 이용한 것이다. 서해갑문 공사에 관여한 탈북자에 따르면 공사 기간 동안 하루 평균 적게는 2∼3명에서 7명까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특히 가물막이 공사 때는 피해가 극심했다고 한다. 공사기간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수천명에 달한다는 것.

서해갑문은 북한에서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한 대표적인 공사 중 하나로 꼽힌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직접 건설현장을 찾아 군인들과 건설자들을 위로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등 서해갑문 건설에 전 인민적 참여를 강요했다. 또 각지의 공장과 사회단체들도 정기적으로 지원물자(빵, 육류 등 식료품 위주)를 가지고 서해갑문 건설현장을 찾도록 강요했다.

특히 배고픈 군인들을 위하여 밀가루 베게빵을 많이 지원했는데 오죽하면 서해갑문 건설공사에 동원된 북한군 군인들이 서해갑문은 빵으로 만들어 졌다고 할 정도였다.

북한은 온갖 무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해갑문 완공시기를 두 차례(1985년 4월 15일, 1985년 10월 10일)나 연기한 끝에 1986년 6월 24일 완공하였다.

한편 서해갑문은 현재 북한에서 ‘노동당시대의 대기념비’로 선전되면서 주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주요 참관코스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