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도 울린 ‘생의 흔적’에 얽힌 비화

▲ 영화 ‘생의 흔적’에서 주연을 맡은 인민배우 오미란

북한 관영 ‘조선중앙텔레비죤’은 영화 ‘생의 흔적(1989년 제작, 2부작)’을 지난 6일 재방영했다. 이 영화는 조선예술영화 촬영소의 유명 작가 이춘구가 시나리오를 쓰고 인민배우 오미란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다.

김정일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진정한 애국자란 명예와 보수를 바라는 것이 없이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남겨 더 유명해진 영화다.

이 영화는 인민군 군관(장교)과 결혼한 여주인공이 남한의 해상도발에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남편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농사일에 몰두, 결국 협동농장 관리위원장까지 승진한다는 ‘노력영웅’ 이야기다.

1989년 개봉 당시 ‘고상한 인간애와 노동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역의 모델이 됐던 실제 인물 한순희는 ‘노력영웅’으로 각광받던 인생의 정점에서 ‘간첩’으로 몰리며 처형당해 ‘영화 같은 인생’의 막을 내렸다.

◆서관히와 함께 처형당한 한순희= ‘생의 흔적’은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주인공역의 모델이된 실제 인물은 지난 1997년 9월 평양에서 서관히 전 농업담당비서와 함께 간첩협의로 공개처형 당한 한순희 숙천군 성남협동농장 관리위원장이다.

‘생의 흔적’에서는 남편이 한국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묘사돼 있으나, 실제는 남편 역시 숙천군에서 농업 간부로 있다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남편을 잃고 농장 일에 나서 열심히 일하던 중 숙천군 현지지도에 나온 김일성을 만나게 됐고, 그 인연으로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으로 승진했다.

1960년대~1980년대까지 김일성은 거의 해마다 숙천군을 방문했다. 이로 인해 한순희는 ‘노력영웅’의 칭호를 받으며 198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까지 발탁됐다. 영화 ‘생의 흔적’은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한 것이다. 노동당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그녀를 내세웠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 소위 ‘심화조 사건’(1990년대 후반 김일성 측근을 제거하기 위해 김정일이 지시했던 대규모 간첩색출 사건)에 한순희도 연루됐다. 1990년대 북한 식량난의 주범으로 몰린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가 간첩죄로 처형당할 때, 평소 서관히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그녀에게도 간첩죄가 씌워졌다.

한순희는 1997년 9월 평양시 통일거리 승리 3동에서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관히와 함께 공개총살 됐다. 김정일은 ‘심화조’사건으로 당과 국가기관에서 친 김일성 인물들이 제거되자 자신이 처형지시를 내렸던 몇몇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 시켜주는 소위 ‘인덕정치’를 선뵈기도 했다.

97년 총살된 한순희 역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2000년에 명예가 회복됐다. 그녀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던 대부분의 가족들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집도 가지 않은 채 관리위원장의 뒷시중을 들어오던 이모 한사람만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심장에 남는 사람’ 때문에 철직당한 작가 이춘구= 영화 ‘생의 흔적’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이춘구는 남한에도 제법 알려진 작가다.

그는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에서 출생해 평양시 고등기계기술학교를 졸업하고 기계제작 공으로 일했다.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1963년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과에 입학, 1967년부터 ‘조선문학창작사’ 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1974년 영화 ‘열관리공’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계에 등장했고, 1970년대 김일성 찬양 영화 ‘이 세상 끝까지’와 ‘우리 농장 여기사’를 쓰기도 했으나 이후 별다른 작품을 쓰지 못하며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춘구가 북한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85년 영화 ‘봄날의 눈석이’를 내놓으면서부터다. 그 후 ‘생의 흔적’ ‘도라지 꽃’ ‘열네 번째 겨울’ ‘군당책임비서’ ‘심장에 남는 사람’ ‘보증’ ‘대하와 거품’ ‘기다려다오’ ‘혁명가’ ‘청춘의 심장’ ‘자신에게 물어보라’ ‘효녀’ ‘곡절 많은 운명’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최고 작가의 대우를 받았다.

1990년대 초 월북했던 작가 황석영과 함께 광주 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공동 창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80년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김일성훈장 수훈, 2중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사장’ ‘범민련 북측본부 중앙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춘구의 승승장구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오래전부터 당뇨병으로 고생했던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필사적으로 집필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그의 성공을 질투하는 주변 사람들이 ‘당 생활총화’에 자주 빠지고 당 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는 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그를 공격했다.

설상가상으로 작품표절 논란까지 생기면서 ‘비판무대’에 자주 불려 다니게 됐고, 새로 창작한 예술영화 ‘심장에 남는 사람’이 남·녀간 삼각관계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결국 해임, 철직돼 1998년 양강도 대홍단군으로 쫓겨 갔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학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삼각관계를 다루는 영화나 소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심장에 남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는 대홍단군에서 병과 생활고로 고생을 겪다가 2003년에야 비로소 다시 복권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부활했다. 2005년 9월 22일 연합뉴스는 대북소식통을 인용해 이춘구가 “2004년부터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발탁돼 영화분야를 담당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구체적인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선암으로 사망한 배우 오미란= ‘생의 흔적’에서 주인공인 서진주의 역을 맡은 인민배우 오미란은 인민군 ‘4.25영화촬영소’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오향문(2000.10 사망)은 6.25전쟁 때 월북한 배우로서 북한에서 ‘우리 집 문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 출연했다.

오미란은 원래 1979년부터 평양예술단의 무용배우로 활동하다가 1980년 영화 ‘축포가 오른다’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들의 모습에서’ ‘종군기자의 수기’ ‘새 정권의 탄생’ ‘민족과 운명’ ‘도라지 꽃’ ‘샛별’ ‘곡절 많은 운명’ ‘생의 흔적’ 등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해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특히 1987년 9월 제1회 평양 비동맹영화제에서 ‘도라지 꽃’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1990년 10월 제1회 남북영화제(뉴욕)에 참석해 최우수 남북 영화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8년 인민배우,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으며 2002년 11월에는 ‘김일성 상’을 받기도 했다.

오미란은 청순한 외모와 함께 뛰어난 연기력으로 여러 차례 김정일의 개별 연기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화배우 홍영희와 함께 김정일의 내연녀라는 소문도 광범위하게 돌았다.

그는 유선암으로 십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김정일의 특별 조치로 전문 의료진들의 간호와 외국의 비싼 약까지 하사받는 특혜를 누렸으나, 2006년 6월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