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신연방주 교육제도의 개편과 동서독 지역의 교육통합은 통일 후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였다. 교육통합은 통일조약 제37조(교육)와 통일 후 각주 교육장관회의에서의 결정사항 등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교육의 폐지, 교육시설 및 자재의 신설과 보수, 교사의 재교육 등이 주요한 과제였다.

독일에서는 교육업무가 주정부 소관이어서 신연방주는 교육체제 개편을 위해 막대한 자체재원 확보가 필요했다. 그러나 신연방주의 취약한 재정상태를 고려하여 연방정부가 대폭적 재정지원을 함으로써 교육통합은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동독의 교육제도와 교육개혁

동서독 간에는 교육목표와 교육제도에 큰 차이가 있었다. 우선 교육목표에서, 서독은 개인을 민주시민으로 육성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나 동독은 당과 국가에 필요한 사회주의적 인간형성에 중점을 두었다. 교육업무 담당기관도 서독은 주정부였으나 동독은 중앙정부였다. 교육체제도 서독은 기본학교(Hauptschule), 레알슐레(Realschule), 김나지움(Gymnasium) 등 세 종류의 복수 학제이나, 동독은 10학년제 일반종합학교에서 초·중·고교 과정을 마치는 단일학제였다.

동독지역의 교육개혁은 1989년 11월 모드로우 정부 당시 군사훈련 폐지, 주 5일제 수업허용, 국가윤리과목의 사회윤리과목으로의 대체 등 일부 개혁이 있었고, 1990년 4월 이후 드메지어 정부에서도 서독 측의 조언을 받아 일부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본격적 개혁은 통일 후 이루어졌다. 통일조약 37조는 동독에서 취득한 각종 졸업장과 자격증이 동독지역과 베를린지역에서 계속 유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각종 학제는 새로운 학제가 확정될 때까지는 함부르크 협약과 교육장관회의에서의 합의사항에 따라 운영토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육통합도 이 지침에 따라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교육통합의 과제와 통합노력

교육통합 시 가장 중요한 과제는 ①교원해고와 교원연수 문제, ②교육시설의 보수·신축과 기자재 확보 문제, ③이념적 잔재의 청산문제였다. 교사나 교수들 가운데 공산당 간부, 비밀경찰(Stasi) 협력자 등 사회주의 전위세력, 무능자, 러시아어 특기자, 이념교육 담당자 등은 통일 후 바로 해고되었다. 해고되지 않은 교사들도 서독지역에 비해 자질이 현저히 낮아 교사교육법을 제정, 의무적으로 재교육을 받도록 했다. 특히 동독 교사자격증 소유자는 재교육 과정을 밟아야 서독지역에서 교사로 근무할 수 있었다. 교육계에서 총 22만 여명이 검증을 받았고 해고된 인원은 19,500명으로 전체의 8.8%에 해당된다. 해고이유는 대부분 전문능력 부족 때문이었고, 슈타지 연루로 해고된 인원은 전체 해고인원의 10%였다.

교육시설과 기자재의 개선도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연방정부가 75%, 주정부가 25%를 부담, 총 24억 3,000만 마르크(1조 2,150억 원)를 투입했다. 교과서 개편을 위해 연방정부는 1990년 겨울학기에 약 6,000만 마르크를 투입하여 초·중·고교에 교과서 250만 권을 제공했으며 대학에도 1,500만 마르크 상당의 교재가 공급되었다.

이념적 잔재 청산을 위해 각급 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교육이 폐지되었고 대학에서도 이념과 관련된 철학, 법학, 경제학 등의 과목은 폐지되었다. 이념 관련 연구소들도 폐쇄되고, 관련 교수와 연구원들은 일정기간 동안 기본급 70%의 보수를 준 후 해임되었으며, 이렇게 정리된 교수가 4,000여 명에 달했다.

대학교육 개편을 위한 주요 과제 중의 하나는 우수 교수요원의 확보문제였다. 따라서 서독지역으로부터 객원연구원, 파견교수 형식으로 초빙하고 휴직 및 은퇴 교수들도 활용했으며, 많은 서독 출신들이 신연방주 대학에서 학장, 총장 등 고위직 관리자로 근무했다. 통일 후 각급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한 교육내용은 건강 교육, 유럽통합 교육, 외국어 교육, 환경 교육, 정치 교육, 직업 교육, 학부모회 활용 등이다.

교육통합의 문제점과 평가

교육통합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제기되었다. 첫째, 공산주의 이념교육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과 교수요원의 자질부족은 큰 문제였다. 학생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쉽지 않았고 특히 교원의 자질부족과 열악한 교육환경으로 인한 교육효과의 저하는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둘째, 서독 출신들이 총장, 학장 등 대학의 상층부를 독식했다는 불만이다. 특히 서독에서 반실업 상태에 있던 인력들을 초빙하는 대신 유능한 동독출신 교수들은 해고되었다는 불만이 많아 교육의 ‘식민지화’라는 말도 생겨났다.

셋째, 동독교육의 장점들을 살리지 못하고 교육제도가 개악(改惡)되었다는 동독주민들의 불만도 많았다. 가까운 거리로의 통학, 우수한 유치원 교육 등 구동독 교육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넷째, 동독 대학생들의 불만이 높았다는 점이다. 동독 대학생들은 1989년 동독혁명의 주역이 아니였고, 통일 후에도 사회주의 정치문화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가치체계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더욱이 동독시절에는 국가로부터 장학금, 기숙사 및 미래의 직장까지 보장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통일 후 불만이 많았으며 이런 불만이 폭력, 극우적 민족주의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동서독이 모두 무상교육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교육통합은 큰 불만 없이 순조롭고 일관성 있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