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대량학살 기록소 운영, 北인권 활동에 교훈”

캄보디아는 한국 사람들에게 앙코르와트 등 유명 유적지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1970년대 중반 끔찍한 대량 학살이 벌어졌던 사건 중의 하나인 킬링필드(Killing Fields)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폴 포트의 급진 크메르루주 공산정권의 200만 명에 대한 양민 학살은 잊고 싶은 뼈아픈 역사이지만 현재까지 당시 자행됐던 인권유린을 기록하는 보존소가 운영되고 있다. 북한에서 김정은 독재정권에 의해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캄보디아 기록보존소 (Documentation Centre of Cambodia: DC Cam)는 1994년 미국의회가 캄보디아 대량학살법을 통과시키고 예일대 캄보디아 대량학살 프로그램에 지원하면서 시작됐다. 1997년 1월 이 프로그램으로 캄보디아 현지인들로 구성된 독립된 단체가 설립됐고, 현재는 캄보디아 정부와 해외 단체들과 협력하여 킬링필드 대량 학살에 대한 조사, 연구, 그리고 역사교육 자료를 만드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 북한 주민의 인권증진을 위해 발의된 북한인권법이 10년째 계류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데일리NK는 최근 한국을 방문한 다라 반탄(Peoudara Vanthan) DC Cam 사무국장을 만나 캄보디아 기록보존소에 대해 들어봤다. 다라 사무국장은 1996년 기록보존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을 시작해 정식 직원이 됐고 현재는 팀 리더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다음은 다라 반탄(Peoudara Vanthan) 캄보디아 기록보존소 사무국장 인터뷰 전문]


-한국에 방문한 이유가 있습니까?


석경화 미국 국제민주주의 연구소(NDI) 한국 사무소 대표가 한국에서 북한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들에게 DC Cam의 조사 활동 경험을 공유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방문하게 됐습니다.


-DC Cam은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독재정권 시절 대량학살과 관련한 조사뿐 아니라 피해자들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자료조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피해자들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저희는 피해자들에 대해 기록하는 작업들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아픈 상처를 들어 줄 사람이 있고, 그들의 아픔을 얘기할 수 있고, 대변해 줄 수 있다는 자체가 위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DC Cam이 하는 일은 한국에서 미래 통일시대에 사회 갈등 해소를 위해서도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런 자료조사 방법만으로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과거 있었던 그런 참상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잊어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만행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없이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없죠.


-그러면 지금까지 작업한 문서들이나 기록들이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데 어떻게 사용 되나요?


피해자 사례와 크메르루주 독제체제의 만행들은 보고서로 만들어져 정부 정책을 만드는 데 사용되고 또 영화, 사진자료들과 인터뷰를 통해 킬링필드 맵(map)도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더 많은 연구 및 조사에 사용됩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지금 크메르루주 유엔특별재판소(ECCC)에 저희가 조사한 자료들을 보낸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왜 유엔 같은 국제기구가 재판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되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국제적 행동이 상처 받은 캄보디아를 치료하는 데 정말로 기여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국제 재판소는 모든 것을 다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떤 면에서 이러한 국제 형사재판 과정이 사람들이 크메르루주 독재 체제에서 사람들이 경험했던 고통과, 아픔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DC Cam이 처음 시작할 때 미국 국무부에서도 지원을 받았고, 예일 대학교에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독립적인 단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으면서도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단체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1997년에 DC Cam이 독립할 때 예일 대학교에서 기금을 지원 받으면서 목표했던 것들보다 더 많은 피해자들과 인터뷰를 했고 더 많이 알렸고, 또 더 많은 프로젝트를 실행했습니다. 저희가 더 많은 성과물들을 만들면서 더 발전하게 됐습니다.


-DC Cam은 캄보디아 정부와 굉장히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 단체 활동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정부와 그렇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지 경험을 소개해 주시죠.


일반적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은 정부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편견 같은 것이 있죠. 하지만 이런 일들은 정부의 도움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를 인터뷰할 때나 혹은 관계된 더 많은 자료들을 얻으려고 할 때 지방 관료들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국제특별재판 조사 같은 것도 이러한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죠. 이런 상황에 따라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했고 이에 따라 정부도 저희의 활동에 교육 센터를 만들어서 연구하고 인권교육에 도움을 줬습니다.


-그러면 캄보디아 정부는 과거에 대량학살과 인권유린 등의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교육에 지원을 많이 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현재 캄보디아 모든 대학교들에서 전공에 상관없이 학위를 받으려면 의무적으로 크메르루주 독재시대의 역사 과목을 1학년 때 수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교육부에서는 모든 학교 교과서에 과거 역사에 대한 내용들이 통합되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언급한 정부의 정책들이 법으로 만들어졌나요? 


그런 입법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 정부 관계자들이 과거에 크메르루주 시기 가해자들을 제소하기 위한 조사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많은 북한관련 단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체들이 정부도움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민간의 지원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 상황을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정부는 지원해야 합니다. 자료화 작업은 오랜 기간의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재정적이든 정치적이든 지원이 있어야 이런 자료화라는 공통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그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조치들이 있어야 합니다.
 
-법을 만들어서 지원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법을 만들어서 정부가 단체들을 지원하는 것이 단체 활동에 중요하다고 보시나요?


원칙적으로는 법이 만들어져야 정부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죠, 정부는 단체들이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지원해야 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캄보디아와 한국 사이에 북한이 아직 존재하고 크메르루주 독재는 더 이상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한국의 정치 구조적인 면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어떤 쪽은 북한을 자극하고 싶어 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어떤 시기가 도래했을 때 행동할 수 있겠죠.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다고 해도 준비를 해야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북한과 캄보디아는 서로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문서화 작업을 1995년부터 했습니다. 이런 작업을 위한 준비와 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왜 1995년부터 시작했죠? 크메르 독재는 1979년에 붕괴 됐는데 말이죠.


크메르루주 시기에 저는 3, 4살 밖에 안됐습니다. DC Cam을 알기 전까지는 몰랐죠, 여기에 와서 배우면서 점차 알게 됐습니다.


-크메르루주 체제 당시에 나이가 아주 어린 나이었다고 했는데요. 한국 젊은 사람들은 북한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잃어 가고 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참혹했던 과거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교육밖엔 없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들의 과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그런 법적인 조사를 통해서 생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크메르루주 독재가 정말로 존재했고 정말로 잔인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더 공부하게 되고 더 연구하고 조사하게 됩니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언급했고 또 캄보디아에서 대학생들이 대량학살에 관련된 것들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했는데요. 그래서 학교들에 교과서나 관련 자료들을 보내는 일을 했는데 최근에 다른 어떤 일들을 한 것이 있나요?


저희는 역사 교과서나 혹은 교육 안내 책자를 만듭니다. 그리고 크메르루주 독재에 대해 가르치는 교사들을 훈련시킵니다. 단지 복수나 증오를 불러내기 위한 교육이라기 보다 아시아에서 평화를 영구화하고 그런 참혹한 대량 학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교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개발한 교육 방법으로 전국적으로 거의 3000명의 교사들을 교육 시켰습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을 때 정부는 항상 협조적일 수만 없는데,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 경험했던 어려움이나 장애 같은 것들이 있었나요?


큰 어려움을 없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과거를 더 생생하게 기록하여 정의를 위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목표에 있어 명확성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을 치유하고 사회의 통합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교사를 훈련시키는데 어떻게 충분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나요?


교육부와 협력한 것도 있고 다른 외국 단체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최근 국제민주주의연구소(NDI)에서 지원을 받았고 미국평화연구소(USIP)에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 벨기에나 다른 나라들에서도 지원을 받았습니다.


-혹시 재정 지원을 외국에서 받는 것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가끔 북한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이 외국이나 미국에서 재정 지원을 받는 것 때문에 어떤 정치적 단체들한테 비판을 받기도합니다.


저는 외국에서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량 학살이나 전쟁 범죄 같은 것은 캄보디아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에게 그리고 모든 나라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인간애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국제단체들이 이런 문제들을 예방하기 위해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캄보디아 정부와 킬링필드 유엔특별재판 조사에서 누가 처벌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합의를 이루게 되었나요? 아주 복잡한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북한의 인권 유린자들의 처벌 등 아주 민감한 문제들이거든요. 


많은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합의를 이루기 위해 아마도 10년은 걸렸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킬링필드 당시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동참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을 수도 있고 캄보디아 정부도 좋아하지 않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두 쪽이 모두 같은 이유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캄보디아에 평화와 사회 통합, 그리고 국제적인 기준에 맞추기 위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크메르루주 통치시기에 있었던 독재자들은 대부분은 죽었거나 처형당했고 크메르루주 시대에 다른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처벌 받은 사람은 10명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