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광복’은 1948년 건국 뜻해…’單政’ 최선 선택”

이영훈(李榮薰.62) 서울대 교수에게는 항상 양 극단의 평가가 따라다녔다. 한 국내 유명 언론인은 그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학자다운 학자라고 말했다. 반면, 대표적인 역사소설가로 꼽히는 문인은 그를 일본인보다 더 친일(親日) 인사라는 평을 했다. 


시골 마을창고와 장롱에서 찾아낸 문서와 지도를 통해 조선시대 후기와 일제 치하 경제사를 실증적으로 고증했지만, 민족담론으로 충만한 우리 학계는 ‘식민지 개발론’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연구 행보를 폄하했다.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대한민국 이야기, 대안교과서와 잡지에 기고한 소(少)논문에 이르기까지 저작마다 세상의 일단은 그와 불화(不和)했다.


14일 서울대 교정에서 만난 이 교수는 “학자가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두려움을 가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지난 10년간 독서와 탐구의 결과라며 최근 내놓은 책이 바로 ‘대한민국 역사’이다. 조선시대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로, 다시 해방 전후에서 현대사 전반으로 확장됐다. 그는 “조선시대 후기와 일제 강점기를 연구했기 때문에 한국 현대사를 문명의 전환과 도약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역사는 교보문고에서 벌써 화제의 책이 됐다. 책 제목이 왜 대한민국 역사냐고 묻자  ‘그런 제목을 단 책이 없어서’라는 다소 허무한 답변이 돌아왔다. 책을 쓰는데 있어서 젊은 시절 고(故) 김근태 전(前) 의원의 지도로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김문수 경기지사의 ‘우리 젊은이들이 자긍심과 애국심으로 공감할만한 현대사 책이 없다’는 하소연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막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해방 직후에 대해 외세개입과 통일국가 실패라는 회한의 통념을 거부하고 자유민주주의 씨앗을 뿌려 미래의 통일과제를 준비한 훌륭한 결단이었다고 말한다. 약 한 시간 반의 인터뷰는 시종 팽팽했다. 따라서 필자의 첨삭이나 해석이 독자들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릴 염려가 들었다. 있는 그대로 전달이라는 의미를 살려 문답으로 처리한다.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는 8·15 광복절을 일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한 날로 알고 있다. 일본 천왕의 항복선언일 말이다. 그런데 이 교수는 광복절의 본래 의미는 독립의 완성을 의미한 대한민국 건국을 기념한 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잘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간 게 58년이다. 광복절에 대한 기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정인보 선생이 쓴 광복절 노래 가사에도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춘다’는 소절이 나오는데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1946년이나 1947년 삼일절 기념식 연설 내용을 보면 이승만이나 김구 선생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나와 모두 ‘조국 광복을 위해 매진하자’고 말을 했다. 그러니까 1948년 8월 15일까지는 모두들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합시다고 했다. 이것은 조국 광복이 건국을 통해 완성된다는 의미였다.
 
1949년 9월 광복절을 제정했을 때는 사실 우리가 드디어 ‘건국을 통해 독립했다’는 뜻이었다. 독립기념일의 동의어로 광복절이 만들어 졌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설명해도 우리 사회 좌우 인사 모두들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아주 이름 있는 우파의 대표적인 지식인들도 해방과 광복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해방은 일제로부터 벗어난 것이고, 광복은 건국 독립이다’고 얘길 해도 구분을 못한다. 여기에는 반일민족주의가 깊게 깔려있다.


-2008년 광복절에 건국60주년 행사가 있었다. 당시 야당과 좌파 진영은 정부 행사에 불참하는 대신 백범기념관에서 행사를 가지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것만 봐도 건국에 대한 국민의 일치된 견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상하이 임시정부는 공인된 정부가 아니었다. 망명정부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해서 정부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런 말을 하면 벌 때처럼 일어나는데, 사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도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임시정부가 있었다.


이 세 개가 통합된 통합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했다. 임시정부에는 여러 사람들이 큰 뜻을 가지고 모이게 되는데 이동영(李東寧)으로 대표되는 해외 공산주의자,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자, 안창호로 대표로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모였다. 그러나 여러 세력이 모이다 보니 곧바로 분열이 일어난다. 1925년이 되면 김구를 중심으로 그의 식솔들로 구성된 한 100여 명의 단체에 불과하게 된다.


-독립 운동가들과 식민지 민중을 대변하는 망명정부로 볼 수 있지 않은가?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적 승인인데 임시정부는 공인받지 못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업적이 크다는 점과 별개의 문제다. 국가가 성립하기엔 여러 가지 요건이 있고 당시 여러 독립운동세력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상해 임시정부를 대표성 있는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해방 당시에도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임시정부 출신들도 우리가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1980년대에 들어와 임시정부와 계보를 갖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공로를 확대하기 위해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제헌헌법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제헌헌법에서 강조한 것은 삼일운동의 독립정신이다. 87년 헌법 개정 당시 민정당의 이종찬, 민주당의 이중재, 고려대 총장을 한 김준엽 씨 등이 타협안을 만든 것이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승만도 일제 패망이 다가오자 임시정부를 인정해야 된다는 주장을 했는데.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일제 통치 집단을 향해 분연히 활동한 정신이 있다. 다만, 이것이 역사적인 측면에서 건국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자체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공로를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1987년 헌법 제정 이후 우리 머리에는 임시정부가 건국이라는 기억 체계가 작동하게 됐다.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임시정부를 포함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의식을 자각시키기 위해 노력한 분들, 근대 문명의 실력을 닦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국내에서 많이 성장한 근대 문명세력도 있다. 이것이 삼일독립정신이다. 삼일독립정신이 국내에선 근대문명실력 양성으로 나타나고 해외에서는 자유민주주의 독립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두개가 합쳐져서 대한민국 건국 세력을 이룬 것이지 어느 특정한 세력 하나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독점할 수는 없다.


식민시기에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무릅쓰고 근대문명의 실력을 양성한 그런 성과가 정리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성장은 불가능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안팎으로 골고루 봐야한다.


-그 분들은 해외 독립 운동가들과 달리 일제와 타협한 측면에서 역사적인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다고 보는 것 아닌가?
 
국내에서 성장한 근대 문명세력은 일제가 양성한 것이 아니다. 일제가 타고 온 서양문물이 양성했다고 봐야 더 정확하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를 이용해 한국의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성취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이후 자유와 인권의 이념으로 근대적인 국가를 세우는데 크게 일조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정치철학으로 통합된 사회다. 충효 등과 같은 인간 윤리로 통합된 성리학의 사회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런 윤리로 태어난 국가가 아니다. 만약 그런 윤리가 진보적이었다면 독립 후 조선시대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인권이라는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훨씬 필요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즉 사적권리의 주체로서 개인이라는 원리를 가지고 태어난 새로운 나라이다. 잃었던 주권을 되찾았지만, 우리가 단순히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을 가진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싹이 틀 수 있었던 것은 해외 독립운동가와 국내 문명세력뿐만 아니라 미국의 역할도 컸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물론 중요한 배경이다. 미국이라는 큰 세계 중심국이 한반도 남쪽에 상륙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었다. 미국이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상륙시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제국주의를 해체했고 그리고 한반도를 중국과 소련에 넘겨줄 수 없다는 정책에 따라서 한반도에 미국 군대를 상륙시켰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승리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도 있지만 자유와 인권을 위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한 세력은 국내에서 정치적 권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국내 실력 양성세력은 자유와 인권에 기초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데 큰 힘이 됐다. 식민지 시대에 일제의 억압과 차별 하에서도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성립했다. 이들을 모두 자세히 들여다보자는 것이 내 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어느 한 외국이나 세력이 역사적 역할을 독점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해방 후 분단 과정을 우리는 가장 크게 외세 문제로 간주한다. 그러나 분단을 회피할 내부적 통합의 힘도 그만큼 약했다는 뜻도 될 수 있는데.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연구하지 않았다면 이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분단은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 분단은 1948년 8월 15일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다. 이미 분단은 우리 역사 속에 내재된 것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역사에서 사라진 왕조의 예는 다른 나라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자칭 왕족으로 칭하는 사람이 있고, 후손이 있었고 그런 인식이 있었다면 국민통합의 구심점도 되고 좋았을 것이다. 우리 의식에는 그런 흔적조차 없다. 그만큼 조선왕조는 철저하게 해체 됐다. 그건 왕조의 실패가 아니라 조선왕조를 지탱했던 성리학의 정치 철학이 그만큼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는데 그때 미국과 일본을 통해 근대 문명이 흘러들어 오고, 러시아 북쪽 국경에서는 공산주의가 흘러 들어왔다. 공산주의 이념은 독립운동세력과 결합을 하면서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민족사회에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근대 문명 세력이 형성되고, 한쪽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형성됐다. 물론 더 많은 민초들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정치 철학이나 사회윤리 속에서 삶을 유지했다.


민족이 삼 중층적으로 분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분단은 결코 48년 당시의 사건이 아니다. 이미 18, 19 세기를 거쳐서 20세기의 조선왕조의 멸망과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소위 분단이 내재돼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없었더라도 해방이후에 어떤 독립국가가 세워졌을지라도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이 이루어 진 것이다. 배후세력까지 등장한 상황에선 통일을 이룰 방법이 사실상 없었다.


-이 교수는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에 근거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에 기초한다면 김구의 남북통합 노력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 탁월하고 현실적인 전략이었다는 것인데.


통일을 이룰 현실적 방법이 없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의 현실이나 정치의 냉엄한 논리를 전제로 하고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민족의 대계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이승만 박사였다.


북한에서 소련군과 공산주의 세력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데 저들과 대화를 통해서 좌우합작의 형태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이 박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분이니까. 그런 신념하에 세운 것이 대한민국이었고, 지난 60년간 경제발전 민주주의가 성취가 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구 선생의 민족주의적 통일노력이 과대평가됐다는 것인가?
 
김구 선생은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대안적 이념을 내세울 인물은 아니었다. 김구 선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이념적으로 대립될 때 민족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근데 사람들이 아직도 이승만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김구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민족주의라는 감성의 영역이 강하고, 자유와 인권이라는 개념이 낯설기 때문이 아닌가.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이게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혁명적인 이념이었는지, 이러한 이념에 기초해서 나라를 세운다는 사실이 얼마나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 민족주의 감정에서 통일 동맹을 주장한 김구 선생을 이승만 박사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게 아직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하나의 지적 굴레이다. 이런 지적 굴레와 한계를 벗지 못하는 이상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성취에 대한 공유, 향후 선진국 건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통일 독립도 불가능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