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드라마 ‘정도전’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

최근 종영된 KBS 사극 ‘정도전’이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북한 내부 소식통이 전해왔다. 함경남도의 한 소식통은 3일 데일리NK와의 통화에서 “요즘 정도전 알판(DVD)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인간생활의 재미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 내부에서 한국드라마에 대한 인기는 이제 일상의 단면이다. 특히 배우들의 발음 속도가 여유롭고 외래어가 없다는 점에서 역사극에 대한 중장년층의 선호도가 높다.

일반 드라마가 남한의 발전된 경제상황이나 현대식 가족관계를 보여주는 ‘비주얼 정보’로 북한 주민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면, 역사극은 등장 인물들의 갈등관계가 중심이 되는 ‘스토리’로 공감대를 넓혀 왔다.

‘대장금'(MBC)과 ‘태조왕건'(KBS) 등은 지금도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역사극이다.

그러나 소식통이 전하는 ‘정도전’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과거 유행했던 역사극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읽혀진다.

그는 우선 “원래 정도전은 고려를 배신한 반역자 무리의 한 명 정도로만 조선에서 알려져 있다”면서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정도전뿐 아니라 이성계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조선왕조(朝鮮王朝) 600년을 ‘반민족적 역사’로 규정한다. 김일성을 ‘항일민족운동의 지도자’로 포장하기 위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國權)을 넘긴 이씨(李氏) 왕조에 대한 부정이 필요조건이다. 

김일성이 내세웠던 ‘반일 반미 민족주의’ 프레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라의 정통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고조선·고구려·고려를 우월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른바 ‘대동강 문명’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대표하고 있으며, 이를 계승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확보한 인물이 김일성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 역사관에서 이성계의 조선왕조 창업은 ‘정변'(政變)으로 취급된다. 정몽주를 충신(忠臣)으로 묘사하는 북한 서적 <조선력사 일화집(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94)>에서는 이성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정변으로 모든 실권을 틀어쥔 리성계 일파가 고려왕조를 뒤집어 엎고 새 왕조를 세우기 위한 계획을 꾸며나가는데서 정몽주를 비롯한 몇명의 충신들이 장애로 되고 있었다”(308페이지)

북한의 초등중학교부터 시작되는 조선시대 역사교육에서 이성계는 고구려 영토를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권력을 훔친 역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실제로 함경남도 함흥시 흥덕구역에는 이성계가 성장기와 퇴위(退位) 후 노년기를 보냈던 궁전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북한당국은 이를 문화재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개성 선죽교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로 지정 관리되어 방북하는 남한 인사들의 관광코스로 활용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소식통은 “우리나라에서 이성계, 이완용, 이승만 등을 ‘이씨(李氏) 매국노’라고 교육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이성계를 역적으로 인식해왔다”면서 “하지만 ‘정도전’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정도전을 영웅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정도전이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는 이성계를 왕(王)으로 만들었으니, 그가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한국 드라마에 담긴 ‘사실적 허구성’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식통의 전언(傳言)은 꽤나 흥미롭게 들린다. ‘수령-당-대중 통일체’라는 도식적인 프로파간다에만 익숙했던 북한 주민들이 ‘권력 내 역할 분담’이나 ‘올바른 군신(君臣)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 아니냐는 유추를 낳기 때문이다.

소식통은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최룡해나 황병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럼, 과연 우리나라에는 지금 정도전 같은 사람이 있냐, 최룡해도 아니고 황병서도 아닌데 그럼 누가 있냐, 이런 말이 오간다”고 덧붙였다.

북한 주민들의 정치불신이 반드시 최고지도자에게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 생전, 대량 아사와 경제난의 원인을 “간부들이 장군님(김정일)께 나라 실정이나 자기 잘못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탓”이라고 평가하는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드라마 ‘정도전’에는 오직 북한 사람들만 챙길 수 있는 알토란 같은 재미가 담겨있다. 실제 인물의 이름과 드라마 제목이 같다는 점이다. 옆 매대(賣臺) 상인에게 “정도전은 진짜 영웅 아니냐”고 물어볼 때, 지나가는 보안원(경찰)이 없는지 살필 이유가 전혀 없다.

소식통은 “정도전 이야기를 꺼내면 드라마를 본 사람은 어떤 것이든 반응을 내놓고, 안 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대꾸도 안한다”면서 “드라마를 본 사람들 끼리는 서로 ‘봤다’는 말할 필요도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드라마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재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중국의 불법 복제업자들을 통해 북한에 밀수된다. 위성방송 시청 설비와 컴퓨터 저장 장치를 이용해 드라마가 방영된 지 1, 2시간 후면 중국의 PC방에서 시청가능하다. 드라마가 종영되면 1, 2일 내에 전편이 담긴 불법 복제물이 팔려나간다. 북한으로 밀수되어 내부에서 퍼지는 시간은 최소 3일 정도로 추정된다.

이 소식통은 “나는 ‘정도전’ 마지막 회까지 모두 다 봤다”면서 “이미 ‘정도전’ 전집(全集)이 담겨있는 알판이 장마당 주변에서 유통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은 지난달 29일 종영(終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