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과 北, 김씨가 다해먹나?

▲ 평양에 설립한 완구공장과 필자 ⓒ데일리NK

평양 공장에 보낸 주문량을 넉넉잡고 한달이면 완성해 북경에서 만날 것을 기대했다. 그 자리에서 북한에서 만든 견본을 보고 다시 사업 상담을 하기로 했는데 두 달이 돼도 소식이 없다.전편으로 바로가기

몇 번의 독촉에도 묵묵부답이다. 하도 성의가 없어 몇 달이나 걸려 견본이 오는가 두고보자는 오기까지 생겼다. 경공업위원회와 사업을 하면 더 빠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의 딸인 김경희가 경공업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 직속 회사인 조선경공업제품수출입회사와 직접 연결되면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천리총회사에서는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았다.

평양을 찾아 고위직의 소개를 받은 노력 끝에 이 회사의 부사장(김명선)과 한판 승부를 걸었다. “부사장 동지와 나와 함께 이 나라 아이들을 위해 봉제완구를 책임지자! 내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계획대로만 할 수 있다면 완구공장을 하나 세우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견본을 만들어 제품에 대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귀국 즉시 견본 3,000개를 만들 분량을 가지고 평양으로 오겠다.”

마침 부사장이 두 달 후 중국 심양으로 출장을 간다기에 “잘 됐다. 중국 선양(심양)에서 만나자. 그 대신 중국출장 이전에 견본을 나에게 보내도록 하라. 그래야 견본 심사를 한 결과를 가지고 본격적인 상담을 할 수 있다. 심양의 봉제완구공장도 같이 구경하도록 하자.”

삼천리총회사에 보낸 견본은 3개월만에, 경공업에 보낸 견본은 1개월만에 결국 두 곳의 견본이 함께 북경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북경소재 북한 사무소(광명성과 삼천리회사가 공동으로 사무실 사용)에 가보니, “왜 견본을 삼천리 한곳에만 보내지 경공업까지 보냈느냐?” 고 나무라는 어조다.

만일 동무라면 3개월 걸리는 공장을 선택하겠는가? 1개월 걸리는 공장을 선택하겠는가? 입장을 바꿔 생각 해 보라고 충고해 줬다. 어디서 만들던 공화국에서 만드는 것이니 이왕이면 잘 할 수 있는 공장으로 선택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인 신분 속여가며 대북사업 협상장에 동석

견본은 각각 3,000개중 삼천리는 2,400개가 완성품으로 오고(600개는 공중 뜨고), 경공업에서는2,900여 개의 완성품(100여 개는 만들다 실패 한 것과 불량품을 그대로 보내옴)이 왔다.

신호상사 기술진과 견본검토를 한 결과 몇 가지만 교육시키면 되겠다는 결론이었다. 평양조선경공업수출입회사의 김명선 부사장으로부터 중국 심양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상부에 보고하였으니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가지고 토론하자는 의견이다. 나는 기술적인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받은 견본을 가지고 신호상사의 대북 팀장 김성구 상무와 함께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긴급히 심양으로 갔다.

당시 북한사람은 평양 정부의 허가 없이는 남한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홍콩지사에서 온 신호상사의 외국계 직원이라 속이고 옆에 안쳐만 놓고, 내가 의견을 물을 때만 대답하라고 지시했다. 4시간 동안 상담이 진행됐다.

나 혼자와 상담할 줄 알고 왔다가 3명이 되니 신경이 쓰이는지 불편한 눈치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분위기가 다소 풀렸다. 공교롭게도 나는 ‘김찬구’ ‘북한의 김명선’ 신호상사의 ‘김성구’ 모두 같은 김씨라 맘이 편했다. 필자가 ‘오나가나 김씨 판이구나. 남쪽도 김씨, 북쪽도 김씨가 나라를 휘두르고 있다’고 했다가 대판 쌈이 붙을 뻔했다. 역시 북한 지도자 이야기는 너무 민감했다.

심양에서 남북합작 완구공장 역사적 합의

신경전은 잠시 끝나고 역시 동족이기에 쉽게 풀렸다. 김성구 상무가 갑자기 김명선 부사장에게 “미국에서 오신 김찬구 사장님은 우리 큰형님입니다. 김찬구와 김성구는 같은 구 자 돌림이라 그러니 김명선 부사장도 우리 형제 합시다. 내가 나이 몇 살 어리니 형님이라고 부를 테니 우리 오늘부터 3형제 합시다. 그러니까 이 사업을 큰 형님과 작은 형님께서 책임지고 성공시키십시오.”

우리는 마치 사업이 다 된 것처럼 상담 분위기가 부드러워 마음이 뿌듯하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김명선은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나와 일찍이 주 폴란드 조선대사관에서 무역담당 서기관으로 오랫동안 근무 한 경험과 해외에서의 원만한 대인관계 때문에 마치 남한 사람과 상담하는 기분이었다. 생김새도 남한 사람 인상이다.

상담 다음날 우리는 일단 “임가공 계약서”를 몇 번의 수정을 거쳐 1995년 8월23일 중국 땅 심양에서 역사적인 합의 사인을 했다. 남북합작 완구공장 사업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그 때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후 몇 차례의 견본을 만들어 오면서 솜씨에 대해 인정하고 기계 설비를 설치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신호 측과 설비투자에 대한 상담이 잘돼 1차 투자 설비를 한국에서 특별 제작하되, 취급설명서와 주의 사항 등은 한글로 표시하고, 그 외에는 영문으로 표시하되 남한에서 제작했다는 표시가 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 기계제작에 들어갔다.

신호 이순국 회장의 특별지시라 일은 계획대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주문은 신호상사가 나를 통해 하면서 원 부자재를 100% 외상으로 해 주기로 약속도 했다. 귀국 즉시 기계발주며 제반 준비에 바쁜 중에서도 내 스스로가 완구기술을 정확히 배워가서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 완구공장에 가서 작업과정을 비디오에 담고 재단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을 세밀히 배우고, 중요한 과정의 하나인 제품검사 방법도 정확히 배웠다.

설비 이른 도착에 장소 마련 비상

시설기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기계공부도 단기완성으로 했다. 나는 기계나 전기 등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쉽게 배운다. 그 때는 한국에서 기술자를 평양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기술을 배워 북한에 가서 기술을 가르쳐야만 할 형편이었다.

기계주문에서부터 선적하여 평양도착까지 꼬박 6개월이 소요됐다. 그 기간 동안 수차례 평양을 드나들며 실제로 주문할 견본 3,000개를 만들어 오면서 기술 지도를 했다. 견본 제품에 대한 솜씨인정도 받고, 그 동안 실망 서러웠던 대북 사업에 새로운 활기를 되찾을 수가 있었다.

원래 약속대로 설비가 평양에 도착했는데 평양에서는 그 많은 기계가 약속대로 그렇게 빨리 오겠는가? 하는 생각에(한국 측 다른 사업가는 약속을 제대로 지킨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설비를 설치할 공장을 정하지도 않고 있다가 설비기계를 선적했다는 소식을 받고 그때서야 당과 이야기하여 공장 장소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경공업 측에서는 마땅한 건물을 결정하지 못해 설비를 창고에서 잠재우고 있었다. 평양에 가서 함께 여러 곳을 찾아 다녔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평양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30km 거리의 “룡성 담배공장” 구내에 2층짜리 독립 건물이 하나 있어서 가보니 마음에 든다. 여기로 결정하고 설비를 옮기고 기계 배치를 설계도면대로 정리하고 시운전하기까지 3주가 걸렸다.

공원들은 240명이 필요한데 1차로 160여명이 공장 정리하는데 동원되어 활기찬 모습으로 일단 시작은 된 거다. 부족한 공원은 노동당 동원국에서 며칠 안으로 나머지 80여명을 보내온다고 한다.

“미 제국주의(?) 나라에 살고 있는 김찬구입니다”

공장의 총책임자는 경공업의 김명선 부사장이 완구공장 사장으로 발령을 받고 정식으로 출발을 했다. 나의 직함은 완구회사 회장으로 공식화 하고 개업 날은 다과회를 열어 경공업 부부장, 교포 총국장, 기타 경공업관련 당 간부들로부터 수많은 축하객들이 모여 나를 환영하는 행사까지 했다. 가슴 뿌듯한 하루였고 이렇게 하여 북한 땅 평양에 제 1호의 봉제완구공장이 탄생한 것이다.

경공업제품수출입회사에서는 나름대로 화려한 행사를 준비하였고, 재미동포 김찬구 사장선생께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이렇게 훌륭한 완구공장을 차려 주신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열열히 환영한다는 흥분 섞인 중앙당 모 간부와 경공업 부부장의 환영사를 듣고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나는 환영사에 답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가장 싫어하고 원수같이 생각하고 있는 미 제국주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재미동포 김찬구 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살고는 있지만 나는 제국주의자도 미국 놈도 아닙니다. 여러분과 똑 같은 조선 사람입니다. 항상 만나보고 싶었던 여러 동지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보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 내 조국 조선 땅 평양에 완구공장 하나를 세웠습니다. 한 개가 두 개 되고, 두 개가 열 개 되고, 백 개의 공장이 될 수 있도록 여기에 오신 여러분들이 힘껏 도와주십시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 공장을 잘 돌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정성과 힘찬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앞으로 제가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꾸중을 해 주시고 잘하는 것이 있으면 잘 한다고 칭찬을 많이많이 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힘이 나서 더욱더 잘 할게 아닙니까. 저는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이곳 완구공장에 살면서 조선의 아이들과 외화벌이를 위해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나의 소원은 우리 완구공장에서 만드는 토끼 곰 강아지들을 공화국 전 아이들이 하나씩 가지고 놀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습니다.

또 이 공장에서 만드는 완구가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하여 외화를 많이 벌어 우리도 부자로 살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바쁘신 데도 이 자리에 훌륭하신 여러분들이 오셔서 축하 해주시고 저를 격려 해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히 여깁니다. 여러분! 저와 같이 일할 여러 동무들을 위해서 일 열심히 잘 해 달라고 박수 한번 힘차게 쳐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감격스러워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날 밤엔 선잠을 잤다.(계속)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