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천리길’ 88돌…보름간 김일성 ‘우상화’ 행군

3월 16일, 이날은 김일성이 12세 때인 1923년 ‘조국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 김형직의 뜻에 따라 만주의 팔도구에서 고향인 평양 만경대까지 14일 동안 걸어왔다는 ‘배움의 천리길’을 기념한 날이다.


‘배움의 천리길’ 88돌은 맞은 이날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기사를 통해 “열두살 어리신 나이에 민족과 겨레의 운명을 한 몸에 지니시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걸으신 14일간의 배움의 천리길은 조국과 인민을 위한 거룩한 장정이었다”며 ‘배움의 천리길’의 노정과 의의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북한은 1974년부터 각급 학교 및 조직별로 이 기간 ‘배움의 천리길 답사행군’을 15일간 실시하고 있다. 가을철에 답사행군을 하기도 한다. 하루 보통 50리(20km) 이상을 걷는다.


행군경로는 양강도 김형직군 김형직읍 포평에서 시작, 월탄리-화평-흑수-강계-성간-전천-고인-청운-희천-향산-구장-개천-만경대로 되어 있다. 답사행군은 중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고, 김일성이 항일운동 당시 입었다는 ‘항일복’을 입는다.


포평을 출발하기 전 과거 김일성이 떠나기 전에 할아버지 김보현으로부터 짚신 2켤레를 받아 떠난 것을 따라해 답사 숙영소(宿營所)에서 운동화 2켤레(국정가격으로 지불)를 받는다.


어린 학생들이기 때문에 장시간 걷는 것을 힘겨워하는데 그 때마다 김일성의 사상정신을 강조한다. 하루 행군을 마치고 숙영소에 도착하면 ‘충성의 좋은 일하기’ 차원에서 숙영소 주변의 사적관이나 김일성 동상 주변을 정리하고, 감상글도 남긴다. 행군할 때 규율을 어기면 사상비판 등 처벌도 따른다.


답사노정에 따라 4일을 행군하면 강계에 도착하게 된다. 이 때 숙영소 지도원은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체신소에 가서 전보를 치게 한다. 김일성이 강계에서 전보를 친 유래에 따른 ‘따라 배우기’ 차원이다.


학생들은 들뜬 마음에 체신소 전보 창구에 가 ‘강계에 무사히 도착’, ‘강계 무사히 도착’ 등의 문구를 적어 낸다. 어떤 학생들은 버릇없는 표현 같아 ‘강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라고 쓰기도 한다.


그러면 전보 창구에서는 ‘수령님께서 쓰셨던 그대로 쓰세요’라며 다시 돌려준다. ‘배움의 천리길’ 당시 돈이 부족했던 김일성은 팔도구에 있던 집에 ‘강계무사도착’이라는 여섯 글자만 전보를 쳤다.


소학교 때 배웠던 것을 기억하지 못해 자주 발생하는 사례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연락하는 전보에도 북한은 김일성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게 하는 것이다.


평안북도 향산에서 구장까지의 47리는 야간행군을 한다. 성인도 감당하기 어려운 야간행군을 어린 학생들에게 강요해 불만이지만 그렇다고 말 할 수는 없다.


행군 과정에 잠을 참지 못해 길가에 누워 자기도 해 사고가 발생하는 일도 잦다. 학생들은 잠을 참지 못하는 학생의 허리를 혁띠(혁대)로 묶어 잡고 가는 나름의 대책을 강구하기도 한다.


포평을 떠나 개천까지 800여리의 구간을 걸어온 답사대는 개천에서부터 기차로 평양으로 향한다. 개천에는 김일성이 신안주(新安州, 평안남도)를 거쳐 평양까지 타고 갔던 증기기관차가 사적물로 보관되어 있다.


평양에 도착하면 송신답사 숙영소에 짐을 풀고 주체사상탑, 개선문, 만수대 언덕 등을 답사하고 각자 자기 고장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우상화를 목적으로 김일성의 ‘배움의 천리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답사행군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