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도 한동작 수천 수만번 반복”

▲지난 2002년 아리랑 공연 연습에 열중인 북한 어린이들. 왼쪽은 배경대 카드섹션이고 오른쪽은 집단 체조를 연습하고 있는 어린이들ⓒ연합

“수만명의 어린 아이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 완성된 것이 아리랑 공연이다.”

평양에 거주하다 지난해 탈북한 이종만(45세·재중 탈북자) 씨는 2005년 아리랑 공연에 아들을 참가시킨 경험을 한숨을 섞어가며 털어놨다. 아들 성만(가명)군은 당시 여섯살로 평양시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이 씨는 당시 아리랑 공연 연습으로 혹사당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사회주의 우월성을 알리는 대집단체조에 어린 아들이 출연한다는 생각에 기뻤다고 한다. 그러나 탈북해 바깥 세상을 보면서 현재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만명을 동원해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는 아리랑 공연은 북한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아리랑 공연을 출연하면 명예롭게 생각할뿐 아니라 선물을 받기 위해 자진해서 참가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또한 “암암리에 행사조직 지도원의 으름장도 자식들을 참여시키게 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유로 많은 평양 주민들이 참여하지만 자식 있는 부모의 마음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씨는 “한 동작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반년 동안 밤낮없이 불려 다니는 고통은 어린나이에 견디기 힘든 고통일뿐 아니라 무엇보다 먹고 싶을 때 먹지 못하고 자고 싶은 때 자지 못하고 한 동작을 수천 수만번 반복해야 하는 고통은 겪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소회했다.

“성만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동작을 잘 익히지 못했다. 그래서 지도원의 윽박이 심했다. 성만이가 못하는 것이어서 지도원의 윽박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만이는 맞기도 하고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반복동작을 하게하는 ‘벌’을 받았다. 어린나이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당시 나는 알지 못했다.”

그는 무엇보다 “성만이가 하기 싫다고 몇번이고 불평했을 때 설득해 내보냈었던 것이 가장 후회된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탈북하면서 북한 사회와 중국사회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북한이 오직 김정일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사회라고 말했다.

이어 “아리랑을 보는 사람은 즐거울지 몰라도 내 자식이 사람이 아닌 기계처럼 이용당한다는 생각을 해봐라, 남한에서 아리랑 공연 행사를 본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수만명의 어린이들이 체제 선전에 이용당한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 전문]

-언제 탈북했나?

2005년 겨울에 혼자 탈북했다. 평양에서 풍족하게 살지 못했지만 굶지 않고 살만했다. 그러나 2005년 겨울에 탈북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가족들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말할 수 없다. 내가 탈북한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들은 평양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아직까지 가족 소식을 듣지 못했다.

-현재 북한 사회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꿨나?

중국에서 1년 넘게 지내면서 북한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꿨다. 특히 TV와 중국 시장에서 인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과 비교를 하게 됐다. 이곳 사람들이 흔히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가 뭔지 알게 되면서 북한이라는 나라가 정말로 비정상적인 나라라는 것을 알게됐다.

-아리랑 공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2005년 아리랑 공연에 평양주민들 상당수가 참여하고 싶어 했다. 2002년에 상상도 못할 선물을 줬기 때문이다. 나또한 그런 기대가 있었고 한편으로는 당에서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북한은 김정일 개인의 국가이기 때문에 수만명을 동원해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아리랑 공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리랑 공연 출연자중 대부분이 어린이들이다. 아리랑 공연은 수만명의 어린 아이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 완성된 것이다. 아들 성만이도 아리랑 공연에 출연했다.

-북한이 아리랑 공연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북한에서는 6~70년대부터 집단체조가 존재했다. 주로 공화국 창건일이나 당창건기념일 때 진행하던 것이 점점 발전하면서 그 규모나 내용이 방대해지고 4.15 김일성 생일에도 개최됐다.

지금과 같은 아리랑 공연은 2000년 10월 10일(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에 열렸던 대집단체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 시작이다.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 열리기 전에는 평양시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서 수 십 차례 참가했어야 할 정도로 집단체조가 흔했지만 국제적 관심은 물론 백성들 사이에 관심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 당창건 55주년 경축 ‘백전백승 조선노동당’ 때부터는 중∙대학생 위주로 하던 집단체조의 틀을 벗어나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배합시킴으로써 유치원 꼬마들부터 중학생, 대학생, 예술인, 심지어 군인들까지 참가하는 말 그대로 대(大)집단체조로 탈바꿈 했다.

하지만 당시는 90년대 말 대량아사 사태를 겪은 지 얼마 안됐던 시절이라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죽물을 마시고 훈련에 참가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고, 돈과 권력 있는 사람들의 자식들은 모두 참가대상에서 제외됐다.

-주민들이 공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뭔가?

그런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관람한 김정일이 공연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전례가 없던 큰 선물을 참가자들에게 베풀었다.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감격했다. 고난의 행군 막바지 시절 생활고에 찌들어 있던 평양시민들에게 새 이불과 새 그릇, 고급 당과류 들은 10년 만에 다시 만져보는 귀한 물건들이었다. 행사중간에 돈과 권력을 이용해 빠져나갔던 사람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이 행사에 크게 만족한 김정일은 2002년 4월 15일 김일성 탄생 90주년을 맞아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재현하여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결합해 새로운 작품 ‘태양의 노래’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는 이미 집단체조에 대한 일반 주민들의 인식이 180도 달라졌던 때라 너도 나도 행사 참가를 희망했다. 이 행사의 훈련은 2001년 4월부터 시작되었는데, 7월쯤에 공연제목을 ‘아리랑’으로 바꾸라는 김정일의 방침이 내려와 명칭을 바꿨다.

-아들은 아리랑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나?

아리랑 공연은 체조대와 배경대로 나뉜다. 배경대에서는 5·1경기장 중심부에서 카드섹션을 한다. 성만이는 운동장에서 집단체조를 하는 체조대 소속이었다. 성만이는 평양시 한 유치원에 다녔다. 이외 평양방직공장유치원과 창광 유치원생, 평안북도 신의주본부유치원생들도 출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성만이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아리랑 공연 ‘어린이 장(章)’에 출연했다. 어린이 장 중 ‘활짝 웃어라’에서 줄넘기 넘기 등 다채로운 재주를 펼쳤다.

-아들의 훈련 과정은 어땠나?

한 6개월 정도는 오전에 수업하고 오후에 연습하지만 행사를 보름 정도 앞두게 되면 하루 종일 강도 높은 훈련을 한다. 이때 모든 수업은 하지 않고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8시간동안 맹연습을 하게 된다. 이때 아들이 가장 힘들어 했다. 부모 곁에서 응석을 부려야할 아이들이 반년 가까이 혹독한 훈련을 해야 했다.

성만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동작을 잘 익히지 못했다. 아이들은 줄넘기, 돌림틀(훌라후프) 돌리기, 텀블링, 탑쌓기 등을 진행해야 했다. 줄넘기는 출연하는 모든 어린이들이 해야 하는데 한 50여명은 대열의 맨 앞에서 어른도 하기 어려운 곡예와 같은 줄넘기를 해야 한다. 여러명이 줄을 넘을 수 있는 3-4m 길이의 긴 줄넘기가 돌려지고 그 안에서 작은 줄넘기를 아주 빨리 넘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바퀴 정도 회전하는데 줄에 걸리지 않게 줄넘기를 넘어야 한다.

▲아리랑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은 반년 가까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연합

성만이는 줄넘기를 잘 넘지 못했다. 이 때 지도원의 윽박이 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은 욕설을 듣고 동작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반복동작을 하게하는 ‘벌’을 받았다.

어린나이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당시 나는 알지 못했다. 솔직히 당에서 하는 일을 따르지 않았다가 무슨일을 당할지 모를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아들은 처음에는 집단줄넘기에도 참가했지만, 결국 일반 대열 속에서 작은 줄넘기 하나를 넘는 역할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성만이를 혼내기도하고 설득하면서 끝까지 참여하게 했던 때가 가장 후회된다.

-아리랑 공연에 참석하는 다른 아이들의 고통도 심한가?

다른 아이들도 고통은 마찬가지다. 보통 아리랑에 출연하는 아이들은 쉼없이 움직이며,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이런 과정에서 골절상을 입는 등 다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간단한 응급처치만 하고 훈련에 빠지면 안된다. 특히 기계체조를 하는 아이들은 몇층씩 인간탑을 쌓아야 할 때도 있기 때문에 탈골이나 골절상을 많이 입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랑 공연을 앞두고는 저녁 늦게까지 연습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겨울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해야 하는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 고통의 수배에 달할 것이다. 옆집 아이가 동상에 걸려 부모가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먹을 것은 충분히 먹여주나?

보통 점심은 도시락을 먹는데 저녁식사는 간식으로 떼우는 경우가 많다. 연습 중간에 간식으로 빵이나 당과류가 지급된다. 북한 아이들은 과자를 먹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당과류를 먹는 것이 아리랑 공연 출연하면서 유일한 기쁨이다.

행사 참가자들에게 본공연 6개월 전부터 훈련시간에 ‘UN과자’라고 부르는 과자를 간식으로 나눠 주었다. 매일 1인당 10개정도 배급됐는데 그 모양과 맛이 특이 했다.

그 과자는 가로, 세로 약 5cm정도의 정사각형 모양인데 다른 과자처럼 달지도 않고 특별한 맛도 없었다. 과자의 가운데에는 ‘WFP’라는 영어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이 과자는 예전부터 장마당에서 500g당 조선 돈 800~1,000원 가격으로 거래됐다. 그런데 2005년 아리랑 훈련기간에 참가자들에게 지급됐다.

▲2005년 제 2회 아리랑 공연이 열렸다.ⓒ데일리NK

WFP가 ‘세계식량계획’이라는 UN단체라는 것쯤은 평양시민이면 대부분 다 알고 있다. 이 과자는 분명 UN에서 북한에 원조를 준 것임이 틀림없다. UN에서 우리에게 원조를 줬다면 배고플 때 밥 대신 먹으라고 보내 준 것일 텐데, 이런 원조식품이 어떻게 아리랑 같은 국가행사에 대량으로 풀리고 있다.

-유엔에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리랑같은 국가적 행사에는 평양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 사절과 손님들이 모두 초청된다. 5월 1일 경기장 1등석은 외국 손님들만 앉을 수 있다. 그 외국 손님들 중에는 분명히 UN의 간부들도 있었을 것이다. UN간부들은 조선정부가 유치원 꼬마들에게 UN에서 보내준 원조식량을 먹이면서 이토록 황당한 행사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인가?

-아이들 외에 중학생, 대학생, 일반인들의 공연 준비는 어떻게 하나?

10만명 가까이 참석하는 아리랑 공연에는 유치원생, 소학생, 중학생, 대학생은 낮에도 밤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훈련만 한다. 사회기업소들에 다니는 청춘남녀들과 가정주부들 역시 뙤약볕 속에서, 눈보라 속에서 동작 완성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다.

군인들 같은 경우 강건군관학교 학생들만 동원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건군관학교 학생들은 열병식이나 집단체조에서 조선 최고로 꼽힌다. 하지만 행사 준비도중 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냥 픽픽 쓰러지기도 한다.

-공연준비를 위해 조직편재를 따로 하나?

아리랑에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임시 조직들이 만들어 진다. 군대조직을 본 따서 중대, 대대, 연대 순으로 단위를 정하며, 정치분야와 행정분야의 조직들도 만들어진다. 매주 공연 준비에 성실하게 수행했는가 등을 점검하는 주생활총화가 진행된다. 매달 정치강연도 열려 아리랑 공연에 성실히 임할 것을 독려한다. 주생활총화에서는 아리랑 공연에 불성실하거나 불참한 사람들에게 모진 비판이 이어진다.

그리고 자기 순서가 오면 후방사업도 해야 한다. 후방사업은 아리랑 공연에 참여하는 10만명에게 간식 등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는 사업을 말한다.

가족들 또한 피곤하긴 마찬가지다. 시연회가 있는 날이나 실제 공연 기간에는 밤 12시에 서로 무리를 지어 걸어서 집이나 숙소,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부모들이 밤이면 거리 바닥에 나와 줄을 선다.

-후방사업에 대해 자세히 말해 달라

소대나 중대별로 소속 단위 사람들을 먹일 간식으로 꽈배기, 떡, 빵 등을 장만하는 것인데 한사람이 보통 30명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 크다.

여름에는 후방사업으로 얼음과자를 사다 날라야 할 때가 많고, 공연에 필요한 분장용 화장품을 마련하는 것도 참가자들을 압박에 시달리게 하는 주요 후방사업이다. 행사복을 모방한 훈련복도 참가자 스스로 사 입어야 하며, 신발도 자기 돈으로 사야한다.

-평양 주민들이 아리랑 공연에 동원된다는 말이 있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아리랑 관람권은 2005년 당시 2등석 500원, 3등석 300원이었다. 1등석은 당간부들, 국가 고위 간부들, 외국 사람들이 앉는 자리라 조선사람에게는 관람권을 팔지 않기 때문에 가격을 잘 모른다. 지방 사람들은 그나마 2등석이라도 손에 쥘 수 있지만, 평양시민들은 보통 3등석만 차려진다. 3등석은 배경대 바로 옆 구석진 자리라 배경대가 선보이는 카드섹션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림책을 들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만 보일 뿐이었다.

평양시민들에게는 좌석수를 채워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평양시당위원회에서부터 의무적으로 표가 내려온다. 소속 대학, 직장, 인민반에서 관람표를 받으면 여자는 치마저고리, 남자들은 화려한 셔츠의 양복차림을 하고 5월1일 경기장으로 가야한다.

5월 1일 경기장 마당에 들어서면 경기장 주변에 설치된 매대에서 먹을 것을 사기도 한다. 보통 공연은 입장은 6시부터 하는데 공연이 끝나는 시간은 10시~11시다. 공연이 끝나면 버스나 괘도전차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집에까지 가노라면 새벽 2시~3시가 된다.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헐어서 먹을 것을 사들고 경기장에 입장한다.

-공연을 보는 평양 시민들의 반응은 어떤가?

경기장의 3등석은 의자가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데 등받이도 없다.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가 차고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가 쑤신다. 경기장에 입장해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공연이 시작되는데 아무리 재미있는 것이라도 여러 번을 보면 그 만큼 감흥이 줄어든다. 하물며 2000년부터 시작해서 2005년까지 수 십 번에 걸쳐 그것도 옆면만 보게 되니 무슨 감흥이 생기겠는가? 심지어 조는 사람들도 있다.

정작 공연이 시작되면 행사종결 후 신속히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문제를 생각하느라 골치가 아파진다. 10만 명이 넘는 인파 속에서 헤매게 되면 언제 집에 도착할지 기약이 없어진다. 그래서 마지막 장(章 )이 시작되면 슬금슬금 관람석을 몰래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공연이 끝나기 전에 달아난 것이 알려지면 또 소속단위의 비판무대에 서야 한다. 어쨌든 잔머리를 굴려 몰래 관람석을 빠져나와 보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나보다 먼저 나와 앞서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는 길목마다 늘어서 있는 규찰대의 눈을 피해 달아나야 한다.

-아리랑 공연에 출연하면 선물을 준다고 들었는데

▲2005년 아리랑 공연에 동원된 평양 주민들. 동원되는 시민들은 연간 수백만명에 이른다.ⓒ데일리NK

솔직히 아리랑 공연에 연습에 고생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공연이 끝나고 나면 받게 될 선물을 기다렸던 것이 사실이다. 2002년 아리랑 공연이 끝나자 행사 참석자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에게 아리랑 천연색(칼라) TV 1대, 아리랑 가방 1개, 아리랑 노트 10권, 만년필 1계, 시계 1개 등 선물들이 주어졌다.

이때 나누어준 TV는 중국 업체 창홍(ChangHong)에서 만든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아리랑 TV’라고 불렀다. 당시 평양 1백화점에서 조선 돈 15만원 이상에 팔렸다. 아리랑 공연 덕분에 TV, 이불, 그릇세트 등 결혼 밑천을 다 장만했다고 자랑하는 처녀들도 있었다. 내가 아는 집은 아버지는 행사지도원으로, 어머니와 아들은 공연 출연자로, 아들은 후방사업 담당으로 아리랑에 참석에 일거에 4대의 천연색 TV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아리랑 공연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또 다른 충격에 빠지게 됐다. 평양 시민들은 2002년에 천연색 TV가 나왔으니 이번에는 ‘스리랑 극동기(냉장고)’나 ‘TV녹화기’를 기대했으나 2005년 선물은 ‘재봉기’에 그쳤다. 지금 북한 주민들은 각자 개성에 따라 옷을 만들어 입을 옷감을 마련할 형편이 안된다. 부유층은 중국과 일본의 최신 유행에 따른 옷들을 골라 입는다. 그러니 재봉기는 있으나 마나한 장식물 밖에 되지 않는다. 실망감에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들도 많았다.

결국 ‘아리랑 재봉기’는 평양의 장마당으로 내몰리게 됐다. ‘선물’은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지만 생활이 궁한 백성들은 너도 나도 몰래 장마당에 내다 팔았다. 지금도 평양의 장마당에서는 ‘아리랑 재봉기’가 5~6만원에 팔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