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환장해도 14살 아이를 팔아먹나”

▲ 중국의 탈북여성(기사 내용과 무관) ⓒ데일리NK

“아무리 돈에 환장했다고 해도 어떻게 14살 된 애를 팔아먹을 수 있느냐. 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탈북 여성들을 만나며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그들의 인신매매 경험을 듣는 순간이었다.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을 정도의 고통스런 경험을 온몸으로 겪어낸 그들 앞에 그 어떤 동정이나 위로의 말도 섣불리 뱉을 수 없었다.

서러운 이 땅에서 내 눈물 알아줄 이 없으니 다시는 울지 않겠다는 다짐도 수없이 했다고 한다. 이제는 험한 일에도 이골이 나 웬만한 일로는 눈물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담담히 얘기를 이어 나가다가도 이 대목이 되면 탈북여성들 어느 하나 눈물 쏟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여자라서, 그것도 조선의 여자라서 겪어야 했던 고통의 상처들은 시간이 흘러도 아물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새벽마다 식은땀에 젖는다는 이들의 운명은 과연 누구의 탓으로 돌릴까?

[中 탈북여성 현지르포①-上]

2007 北여성의 삶…”생계 90% 책임져”

[中 탈북여성 현지르포①-下]

“남녀 차별보다 돈 차별이 더 서럽다”

제목 없음

김영순(23세)-2006년 탈북, 평양 소재 대학 중퇴

안미란(43세)-2003년 탈북, 함북 회령 출신, 인신매매 피해

최경자(35세)-1997년 탈북, 함남 함흥 출신, 조선족 남편과 결혼

이은희(39세)-2000년 탈북, 평북 신의주 출신, 달리기 장사

강순녀(40세)-2002년 탈북, 양강도 혜산 출신, 인신매매 피해


◆조직화된 인신매매…”피해 경험 여성 2만명”=중국에서 활동하는 탈북자 지원 활동가들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 중 80~90%는 여성이라고 한다. 또 그 중 70~80%는 인신매매 피해자라고 한다. 현재 중국 내 탈북자를 3만명으로 봤을 때, 약 2만명 정도가 중국에서 인신매매 경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인신매매가 기승을 부리는 곳은 함경북도 무산, 회령, 삼봉, 양강도 혜산, 자강도 만포 등 북-중 국경지역의 도시들이다. 과거에는 여성이 단독으로 강을 넘을 경우 일부 중국인들이 이들을 인신매매 조직에 넘기는 사례가 많았다면, 지금은 북한과 중국의 인신매매 조직들 간 연계망이 구축되어 있다.

북한 쪽 브로커는 모집책 역할을 한다. 여성들에게 ‘중국에 가면 식당일, 가정부, 농촌 품팔이 등을 할 수 있다. 일을 마치고 오면 우리에게 사례비 명목으로 얼마 정도 나눠주면 된다’는 식으로 신뢰를 준다. 대신에 도강비(강을 건너는 비용)는 여성들이 부담해야 하는데, 금액은 인민폐로 500위안~700위안 정도 된다.

이 여성들은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의 지안(集安), 창바이(長白), 싼허(三合), 카이산툰(開山屯), 투먼(圖們) 등지의 판매책들에게 넘겨진다.

시골 농가에 거점을 두고 있는 이들은 1차 브로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차 브로커들은 중국 내 범죄조직과 결탁해 탈북 여성들을 동북3성은 물론 베이징(北京)과 시안(西安)을 지나 내몽골 지역까지 팔아 넘긴다.

중국에 넘어와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북한 여성들은 강제 구금과 협박 상태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의 여성은 돈을 벌러 온 것이지 결혼(강제 혼인ㆍ사실혼 형태)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반항하지만 ‘공안에 넘기겠다’는 식의 협박과 ‘돈을 벌 수 있다’는 설득에 못이겨 팔려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브로커들에게 1차 강간이나 윤간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협상 과정 없이 바로 택시에 태워져 농촌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브로커들과 짜고 팔려간 집에서 의도적으로 도망치는 탈북 여성들도 생겨났다. 일명 ‘뜀뛰기’ 라고 불린다. 중국인 배우자와 결혼을 한 뒤 한, 두 달 있다가 소개비를 챙겨 도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받은 소개는 탈북여성과 브로커가 절반씩 나누게 된다.

팔려가는 가격은 나이와 미모의 수준에 달라진다. 인민폐 3,000위안(34만원)~12,000위안(136만원) 정도에서 거래되는데, 옌지(延吉)에서 거리가 멀수록 비싸진다.

이들이 팔려가는 농촌의 남자들은 중국 사회에서도 하층민에 속한다. 지식이나 교육 수준이 낮은 조선족이거나 가난하고 나이가 많은 한족 혹은 장애인들도 포함돼 있다.

안미란 씨는 “남편이 빚을 많이 져서 쫓겨 오게 됐다. 친척 언니와 같이 개산둔(카이산툰)으로 넘어 왔는데 자식도 있었기 때문에, 3달간 돈만 벌고 가려고 했다. 처음에는 조선족이 좋은 자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연길(옌지)에 가보니 속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친척들을 내세워서 언니와 나를 3000위안에 팔았다.”

◆팔리고, 도망치고, 다시 팔리고…=지금은 조선족 남편과 결혼해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최경자 씨도 인신매매의 아픈 경험을 가슴 속에 묻고 살고 있다.

“그때가 97년이니까 여기 물정에 대해서 하나도 몰랐다. 강을 건너서 어느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일자리 좀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니까 그 부부가 변방 지역은 단속이 심하니까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다며 차라리 좋은 남자를 만나서 시집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왕칭(汪淸)에 있는 한족 남자에게 시집갔는데, 나는 잘 몰랐지만 아마 팔아먹은 것 같더라.”

북한에서 남편과 이혼했던 이은희 씨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결혼하면 돈도 벌고 안정적으로 살 수도 있다는 말을 믿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북한의 모집책이었고, 와보니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분명히 나를 팔아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안 간다고, 다시 되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중국 쪽 브로커 하는 말이 대부분 못사는 여자들이 오니까 제발 아무 데나 보내달라고 앉아서 빌었다. 알면서도 팔려 가는데 도로 돌아가겠다는 여자는 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경비대에) 잡혀도 가겠다고 제 발로 두만강을 되돌아왔다. 그래서 날 소개시켜 준 사람을 찾아갔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돈(소개비)을 다시 돌려주더라”

이 씨는 “여자를 팔아넘기는 일은 딱히 어떤 사람이 한다고 하기보다는 국경 마을이니까 이 집, 저 집에서 많이들 한다. 처음에 이거해서 돈벌던 사람은 나중에 전업으로 하기도 한다. 전문적인 매매꾼이 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2002년 이후 팔려갔던 여성들이 북한으로 송환되면서, 탈북 여성들의 인신매매 사례는 북한에서도 많이 알려지게 된다. 북한의 가족들이 당국에 인신매매 브로커들을 고발하면서 이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가 떠올랐다. 북한 당국도 인신매매는 단순 탈북과 다르게 취급하고, 인신매매 브로커들에게 중죄를 묻는다고 한다.

이 씨는 그러나 최근에는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제 여기 오는 여자들은 꼬여내서 온 것이 아니고 자청한 경우도 많다.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당장 먹고 살 길이 없고, 가족도 남아 있지 않은 경우 마지막 선택으로 넘어간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탈북 여성 중 가장 많은 인신매매 피해를 겪은 강순녀 씨는 지금도 가슴에 큰 한이 응어리져 있다.

강 씨는 지난 2002년 처음으로 탈북, 2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아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머리핀부터 신발까지 선물 보따리를 가득 준비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건 14살 딸이 없어졌다는 소식이었다. “인신매매꾼이 엄마에게 데려다준다고 꼬여내서 중국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까무러쳐 쓰려졌다. 며칠을 넋이 나가 있다가 딸을 찾기 위해 이리 저리 수소문 했다.”

중국의 브로커 연락처를 알아낸 강 씨는 “어떻게 애한테 그럴 수 있나. 아무리 돈에 환장했다고 해도 미성년 애를 팔아먹을 수 있냐고 따져 물으며 당장 내 딸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 아저씨는 18~19살이라고 하길래 그대로 믿고 보낸 것이라고 변명하더라. 결국 수소문 끝에 요녕성(랴오닝성. 遼寧省)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서 가봤지만 우리 애가 아니었다.” 딸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부터 강 씨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그 중국 거간꾼을 추궁해서 딸이 있다는 조양(차오양.朝陽)까지 보내달라고 했다. 우선 심양(선양.瀋陽)에 가서 중간 소개인을 만나 딸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결국 그 사람도 인민매매꾼이더라. 나마저도 팔아먹으려고 하는 것이었다.(허탈한 웃음) 나는 딸을 찾으러 온 것이지 돈벌이가 목적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날 놔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쪽에서 어차피 딸을 찾으려면 이 지역에서 수소문을 해야 한다. 시장에 나오면 멀리에서부터 모이니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해서 살다가 때를 봐서 딸을 찾아주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우선 딸은 찾아야겠고 정말 죽겠더라. 그래도 어쩌겠는가. 도망가게 놔두지도 않는데. 팔려갔다가 도저히 못살겠길래 큰 도시로 도망쳤다.”

그녀는 지금도 밤만 되면 딸의 얼굴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고 한다.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딸애를 잊은척하고 살고도 싶지만 그렇게 안 된다. 언젠가 딸을 찾아 다시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하겠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