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양민학살 선전에 북주민 반미의식 뿌리깊어

▲ 신천박물관을 견학하는 외국인들ⓒ연합

해마다 6월 25일 되면 북한 내 반미선전은 연중 최고조에 달한다.

북한은 이날부터 한달 동안을 ‘6.25-7.27 반미투쟁 월간’으로 정하고 주민들에게 반미와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북한 주민 대부분은 6.25전쟁이 미국에서 일으킨 북침전쟁으로, 피살된 양민들 대부분도 미군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선전은 주민들이 미국과 남한에 대해 뿌리 깊은 원한을 갖게 하는 최적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70년대에 제작돼 대표적인 반미 선전영화로 활용되고 있는 ‘원수를 잊지 말자’는 황해남도 신천군의 양민학살을 소재로 한 것이다. 남한에는 ‘신천 사건’, ‘10·13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신천군 위수사령관 해리슨 중위가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당장 떼어내어 따로 가둬라. 어머니는 아이를 찾다 애가 타 죽게 하고, 어린이는 어머니를 찾다 간이 말라 죽게 하라”고 명령하는 대사까지 등장한다. 미군의 학살을 인위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극도의 과장인 것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반미교양 선전장인 신천박물관에도 “조국해방전쟁시기(6.25전쟁) 신천 땅에 기어든 미제 침략자들은 강점 40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에 1에 해당하는 35,383명을 잔인하게 학살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주민들은 반미투쟁 월간이 오면 단체로 신천박물관을 방문한다. 거기서 주민들은 102명이 묻힌 어린이묘와 400 어머니묘를 돌아보며 반미감정을 새롭게 다지고 있다.

北 체제내부 봉합 위해 미군에 뒤집어 씌워

북한이 6.25전쟁 당시 미군 학살을 부각시키는 것은 미국의 침략성에 적개심을 키워 체제 내부 결속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북한 김일성은 정후 6.25전쟁의 책임론이 제기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김일성은 ‘신천사건’을 내세워 인민적 공분을 미국에게 집중시키려고 했다.

신천 사건의 경우 아직 정확한 발발경위가 규명되고 있지 않지만, 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다수 전쟁이전부터 노동당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현지 주민들로 파악된다. 이들은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북진하자, 자생적으로 ‘치안대’ 조직을 만들어 공산당 치하에서 당했던 인명과 재산 피해에 대한 앙갚음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필자도 북한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91년에 신천군 출신 대학동창으로부터 ‘신천학살사건’에 대해 들은 바 있다. 그의 할아버지도 ‘신천사건’ 때 학살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자기 할아버지가 미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치안대’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다.

대학동창에 따르면, 신천군 ‘치안대’ 대장은 신천읍 중학교에 다니던 19살 허필순이었다고 한다.

그가 평소 학교에 잘 다니지 않고 불량행위를 일삼자, 학교 부교장이 욕을 하고 벌을 주었다고 했다. 부교장을 복수하겠다고 벼르던 그는 미군이 쳐들어오자, 곧바로 동료 3명과 함께 몽둥이로 그를 때려 죽이고 군 치안대장이 되었다. 훗날 그는 미군이 퇴각하자, 51년경에 붙잡혀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됐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증언들도 사실 여부는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 그러나 북한 내 신천 출신 학생들도 부모세대로부터 당시 학살사건에 미군이 과다하게 개입 돼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6.25 전쟁은 북한 내부 계급분화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북한 당국의 주민들에 대한 계급 분류는 6.25 전쟁이 중요한 기반이 됐다. 북한은 전쟁직후 전사자, 피살자, 폭사자들을 사회의 핵심계층에 가른 한편, 치안대, 월남자, 전쟁기피자들과 그 연고자들을 적대계층으로 갈랐다.

핵심계층 중 상당수는 6.25 전쟁에서 가족들이 겪은 피해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국군에 대한 적대의식이 매우 뿌리 깊다. 김정일은 이러한 계급적 의식과 특권을 통해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적대계층으로 지목된 이들은 여전히 계급적 차별을 당하면서 사회 최빈곤층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