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인텔리들, 한맺힌 숙청의 역사

박헌영

북한 ‘인텔리 계층’에 대한 숙청의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 시작은 1953년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김일성은 박헌영 등을 미제(美帝)간첩으로 몰아 남로당 출신들을 대거 처형했다. 이후 이른바 ‘남반부 출신’들은 1960, 70년대에도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억울하게 처형되거나 통제구역으로 보내져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53년 시작된 남로당 계열에 대한 사상검토회의는 1956년까지 이어졌다.

사상검토회의가 열리게 되면 맨 먼저 거론되는 것이 출신성분, 즉 ‘토대’가 된다. 집안이 지주, 자본가 출신이면 죽을 때까지 큰 약점 하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북한에서 이른바 ‘각계각층’에 속하는 인텔리들은 ‘우연 분자’로 불려지는데 철저한 계급의식도 없이 ‘우연하게 공산주의 혁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인텔리 계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묘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로당 계열의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던 1953~56년 사이에는 특히 남한 출신 인텔리들이 공격의 표적이었다.

어느 북한 지식인의 허탈한 독백

김정일의 첫동거녀였던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집』에는 어느 좌익 지식인이 공산주의 이상사회를 꿈꾸며 월북했다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분위기 속에서 좌절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성혜랑은 좌익 인텔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이화여중 3학년 재학 중 부모와 함께 한국전정 때 월북했다. 그의 아버지 성유경은 경남 창녕의 명문가 자제로 남로당 간부였으며, 어머니 김원주는 1920년대 유명했던 잡지 <개벽>의 여기자를 지냈다.

1950년대 당시 여대생 성혜랑의 눈에 비친 북한은 한마디로 노동계급적이냐 부르주의적이냐로 나뉘는 계급주의적 잣대로 철저히 나뉘어지는 사회였다.

“우리세상(사회주의 사회)이 오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칭찬받으며 떠받들릴 것이라고 그 동안 생각해오던 것이 흔들렸다. 우리는 새 세상의 주인이 아니구나. 지난날 못살던 노동자, 농민만이 대우를 받고 지난날의 인텔리, 자산층은 죽었수다 일만 해바쳐야 하는구나… .

나는 우리 집안이 ‘각계각층에 속하는’, 말하자면 나의 부모는 사회주의 세상에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나에게 그늘을 던진 것은 우리 가정의 계급적 처지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인간적 생활에는 모두 ‘부르주아적’이라는 말이 붙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물건을 사러 상점을 다니는 것도 ‘부르주아적’이라고 보는 기풍은 이때부터도 있었다”(등나무집 p.178).

북한 현대사의 분기점, 60년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는 북한의 역사에 있어 상반된 두 가지 기운이 교차하던 때다. 우선, 전쟁 복구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전사회적으로 활력이 돌았다. 천리마운동, 청산리방법, 대안의 사업체계 같은, 지금도 북한정권이 반세기동안 발전없이(오히려 퇴보만을 거듭한 채) 우려먹고 있는 대중운동방식들이 이때 처음 발기되었다. 그만큼 정권에 대한 인민의 호응이 높았다는 뜻일 게다.

이 무렵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을 북한정권이 추진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만큼 체제에 자신이 있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는 남한을 상대로 한 공세적인 통일방안을 북한이 적극적으로 내놓은 때이기도 하다.

이때는 한편으로 북한의 이른바 ‘반종파투쟁’이 어느정도 마무리 단계에 있던 시점이다. 김일성은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하면서 1인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1956년에 발생한 ‘8월종파사건’은 그 귀결점이었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소련파와 연안파가 연합하여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김일성을 암살하려고 했던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이 김일성에게 안겨준 충격은 대단히 컸던 것 같다. 이후 김일성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 반대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세력은 무자비하게 탄압하게 되며, 북한사회의 명함은 이렇게 1960년대 초를 기점으로 엇갈리게 된다.

인민 우매화 작업의 시작, ‘도서정리 사업’

▲ 평양 만수대 김일성 동상 (출처:통일교육원)

인텔리 계층에 대한 또 한번의 숙청은 1967년 조선노당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에서 나온 5.25교시에서 시작된다.

당시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 기간중 홍위병을 동원하여 인텔리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전개했고, 개인숭배를 강화하게 된다. 김일성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교조주의라고 비판했지만, 이 흐름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의 수령독재를 강화하는데 활용한다.

김일성은 1967년 5월 25일 당 사상사업부문 일꾼들 앞에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우경 기회주의’와 ‘좌경 기회주의’ 둘 다를 비판하고 주체노선의 관점에서 과도기를 극복하자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북한사회에는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 수령우상화의 심화, 인텔리 혁명화를 외치는 가운데 사회전반에 극좌적인 바람이 불어닥친다. 개인숭배가 질적으로 더욱 강화되고 이때부터 스탈린주의에서도 볼 수 없는 수령절대주의가 확립하게 된다.

김일성은 반수정주의 투쟁이라는 대선풍 아래 대대적인 인텔리 제거와 문화에 대한 총말살을 단행한다.

먼저, 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도서정리 사업을 통해 전국의 모든 가정, 모든 직장의 책 페이지가 일일이 검열되는 방대한 캠페인을 진행한다. 수령 우상화, 항일문장투쟁의 절대화, 계급혁명 즉 반수정주의, 반부르주아 문화를 기준으로 이것에 저촉되는 책들은 모두 폐기처분되었다.

외국음악은 소련노래까지 금지됐고, 고전악보는 모두 불태워졌다. 미술관의 석고상은 비너스건 베터벤이건 모두 몽둥이에 의해 깨졌다. 서양화도 모두 찢겨졌고, 서양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농사꾼이 되었다.

반수정주의 광풍은 과학기술 분야에도 불어닥쳐, 외국기술 도입은 수정주의가 되고 선진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조차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달성한 기술문명의 토대위에 쌓이는 기술진보의 합리성이 부정되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이후 북한의 경제발전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이로써 길게잡아 1967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지는 인텔리 제거작업과 북한판 문화혁명의 칼날 아래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는 완전히 구축되었다.

성분분류라는 이름의 ‘계급 청소’

북한의 성분분류 사업은 3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첫 성분조사사업은 1958년 12월~1960년 12월까지 진행된 ‘중앙당집중지도사업’이었다. 김일성은 1958년 ‘사법ㆍ검찰일꾼회의’에서 남북이 갈라진 상황에서 적대분자를 철저히 가려내 적아를 옳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시작으로 6ㆍ25전쟁때 국군과 연합군에 협조했거나 월남자 가족, 연안파와 소련파 잔당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진행됐다.

이 때 북한 각지에는 ‘00호관리소’라고 불리는 정치범 수용소가 처음 등장하게 된다. 월남자 가족, 지주출신, 종교인등의 반동분자들은 북한 오지의 탄광ㆍ광산이나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다.

두 번째 성분조사사업은 66년 4월부터 시작된 ‘주민재등록사업’이었다. 60년대 초ㆍ중반 김일성이 개인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견제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사업으로, 이후 갑산파 숙청으로 확대된다. 당시 시행된 성분재조사를 통해 무려 6000여명의 사람들이 ‘반혁명 적대분자’라는 이름으로 인민재판을 통해 목숨을 잃고, 7만여명의 사람들이 지방과 산간오지로 추방당했다.

이후 ‘주민재등록사업’의 일환으로 ‘3계층 51개 부류’ 분류작업이 진행된다. 이 작업의 결과로 북한 전 주민은 핵심ㆍ동요ㆍ복잡계층의 3분류로 구분되고, 구체적으로는 51개 부류로 세분화되었다.

마지막 성분조사사업은 72년부터 74년까지 실시된 ‘주민요해사업’과 ‘당증재교부사업’이다. ‘주민요해사업’은 주민동태를 파악, 동요분자를 가려내자는 취지아래, 주민 전체를 ▲믿을 수 있는자 ▲반신반의자 ▲변절자 세분류로 구분했다.

‘당증재교부사업’은 단순히 당증을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당원들에 대한 사상검토를 통해 사상이 투철하지 못한 당원들에게는 당증을 발부하지 않음으로써 저절로 도태시키는 사업이었다. 이를 통해 사상성이 떨어지는 장년층 당원들은 탈락되고, 젊은 간부들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됐다.

북한은 70년때까지 실시된 이 3단계 ‘성분분류사업’를 통해 김일성ㆍ김정일 父子에게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은 핵심계층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동요와 복잡계층으로 나뉘는 새로운 계급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