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운경 “인권대회, 北주민에 희망 되길”

▲ 사진 : 함운경 홈페이지

386세대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함운경씨는 9일 ‘북한인권국제대회’ 주최측에 ‘386 세대의 북한인권 접근’이라는 주제의 발표문을 전달했다.

대회 이틀째인 이날 함씨는 ‘북한인권개선 전략회의’ 세션에 토론자로 예정됐으나, 참석하지 못했다. 함씨는 현재 열린우리당 정책연구재단인 <열린정책연구원> 센터장으로 활동중이다.

다음은 함씨의 발표문 전문.

좌파적 이상주의자와 북한인권

함운경(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1. 혁명을 꿈꾸는 학생운동가와 ‘북한’의 만남

우리에게 8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뒤집어 엎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살았다. 82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후 우리를 맞이한 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낭만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과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분노였다.

그 분노의 뒷면에 우리는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꿈을 새겼다. 분노와 꿈이 뒤엉킨 우리의 피끓는 심장에 개인의 행복과 편안함에 대한 욕망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젊음과 열정을 송두리째 바치겠다는 결의를 안고 마치 불나방처럼 혁명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사상이 필요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론이 필요했다. 또렷하고 체계적인 사상과 이론은 분노와 열정에 갇혀 있던 신출내기 운동가들을 투철한 혁명가로 만들어주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처럼 나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읽었다. 다른 나라의 혁명경험을 참고하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사를 읽었다.

가난과 불평등의 본질을 알기 위해 또 몇 권의 경제학 서적을 읽었다. 학자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저 거리의 전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삶을 송두리째 걸고 혁명에 뛰어든 20대의 젊은이들은 몇 권의 책만으로도 투철한 혁명가로 변해갔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조국과 인류의 미래상이었다. 미래사회의 이념적 상을 갖기 시작할 무렵 나는 4학년이 되었다. 내가 ‘북한’을 만난 것은 그 때였다.

대학 4학년이던 85년. 나는 투쟁을 주도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73명의 대학생을 이끌고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채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3박 4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우리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우리의 요구는 ‘광주학살 진상규명’. 우리의 투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광주학살의 책임자라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미국이 그것을 방조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미 대사관측과 여러 차례의 토론이 이어졌다. 선택 여하에 따라 농성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농성을 더 이상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미문화원 건너편 롯데호텔에서 오랜 기간 열리지 않았던 남북적십자회담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우리는 농성중단을 결심했다.

초기에 ‘도시 게릴라들’이라며 비난하던 언론들도 점점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던 때였으나 농성을 더 끌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나름의 전술적 판단을 해야 했던 그 때, 북한은 전술적 판단의 변수 중 하나였다. 이상주의 운동가였던 내가 북한을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남한의 혁명운동과 북한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쪽에서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북한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북한은 그 이전까지 전혀 알지 못한 존재였다. 그 당시에도 알고 있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그런 북한과 남한 운동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의 사고체계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 이후 2년 9개월의 감옥살이에서 이 문제를 나름대로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숙제를 끝내 풀지 못한 채 감옥을 나와야 했다.

2. 통일운동가로서 만난 ‘북한’

87년 뜨거운 민주화 열기를 나는 경험하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바깥 소식을 통해 6월 항쟁의 열기를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이다. 그러던 중 재야운동의 분열과 대통령선거 패배 소식이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제 민주화 운동이 통일운동으로 변화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88년, 드디어 출소했다. 우선 통일운동을 벌이겠다는 학생들을 만났다. 그리고 돌아온 학생운동의 영웅처럼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국을 돌며,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때의 나는 주한미군 철수의 정당성, 평화협정체결의 정당성, 연방제 통일의 필요성, 한미행정협정의 문제점을 주제로 연설하는 몇 안 되는 선동가였다.

그때 북한은 나에게 통일의 동반자였다. 또 북한은 최소한 광주학살과 같은 탄압과 폭력이 없는 좀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갖고 있었다.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은 대학시절 내가 가지고 있었던 미래사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친구들과 후배들은 어느새 북한 주체사상의 박사가 되어 있었다. 북한의 혁명이론을 구구절절 외우고 있었다. 북한에서 틀어주는 한국민족민주전선 ‘구국의 소리방송’을 남한 혁명의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주체사상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구박을 받기도 했다.

내가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체결, 연방제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그것이 북한의 주장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이 정당하고 옳은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시 법정에 섰을 때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은 북한의 주장이 아니라 나의 주장이라고 맞섰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또 다시 10개월의 감옥살이를 했다. 89년에 구속되어 90년에 감옥에서 나왔다. 나의 80년대가 그렇게 저물어갔다.

3. 민족회의 활동에서 만난 ‘북한’

한동안 격렬한 운동 현장에서 벗어나 있었다. 잠시 입시학원 강사생활을 했다. 그 사이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30대가 된 어느 날, 학원 강사 생활을 접고 문익환 목사님이 주도하시는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에 실무자로 복귀하였다. 94년이었다. 그 무렵은 80년대의 혁명적 열정이 점차 식어가고 있을 때였다. 전국의 운동조직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운동판을 떠나갔다.

문익환 목사님은 범민련을 대신해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를 만드셨다. 범민족대회를 대신할 새로운 민족대회도 준비하셨다. 목사님 옆에서 민족회의 결성과 민족대회 준비를 도왔다. 자연스럽게 북측과 교섭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때, 북한은 스스로 제시한 혁명의 원칙이나 이론에 어긋나는 태도와 행동을 보여주었다. 북한의 태도에 분개하는 후배들도 있을 정도였다.

북한은 남쪽 사람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남한 운동권을 분열시킬 수도 있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북한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깊이 좌절했다. 나 역시 북한의 행동이 공산주의 원칙이나 공산주의적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북한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도 들었다.

내가 갖고 있던 통일운동에 대한 열정은 식어갔다. 재야변혁운동을 통해서 사회를 바꾸는 일이 웬지 보람 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사회를 바꾸는 힘은 역시 국민 대다수를 움직이는 정치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그러나 막 결심을 세웠을 때, 갑작스럽게 경찰청 대공분실에 붙들려갔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간첩 김동식 사건에 ‘불고지죄’로 연루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1심재판 도중 보석으로 출감했고, 출감 이후 곧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95년에 시작된 재판은 2002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1심 유죄, 2심 무죄, 대법원 파기환송, 다시 고등법원에서 벌금형으로 유죄 판결을 받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시간동안 나는 숙명처럼 ‘북한’과 대면해야 했다.

4. 정치하는 사람의 소망과 ‘북한인권’

민족회의에 몸담고 통일운동을 하면서 북한을 가장 가깝게 대면했던 바로 그때, 북한에 대한 나의 환상과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북한은 이상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사회와는 가장 거리가 먼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젊은 시절의 열정과 헌신을 사랑한다. 그 시절의 분노와 미움도 사랑한다.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나의 눈과 귀를 빼앗았던 이념과 이론, 환상은 사라졌지만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꿈과 이상은 나의 영혼과 가슴 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정치가의 첫 번째 덕목은 국민에 대한 책임이다. 나는 아직 표결과 예산집행에 책임을 질만한 위치에 서 있지 않지만 정치에 입문한 후 국민에 대한 책임의식을 벗어본 적이 없다. 만일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의 잘못으로 나라가 거덜 나고 국민들이 굶주려 죽는다면 정치인과 지도자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와 같은 원칙과 기준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남한에서는 그런 원칙과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번 ‘북한인권국제대회’가 북한주민을 고통과 절망으로 몰아넣은 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당당히 비판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북한인권국제대회가 북한주민에게 자유와 희망의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 <북한인권국제대회>가 열리는 8~10일 DailyNK는 인터넷을 통해 행사를 현장 중계합니다. 국제대회의 진행상황을 가장 빠르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국제대회 특별취재팀 dailynk@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