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덕수용소 8년 수감자] “청년들, 북한 현실 똑똑히 알아야”

▲ 9일 저녁 명지빌딩 20층에서 열린 ‘新북한바로알기’ 포럼

“매일 십 리 길을 뛰어다니며, 20시간씩을 짐승처럼 일하면서 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냈다”

15호 수용소라 불리는 요덕수용소에 8년간 수감되었던 김영순(69.여) 씨는 9일 저녁 <북한민주화네트워크>(대표 한기홍) 주최로 열린 ‘2005 제1회 북한인권포럼’의 강사로 초청돼,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정치범수용소의 생활을 증언했다.

김일성과 함께 평양으로 개선했던 항일 혁명가 오빠 덕에, 1960년대까지 풍족하게 살았던 김씨는, 외국인 여행자 상점에서 근무하던 중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에 대해 발언했단 이유로 온 가족이 1970년 10월 요덕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인간 이하의 삶, 정치범 수용소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정치범수용소에서 겪었던 인간 이하의 대접과 혹독한 노동을 설명했다. 영양실조인 아이를 위해 쥐고기라도 먹이려고 쥐구멍을 찾아 헤매고, 쇄골이 부러져도 약이 없어 (천으로)동여매고 2달을 버텨야 했으며, 온갖 욕설과 구타를 참아내며 하루종일 일만 해야 했던 그 당시의 경험은 차마 말로 다 전하기 버거워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영양실조로 돌아가시고, 큰아들은 물에 빠져죽고, 막내아들은 88년 탈북하다 시범조로 걸려 총살당했다는 그녀의 서글픈 가족사에 참가자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 증언 중인 김영순 씨

북한에서 상류층 생활과 최하계층 수용소 생활까지 경험했던 김씨는 북한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김씨는 “왕정복고 독재정치만 아니었다면, 북한 사람들은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의 힘으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고 말하며 “북한 체제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신격화와 주체사상, 수령숭배주의에 대한 세뇌교육을 통해, 전 국민을 가난뱅이, 머저리로 만들어버렸다”고 성토했다.

수용소에서 나와 81년 함흥에 정착했다는 그녀는 보위부의 감시 속에 인민반장을 맡으며, 북한 사회 전역에 만연한 비리와 부패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북한 사회

“그때 돈으로 만 원만 내면 함흥에 있던 품질감독원 학교의 졸업증을 받을 수 있었고, 탈북 당시에도 여행증, 침대권은 물론 보위원도 돈으로 다 섭외했다”면서, 북한은 93년 식량난을 거치며, 배급이 중단된 후 정상적 사회로서의 의미를 잃었다고 밝혔다.

해외의 지원물자 또한, 부두에 내리자마자 사복 차림의 보위원들이 시장에 내다팔고, 그 외의 것들은 평양으로 운반되거나 인민군대, 보위부, 안전성으로 배분된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정주영 라면, 정주영 소금이라 이름 붙여진 구호물품들을 다 야매로 사먹지 무상으로 공급받은 적은 없었다”면서 “북에 대한 지원은 김정일 독재체제 유지에 이용될 뿐”이라고 한탄했다.

전 세계가 칭송하는 수령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날 포럼에는 서울 각지의 대학생 50여 명이 참석해 김씨의 생생한 증언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김씨는 명지대학교 홍성현(북학한과.1) 군의 “예전엔 북한 사람들이 남한을 못사는 곳이라고 안 좋게 여겼다는데, 지금은 어떻게 알고 있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남한이 잘 산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나도 북한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딱 하나만 몰랐다”고 답했다.

“평생 김일성, 김정일 수령님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소리만 들어서, 전 세계가 수령님을 찬양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중국에 나와 보니 2년여가 지나도 텔레비전에 김일성이란 말 한마디도 안 나오더라”고 덧붙이며, 수령우상화의 무서움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줬다.

그녀는 북한의 실상과 처절함에 대해 증언하려면 며칠을 걸려도 모자랄 것이라며, 젊은 청년들이 북한의 현실을 깨달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소중함을 북한에도 전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북한의 현실을 바로 알리자는 취지의 이번 ‘新북한바로알기’ 포럼은 4월 6일까지 매주 수요일 7시에 명지빌딩 20층에서 열린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