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송환 운동 포기할 수 없다”

황인철 KAL기 납치자 가족 대표 "후회도 했지만, 스스로 피랍 가해자 되긴 싫었다"

KAL기 납치사건 국회 예결위 질의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성일종 자유한국당 의원이 KAL기 납치사건으로 북한에 억류된 황원씨의 가족 사진을 들고 관련 질의를 하고 있다. / 사진=국회방송 캡처

북한 고정간첩에 의해 대한항공(KAL) 여객기 납치 사건이 일어난 지 50년이 지났다.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건이 잊혀지고 정부도 더 이상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뾰족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회에서 KAL기 납치 사건 억류자들을 송환하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3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성일종 자유한국당 의원이 흑백 사진 한장을 꺼내들었다. KAL기 납치 사건의 피해자 MBC 황원 PD가 당시 2살된 아들, 1살된 딸을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성 의원은 “이 남자 아이가 장성해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며 1969년 김포공항을 출발해 강릉으로 가던 KAL기가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피랍된 사건을 설명했다.

이어 성 의원은 “지난 5월 9일 유엔 인권이사회의 제3차 북한 보편적 인권 정례 검토(UPR)에서 우루과이와 아이슬란드 대표가 KAL기 납북 사건을 직접 거명하면서 억류자 11명의 석방을 촉구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아무 대답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다른 국가와 해외 기관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각료가 이 사안을 무시한다면 국가는 왜 존재하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며 회의에 참석한 인권위원장과 외교부 2차관, 통일부 장관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최영애 인권위원장은 “관련부처와 함께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태호 외교부 2차관도 “가능한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18년 동안 정부와 국제기구를 찾아다니며 아버지 MBC 황원 PD의 송환을 촉구해온 황인철 KAL기 납치피해자 가족회 대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예결위 회의에서 관련 질의가 끝난 직후 국회에서 황 대표를 만났다.

예결위 회의에서 이뤄진 KAL기 납치 사건에 대한 질의 과정을 어떻게 봤냐는 질문에 황 대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18년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이 떠올랐다”며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정부에 책임을 촉구하고 통일부, 외교부, 인권위원회 등 정부 고위 관료가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할 때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황인철 KAL기 납치자 송환
황인철 KAL기 납치자 가족회 대표 / 사진=데일리NK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던 황 대표가 직장을 그만두고 북에 납치돼 있는 아버지를 송환하기 위한 운동을 한다고 할 때 주변에선 ‘왜 희망이 없는 일에 매달리냐’며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그냥 잊으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18년 동안 KAL기 사건 피랍자 송환 운동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가 뭔지 물었다.

황 대표는 “정부가 북한에 납치돼 있는 우리 국민에 대해 무관심한 상황에서 나조차 피랍자들에 대한 관심과 이들의 송환 조치를 촉구하지 않는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피랍의 가해자가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래는 황 대표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 KAL기 납치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어서야 피랍자 송환 촉구 운동을 시작했다. 계기가 있나?

“32살에 결혼을 했는데 부모가 되어 보니 아이가 정말 예쁘더라. 만약 이 아이를 못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자식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고통이 느껴졌다. 결정적으로는 2001년 당시 대한항공 스튜디어스로 KAL기 납치 사건 때 납북된 성경희 씨가 제3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어머니를 만나는 것을 보고 나도 아버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 아버지가 북한에 납치됐다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됐나?

“어릴 때 ‘아버지는 어디있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는 MBC 피디이고 출장가셨는데 크리스마스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서야 작은 아버지께서 ‘너도 이 사건에 대해 알아야 한다’면서 ‘아버지가 출장을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북한에 납치됐다’고 말씀해주셨다. 당시에 가족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게 아버지가 북한의 강제 억류, 즉 범죄에 의해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 때문에 정의감에 불타올라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기 때문에 억류됐다고 생각했다. 또 남한에 있는 가족들이 조용히 있어야 북한에 있는 아버지도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 아버지가 없는 어린시절은 어땠나?

“아버지가 납치되신 후 어머니가 심한 우울증에 걸리셨다. 멀쩡하던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 혹여나 자녀들도 갑자기 사고가 생길까봐 모든 행동을 통제하셨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릴 때 한번은 아버지가 북한에 납북됐다고 친구에게 얘기를 했는데 아버지가 월북한 빨갱이 자식으로 소문이나 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절대 누구에게도 아버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릴 때 꿈은 그냥 평범한 삶을 사는 거였다. 평범한 직장을 갖고 일반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어디를 지원하든 신원조회에 걸려서 평범한 직장을 갖는 것도 쉽지 않았다.”

– 그래도 어렵게 직장을 잡고 가정도 꾸리는 평범한 생활을 하게되지 않았나. 다시 직장을 포기하고 납북자 송환 운동을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아내는 뭐라고 하던가?

“사실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방과 후 학습비가 없어서 돈을 못냈고 급식비도 낼 돈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하는 활동의 가장 큰 후원자다. 내가 힘들어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아내는 당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말한다. 딸들도 할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한 아빠의 활동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아빠를 지지해준다. 가족들이 없었으면 아마 이 활동을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을거다.”

– 18년 동안 KAL기 납치자 송환 촉구 운동을 하면서 북에 계신 아버지 소식을 들은 적이 있나?

“2010년 6월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실종그룹에 KAL기 납치자 문제가 처음으로 유엔을 통해 접수되고 2011년부터 KAL기 납북자 송환을 위한 100만 서명 운동을 전국 투어를 통해 진행하면서 그 때 한 대북 소식통을 통해 아버지 소식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2012년 12월에 아버지가 평양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살고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에게도 내 활동이 전해졌고 2013년 아버지가 탈북을 시도하셨지만 결국 실패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 활동을 시작한 것을 후회했다. 내가 이 운동을 시작해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 살아계시면 황원 PD의 나이가 82세인 것으로 알고 있다. 현실적으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현실적으로는 아버지가 스스로 북한을 나오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국제사회의 원칙에 따라 항공테러로 인한 납치자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공식 절차를 요구하는 것이다. 2010년 유엔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비자발적 실종 실무그룹(WGEID)에 황원 씨를 접수했고 지난 5월에는 유엔 인권사회 보편적 인권 정례검토에서 KAL기 납북자 사건이 직접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강제실종을 당국이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압박을 주고 있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