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 관리 소홀’ 中, 사드 배치 면책 대상 아니다

꼭 1년 반을 끌어온 ‘사드’논쟁이 종지부를 찍었다. 예상대로다. 한미 당국은 다만 시기를 저울질했을 따름일 게다. 김정은 ‘개인’을 제재대상으로 올리기 까지 길다란 대북제재 목록의 ‘화룡점정’이다. 근 2년 간 논란이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내용도, 바뀐 것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있는가? 중국이 어떤 형태든 ‘대한제재’를 할 수 있을까?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과 안보 불안정성은 높아질까? 거의 대부분 전문가들의 우려(?)대로 한반도에서 펼쳐질 G2 간 군사적 충돌 상황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지가 남아있을까?

이 세 가지 질문이 ‘사드’논쟁의 최종 결론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결정을 되돌린들 상황은 가역적(reversible)이지 않다. 거꾸로 되물을 수 있다. 왜 ‘사드’를 들여온 거냐고, 꼭 그래야 했냐고 말이다. 군사기술적으로 안정성이 확립된 대응체계도 아닌데 말이다.

이 ‘왜’냐는 질문은 처음 세 가지 의문을 하나의 실로 꿰고 있다. 세 질문을 무릅쓰고라도 들여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사드’ 포대의 주둔비용과 운용은 주한 미군이 전적으로 지휘한다. 한국의 역할은 부지 제공에 국한됐다.

첫 번째 질문, 중국은 대남보복(?)을 할까?

수사(修辭)적이고 외교적인 ‘겁박’(劫迫) 이상은 하지 못한다. 중국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강경한 대외 조치를 취할 때는 중국 인민의 가시적인 피해가 있고 중국정부가 뭔가 체제 내부적으로 보여줘야 했을 때다. ‘사드’ 문제는 중국 인민과 직접 관계가 없다.

더구나 ‘사드’의 직접 당사자는 미국이지 남한이 아니다. 중국이 무모한 ‘남한 때리기(?)’에 나선들 명분 없는 이기적 행태라는 비난만 거세질 따름이다. 경제적 단절이라면 중국도 감수해야 할 출혈이 크다. 그걸 감내할 상인의 나라 중국이 아니다.

‘사드’를 불러온 원죄는 탄도미사일 개발과 핵실험을 해 온 북한에게 1차 책임이 있지만, 북한을 기대만큼 ‘관리’하지 않은(혹은 못한) 중국이 면책되는 것도 아니다. 도를 넘는 중국의 예민한 반응은 자신의 공격적 군사 행보는 돌아보지 않는 후안무치의 소치이다.

결국 중국은 직, 간접적인 군사행동이나 대남 경제적 보복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북한 이슈와 별개로 한반도 상황을 전혀 다른 차원의 맥락으로 전개시킬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견뎌야 할 어떤 지정학적 경제적 이익도 중국에겐 없다.

두 번째 질문,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과 안보 불안정성은 얼마나 높아질까?

장기적으로 더 나빠질 것은 없다. 동북아는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세력균형론에 입각한 안보균형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곳이다. 동북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중국의 무리한 군사지리적 요구는 일본과 동남아에서 미묘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태평양을 두고 ‘반분’하자는 중국과 어림없다는 미국의 패권경쟁이 남한의 ‘사드’ 포대 하나로 격화되기엔 역부족이다. 희생양으로 삼기에 한국은 이제 덩치가 커졌다. 어차피 북한은 완전한 핵무장이 공인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자기의 길’을 갈 것이다.

한반도에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스탠스(자세)를 선점한 미국에게 중국이 한국을 겨냥한 안보불안정성을 도발할 때 야기될 경제적 리스크는 고스란히 중국의 몫이 된다. 그걸 중국이 참아낼 만큼 남한의 ‘사드’가 중국에 치명적이지 못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중국의 대남 제재성 조치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역내 불안정성을 심화시킬 뿐이다. 무례한 외교적 비난 이상의 실질적인 대외적 조치를 중국은 감행하기 어렵다. 일본의 자신감은 여기서 나온다. 할 테면 해보라는 암묵적 냉소가 깔려 있다.

세 번째 질문, 한국의 전략적 선택지는 무엇인가?

군사방어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은 ‘사드’를 도입하기로 ‘지시하는 일’은 최고 통수권자가 내리는 고도의 정치적이고 통치철학이 배어있는 결단이다. 단지 기술적 필요에 따른 기능적 결정이 아니란 사실만큼은 이론(異論)이 없다. 왜 그럴까?

‘남한 내 사드’라는 맥락에는 ‘對중국 압박용’이기도 하다는 정치적 기대효과가 따른다. 이를 고려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결과가 얼마나 바람직하느냐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대통령의 정치군사적 결정은 기회비용을 전제로 한 고도의 통치행위일 수 밖에 없다.

그 ‘기회비용’에 대부분 국제문제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중국의 군사경제적 대남 위협이 포함돼 있다. 그간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서 모호한 줄타기로 균형을 잡고자 애쓴 무형의 노력보다 ‘사드’ 도입 결정 하나로 대통령 본인이 가진 국가철학과 대북관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한국은 전략적 지형도에서 ‘모호함(ambiguity)’이라는 쓸만한 전략 하나를 제거한 셈이다. 향후 어떤 대북 안보정책을 선호할지 분명한 신호를 외부에 보낸 효과를 얻었다. ‘전략적 모호성’이란 나의 의도를 알지 못하기에 상대방이 부담해야 할 기회비용이다.

이 기회비용을 제거해 주면 나의 행동뿐 아니라 상대방 대응의 예측가능성도 높아진다. 중국은 앞으로 한국이 북한의 미사일과 핵을 두고는 절대 흥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 중국의 부담은 커진 셈이다. (물론 현재의 대북제재 공조노선에서 중국이 이탈할 것이라는 부정적 분석은 별개의 사안이다. 그것은 또 다른 국제정치적 계산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남한은 유독 국내외 정치이슈에 관해 대중적 호불호가 유달리 높다. 선거는 잦고 여론의 분열은 상시적이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안보문제가 축구경기만큼이나 대중적 관심사항으로 호도되기 쉬운 사회 구조다.

중국이 노리는 것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대남 결정력의 척도는 남한 여론의 추이다. 중국의 반발이 당연하고 타당한 것 인양 국내여론이 편승하면 중국은 더욱 가당치도 않게 나올 것이다. 북한이 그간 보여준 전례이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사상적으로 분열돼 있고 가볍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북한 핵에 관한 한 남한 사회가 보여왔던 무심하리만치 무덤덤한 반응이야말로 어쩌면 지금 ‘사드’ 도입과 위치 결정에 요구되는 국민적 ‘덕목’ 아닌가 싶다.

상상컨대 사드를 도입하든 말든, 어디에 배치하든 국민적 관심이 ‘무심하다면’ 중국은 뻘쭘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개연성은 1%도 없다는 현실이 향후 사태의 향배를 어둡게 한다. 국가 안보를 책임진 정책결정자들의 피로감이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 핵 미사일을 고도 50km 상공에서 파괴한들 남한이 사실상 방사능 낙진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니다. 핵무기만한 억지효과도 없다. 그럼에도 ‘사드’를 도입키로 한 것은 앞으로 전술핵의 도입이나 핵무장도 가능하다는 암시로 읽힌다.

정치적 결정은 정치적 의지의 반영이다. ‘사드’ 도입은 정치적 의지의 실현사항 중 하나다. 그렇다면 왜 꼭 ‘사드’를 들여와야 했냐는 한탄조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온다. 앞선 세 질문의 예상답안을 검토하고 반영한 결과이자 정치적 의지의 표현이라는 거다.

한국의 현 대통령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통해 한반도에 냉전적 평화를 지속시키려는 속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명확히 한 것이다. 그 어떤 전략무기의 우세도 완전한 핵무기 보유국에 관한 한 사실상의 핵 균형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다.

이는 1960년대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라마의 고백이었다. 그는 1962년 “미국 땅에 단지 몇 개의 핵무기가 떨어질 가망성만 있어도 워싱턴은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p. 489).

긴 논란 끝에 ‘사드’는 이제 한국 땅에 들어온다. 북한 핵 미사일을 완전히 막지도 못하지만 도입하기로 한 것은 고도의 통치행위다. 무엇이 옳았는가는 역사가 증언할 것이다. 요즘 같아선 그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차라리 지혜롭겠다 싶은 시대를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