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회담은 어떻게 해서 개최되었으며 무슨 성과가 있었는가?

2+4 회담은 독일통일에 필요한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마련된 절차이다. 1952년 독일조약에 따라 독일통일에는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서독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대국은 1990년 5월 5일부터 4차례에 걸쳐 회담을 개최, 「독일문제의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일통일의 대외적인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독일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쟁점이었던 ➀오더-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➁통일독일의 화생방 무기 포기와 37만 명의 병력 상한선 유지, ➂동독주둔 소련군의 철수, ➃통일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 등의 문제들을 조약형식으로 합의함으로써 냉전종식 후 유럽질서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2+4 회담은 독일통일에 도움을 주는 ‘통일의 촉진자'(促進者)의 역할이 아닌 ‘사후 추인자'(追認者) 역할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6자회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4 회담 개최 배경


1989년 11월 28일 서독 콜 총리의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발표 이후 독일통일 문제가 서독 국내외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자 소련은 독일통일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1989년 12월 11일 미국에 4대국 대사급 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표면적으로는 동·서독이 동독의 「조약공동체」제의를 놓고 통일논의를 하고 있는데 독일통일에 ‘책임과 권한’을 가진 2차 대전 전승 4대국이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독일통일 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이를 지연 또는 저지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서독 콜 총리는 동서독이 배제된 가운데 4대국이 독일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였고, 미국도 4대국 회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회담이 독일통일 과정에 4대국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소련이 이를 계기로 ➀꺼져가는 영향력을 회복하고, ➁독일통일을 지연시키며, ➂중부유럽의 비핵화를 주장하고, ➃미군 주둔 시까지 소련군의 독일주둔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무대가 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➀소련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일 경우 고르바초프의 집권기반과 개혁정책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고, ➁다자간 협의기회가 없으면 서독이 소련과 직접 통일문제를 협의하게 되어 소련이 통일독일의 중립화나 NATO 탈퇴를 강하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고, ➂이렇게 될 경우 NATO는 독일통일의 장애물로 여겨질 수 있으며, ➃프랑스와 영국도 독일통일 문제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위해 소련의 4대국 회의 제안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고, ➄궁지에 몰린 고르바초프가 2차 대전 참전국들을 모두 초청해 독일 평화회의를 열자고 하면 이를 관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며, ➅소련이 원치 않는 방안을 관철하려면 소련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서독 겐셔 외무장관도 독일통일을 위해서는 동독주둔 소련군 철수 후에도 유럽문제에 대한 소련의 발언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4대국 회의 제안에 무언가 응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평화회의」나 CSCE회의 개최 등의 방안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평화회의」개최는, 독일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주지 않으면서 2차 대전시 특별히 기여한 것도 없는 우루과이 같은 나라들도 참석한 가운데 30여 개국이 모여 독일문제를 논의하게 된다는 점에서 불합리할 뿐 아니라, 여러 나라가 모여 “독일 성토장”을 만들면서 전쟁배상금 요구 등으로 이익을 챙기려 할 가능성이 있어 수락하기 어려운 방안이었다. CSCE 회의 개최는 소련의 입장을 존중해 준다는 장점은 있으나 35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를 이루기 어려운 데다, 리히텐슈타인이나 바티칸 같은 나라가 독일통일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도 불합리하여 역시 채택하기 어려운 방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무성 고위실무자들이 소련의 4자회담 제의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해 낸 방안이 동·서독과 전승 4대국 외무장관들로 구성된 「2+4 회담」(Two-Plus-Four Meeting)이다. 이 방안은 ➀소련에게 “불만표출을 위한 외교적 출구”를 마련해 줄 수 있고, ➁소련의 4자회담 제의를 봉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고, ➂규모가 작아 신속하고 유연한 회담운영이 가능하고, ➃동서독의 지위를 명시하지 않은 단순한 6자회담 보다는, 동서독이 앞서가고 2차 대전 전승 4대국이 따라가는 방식 이어서 독일통일을 밀어 붙이는데 유리하고, ➄’말 안 듣는 영국과 프랑스’를 2+4 회담의 틀 속에 넣어 평화회의 주장 같은 엉뚱한 주장을 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점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베이커 국무장관이 국가안보회의(NSC)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의 구두결재를 받아 추진하게 되었다.


미국의 기본전략


미국은 2+4 회담이 “협상의 장”이 아니라 “협의의 장”이며, 소련에게는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힘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운영한다는 기본방침 하에 다음과 같은 전략으로 회담을 추진하기로 했다.


➀ CSCE 규약의 자결권 조항을 들어 독일의 장래를 논의하는 회의에는 반드시 독일이 참석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➁ 4대국이 통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회담의제를 가급적 “4대국의 권한종식”문제에 국한시킨다.
➂ 독일이 4대국과 동일한 지위를 갖거나(6자회담 방식) 소련의 주장처럼 4대국이 주도하고 독일은 둿전에 밀려나 따라가는(4+2방식) 형식이 아닌, 동서독이 앞서가고 4대국이 따라가는 2+4 형태로 회담을 운영한다.
➃ 독일통일이 기정사실화 된 후에 대외적인 문제를 협의하도록 하기 위해 동서독 간의 통일작업은 신속히 진행시키고 2+4 회담 개최는 가급적 지연시킨다.
➄ 서방측이 동독선거에 개입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첫 번째 2+4 회담은 동독 선거(3월 18일) 이후에 개최한다.
➅ CSCE 정상회의는 독일통일 이후로 미루어 독일통일을 추인하는 형식이 되도록 한다.
➆ 1990년 2월 초 베이커 국무장관 소련방문 시 2+4 회담 계획에 대해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다.


회담일정과 토의결과


2+4 회담 과정은 미국 주도하에 사전 조율을 거친 후 1990년 2월 14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개최된 ‘개방된 하늘(Open Sky)’ 회담 시 동·서독 및 2차 대전 전승 4대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2+4 회담 개최에 최종 합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제1차 회의는 1990년 5월 5일 서독 수도 본(Bonn)에서 개최되어 차후 회담 시기와 장소를 결정했다. 1차 회의와 2차 회의가 서독과 동독에서 개최된 것은 이 회의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가 동·서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1차 회의를 5월 5일 개최토록 한 것은 이 회담이 3월 18일 개최될 동독 자유선거에 영향을 미쳤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한 것이다. 3차 및 4차 회의를 파리와 모스크바에서 개최토록 한 것도 프랑스와 소련에 대한 배려의 의미가 담겼다. 회담 일자는 관련국가 간의 양자회담 일정도 고려한 것이며, 2+4 회담에 맞추어 양자회담에서의 타결을 서두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2+4 회담은 관련국가들 간의 양자회담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을 추인하는 데 그쳤을 뿐 쟁점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회의는 아니었다.



1990년 5월 5일 서독 본(Bonn)에서 개최된 1차 회의에서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독일문제는 독일국민이 결정할 문제라고 주장한 반면, 쉐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통일독일의 NATO 잔류에 반대를 표시하면서 독일통일의 내적, 외적 절차가 일치될 필요는 없다고 언급하여 서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회의에서는 차후 회담 일정, 7월 파리회의 시 폴란드의 참여, 독일의 자결권 인정, 오더-나이세 국경인정 원칙 등에 합의했으나 통일독일의 동맹소속 문제는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6월 22일 동베를린에서 개최된 2차 회의에서는 전날 있은 동서독 의회의 오더-나이세 국경관련 결의안을 환영하고 세부문제를 협의한 후 2+4 최종결의문을 11월 7일 CSCE 정상회담 이전에 완성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 측은 통일독일 병력의 30~35만 명 수준으로의 감축, 독일통일 후 5년 이상 과도기 동안 4강의 권리와 책임 유지, 동·서독의 국제협정의 효력인정 및 기존동맹 유지를 제안했으나 미국은 통일독일의 완전한 주권인정을 주장하면서 거부했다.


7월 17일 제3차 파리회의는 전날 고르바초프와 콜 간에 합의된 사항, 즉 ➀통일독일의 완전한 주권회복, ➁4대국 권한의 완전소멸, ➂통일독일의 동맹 선택권 인정, ➃오더-나이세 국경선 인정, ➄3~4년 내 통일독일 병력의 37만 명으로 감축, ➅화생방무기의 포기, ➆3~4년 내 소련군 철수, ➇소련군 철수 이전까지는 NATO 시설의 동독지역 확장 금지, ➈소련군 철수 시까지 미·영·프 군대의 베를린 주둔, ➉독·소간의 후속협정 체결 등 모든 문제가 타결됨으로써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폴란드 외무장관이 잠시 참석한 가운데 국경문제 처리절차를 완결한 후 서독 겐셔 외무장관이 고르바초프와 콜 간의 합의사항을 설명했으며, 2+4 최종회담은 9월 12일 종결키로 합의했다.


9월 12일 모스크바 회의에서는 소련군 철수비용 130억 마르크 지원과 독일의 철수 소련군 주택건설 사업 참여보장에 합의한 후 독일통일의 대외적 문제를 완결하는 「독일문제에 관한 최종조약」(일명,「2+4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4개월에 걸친 회담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2+4 조약은 서명 국가들의 비준절차 때문에 1990년 10월 3일까지 발효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2차 대전 전승 4대국 외무장관들이 10월 1일 뉴욕에서 회합, 「전승국의 권한과 책임의 효력정지에 관한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1990년 10월 3일부터 2+4 조약이 발효될 때까지의 권리를 포기하는 절차를 취했다.


2+4 회담이 주로 양자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을 공식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기는 했지만 회담진행이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소련 측은 계속 강경한 자세를 보였고, 서방측이 압박을 가하면 소련은 국내 사정을 언급하면서 2+4 회담이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2+4가 국경문제를 해결할 법적 권리가 없으므로 독일통일 후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처 영국총리는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간의 협력관계 강화를 위한 NATO 정상의 선언을 강력히 반대했다. 소련군 철수 시까지 외국군대는 구동독 영토에서 군사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정무국장 회의에서의 합의사항에 영국이 계속 반대함으로써 9월 12일 최종회의에서 합의서가 채택되지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미국의 중재로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2+4 회담에서 완결되지 못한 사항은 독일과 소련, 독일과 폴란드 간의 양자조약의 형태로 완결되었다. 2+4 회담이 끝난 후 이루어진 후속조치로는 ➀소련군 철수 시까지의 주둔비용 지원에  관한 협정인 「구동독 주둔 소련군의 체류 및 철수를 위한 과도기 조치에 관한 협정」(1990.10.9.), ➁1994년까지 소련군 철수를 완료한다는 내용의 「소련군의 기한부 주둔에 관한 조약」(10.12), ➂「독·소간 선린우호협력조약」(11.9) ➃독일·폴란드 간 「국경조약」(11.14), ➄「독·소 청년자문위 구성에 관한 합의」(12.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