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보았다 찾아를 보았다….’
1953년 발표돼 지금까지도 전국민에게 사랑받는 곡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다. 이 가사에 묘사된 대로, 60년 전 12월 흥남부두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의 눈보라가 불었다. 그리고 거기엔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려는 수십만의 피난민들이 부두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미 제8군이 평양을 뺏기고 철수하자, 흥남 일대로 모여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고립되고 말았다.
맥아더 UN군총사령관의 철수 명령에 의해 흥남에서 철수하는 국군과 UN군의 병력은 10만 여명. 여기에 수많은 피난민까지 더해져 흥남부두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밧줄 사다리에 매달려 수송선을 기어오르는 피난민들. ⓒ연합 |
이 결정엔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미 10군단의 민간고문 현봉학 씨 등의 설득이 주효했다. 알몬드 장군의 보좌관 포니 대령은 당시 “무기는 새로 만들면 되지만 사람들은 살려야 하지 않느냐”고 설득했다고 한다.
철수작전이 시작되자 군인들은 함정 내의 무기들을 부두에 내려놓았고, 피난민들 역시 자신들의 짐을 버리기 시작했다. 한명이라도 더 많은 피난민을 태우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다.
당시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는 열 여덟살의 심왕식 씨(78)도 있었다. 현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의 이사인 심 씨는 그날의 상황을 “아비규환이었다. 그야말로 부모가 자기 자식을 버리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심 씨가 탔던 ‘큰 배’는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흥남부두에 마지막까지 남은 상선이었다. 이 배의 정원은 60여 명이었는데, 화물칸에 태운다 해도 2,000명 이상 태우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최종 탑승한 피난민 숫자는 1만 4천여 명이었다. 피난민들의 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심 씨는 “자동차 밑, 탱크 밑 등 공간이 있는 곳엔 모두 사람이 있었다”며 “가장 힘든 것은 물과 대소변 문제였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심 씨는 “사람들 사이에서 ‘곧 배가 가라앉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심 씨는 가라앉아 죽더라도 일단은 가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물, 이불, 의약품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해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자들에게 줬다. 모든 피난민들이 지쳐있었지만 새 생명이 5명이나 태어나는 작은 기적도 있었다.
심 씨는 “콩나물시루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아기를 무사히 받아냈다. 아기를 씻길 물이 없어 기관실의 냉각수를 받아서 데운 뒤 씻겼다”고 말했다. 심 씨는 “빅토리호의 선원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김치1’, ‘김치2’ 순으로 지어줬는데, 최근 수소문 해보니 ‘김치5(파이브)’가 거제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만나보고 싶다”며 미소를 지었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에서 철수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도에 도착한 것은 이틀 뒤인 25일 낮 12시. 혹한의 항해에도 희생자는 없었다. 이 위대한 항해를 기념해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모형이 세워져있다.
빅토리호를 비롯해 200여 척의 배를 타고 흥남에서 철수한 피난민은 총 9만 8천여 명. 아군 병력 10만 여명까지 더해 20만여 명이 자유의 땅으로 무사히 내려왔다. 이는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 보아도 찾아보기 힘든 대철수 작전이었다.
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심왕식 씨는 젊은 세대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심 씨는 “우리 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바로 안보다. 전방의 군인들조차 우리의 주적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며 “우리나라를 지켜왔던 선배들의 공을 알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