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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종교 교류에 앞장서왔던 서경석 목사(한기총 인권위원장)가 평양 봉수교회는 종교 사기극에 불과하다며 더 이상 남한 기독교인들이 북한의 가짜들을 만나기 위해서 줄을 서는 한심한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 목사는 28일 개인 홈페이지에 ‘평양 봉수교회를 고발한다’는 글을 올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북한을 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여섯 번이나 갔었던 봉수교회를 고발한다”면서 “우리가 계속 좋은 관계를 맺으면 어느 때고 북한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겠지 하는 기대는 이제 포기하자”고 말했다.
이번 서 목사의 고발은 개신교 남북 종교교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평양 봉수교회와 사실상 단절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종교계와 남북민간협력사업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1998년 봉수교회를 첫 방문한 이후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아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와 성도 상당수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러한 형태로도 기독교가 확산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교류와 지원에 앞장섰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서 목사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 봉수교회의 진실과 그 교인들이 누리는 특권에 대해 알게 됐다며 더 이상 속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는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배를 보다가 (실제로)눈물과 기도가 터져 나와 지방으로 쫓겨 갔다”면서 “단지 한국인 등 외국인으로부터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점을 과시하게 위해 세워졌을 뿐”이라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소개했다.
서 목사는 “봉수교회가 세워진 1988년 이후 지금까지 17년간 우리가 속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바보들인가?”라고 자문하고 “한국교회지도자들은 북한의 ‘그리스도교인’을 만날 때마다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김동식 목사님의 생사확인을 요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남북기독교인의 만남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정면으로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조선그리스도연맹)강영섭 위원장에게 달러를 쥐어주는 일도 그만해야 한다”며 “그리고 그 대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고발로 자신이 창설했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직을 사임해야 될 지 모르지만 인도적 지원과 인권 문제는 병행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대표직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한편, 남북 기독교 교류에 앞장서왔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나핵집 평화통일 위원장은 “폐쇄된 사회에서 십자가가 걸리고 찬송이 울리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일단은 북한에 교회 수가 늘어나고 기독교인들이 세력을 넓히는 데 힘을 모아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다음은 서경석 목사가 홈페이지에 게시한 전문
평양 봉수교회를 고발한다. (서경석 sksgo@netian.com)
내가 처음 봉수교회에 갔던 때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했던 1998년 3월이었다. 우리 일정에 일요일이 끼어있지 않아 봉수교회에 못가는 줄 알았는데 마침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에 평일에 봉수교회를 갈 수 있었다. 약 40명의 교인들이 나와 함께 찬송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나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나는 40여명의 교인들은 진짜 기독교인일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날 나온 한 교인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교인이 되셨나요? 그 분은 어렸을 때 어머니 무릎에서 예수님을 믿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교회에 나오지 못하다가 봉수교회가 세워지면서 나오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감격했다. 그럴 것이다. 북한이 제아무리 동토의 땅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가 왜 없겠는가?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여기서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봉수교회 교인들이 가짜라고 하지만 그래도 일부는 진짜일 것으로 굳게 믿었다. 어머니의 무릎에서 예수 믿었다는 말은 봉수교회 교인들이 항상 하는 거짓말임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봉수교회 교인 중 일부는 진짜라는 나의 믿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바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서기장 목사가 찬송가를 하나도 부를 줄 몰라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북한을 수없이 왕래하고 자유여행증까지 소지한 분에게 봉수교회의 한 교인이 “우리는 매주 일요일 여기에 출근합네다.”하고 말했다고 그분이 내게 귀띰해 주었을 때도 나는 나의 확신을 바꾸지 않았다. 매번 북한을 갈 때마다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았는데 우리는 항상 예배가 끝난 후 먼저 나와야 했고 우리가 교회를 떠난 후에만 봉수교회 교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한 번도 교인들과 접촉할 수 없어도 나는 좋았다. 평양에서 예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감격했고 봉수교회에 갈 때마다 나는 거액의 헌금을 했고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봉수교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탈북동포들과 만나면서부터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충격적이었다. 봉수교회에는 보통사람들은 근처에도 갈 수 없다. 그곳은 선택받은 사람들만 가는 곳이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한 사람이 그 교회 교인이었는데 한번은 그 사람이 예배를 보다가 눈물과 기도가 터져 나왔단다. 그리고 그는 곧 지방으로 쫓겨 갔단다. 가짜 기독교인으로 있어야지 진짜 기독교인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성경을 소지하거나 기독교인임이 발각되면 정치범수용소로 가야 한다. 봉수교회는 단지 한국인 등 외국인으로부터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점을 과시하게 위해 세워졌을 뿐이라는 것이 탈북자들의 말이었다.
세 번째 북한에 갔을 때로 기억하는데 황해도 신천의 역사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처음에 신천 역사박물관의 게시물들을 보고 매우 흥분했었다. 양키들이 저렇게 인민들을 죽이다니! 그래서 안내원에게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미군의 만행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귀국한 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귀국하자마자 인민을 살육한 사람들은 미군이 아니고 바로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이 신천을 점령할 때마다 상대방들을 죽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도 무지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양키의 만행을 고발하는 역사박물관에 “양키의 앞잡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6명의 목사님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그중의 한분이 바로 나의 중조부되시는 서경조목사님이었다는 점이다. 중조부와 다른 목사님들이 갓을 쓴 원한경 박사(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와 함께 찍은 사진인데 원한경 박사는 양키가 조선인으로 위장했다고 했다. 나는 이 사진을 보고 또 흥분했다. 기독교인이 북한동포를 가장 열심히 돕는데 이렇게 기독교를 비난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당장 저 사진을 떼라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안내원은 죄송하다며 즉시 시정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물론 내 항의를 받고 고칠 리가 없다. 그 후에도 신천 역사박물관을 갔다 온 한국인들에게 계속 물어보았는데 지금도 그 사진은 그곳에 버젓이 걸려있다. 신천 역사박물관은 북한사람들에게 양키와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는 의식화 장소다. 그래서 학생들은 한 주일씩 행군하여 이 박물관에 왔다가 다시 한 주일을 행군해서 자기 동네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북한의 반(反) 기독교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내가 봉수교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래도 북한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 어디냐? 우선 그런 식으로라도 기독교가 발을 붙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우리는 믿는다. 가짜 같긴 하지만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우선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북한 내에서 발언권을 높일 수 있도록 북한동포를 도울 때 <조그련>을 통해 돕자. 그래야 북한당국이 기독교에 대해 좋은 생각을 하지 않겠나? 말하자면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봉수교회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사건이 생겼다. 지난 7월 19일 워싱턴에서 프리덤하우스 주최로 북한인권을 위한 국제회의가 있었는데 그때 탈북한 김형식 교수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분은 35년간 김형직사범학교의 교수로 계셨던 분인데 모스크바대학에 조선어교수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부인은 북한에 ‘인질’로 남아야 한다. 그래서 중앙당에 부인이 봉수교회 교인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단다. 봉수교회 교인은 대남공작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주로 구성되는데 교인이 되면 외국인과 접촉이 잦기 때문에 식량과 의복의 배급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당은 말하기를 지금 봉수교회 교인이 300명인데 이미 교인이 되려고 신청한 사람의 숫자가 60명이어서 부인을 61번째 대기자명단에 올려놓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교수는 부인이 봉수교회 교인이 되려면 십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포기했다고 했다.
이 말까지 듣고 나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침묵은 죄악이다. 더 이상 한국 기독교인들이 북의 사기극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봉수교회가 세워진 후 몇 년 동안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봉수교회가 세워진 1988년 이후 지금까지 17년간 우리가 속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바보들인가? 그러고도 한국 기독교인들이 북한의 가짜들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줄을 서고 공동기도문을 채택하려고 애를 쓴다면 이것은 무슨 망신인가? 오히려 한국교회지도자들은 북한의 ‘그리스도교인’을 만날 때마다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김동식 목사님의 생사확인을 요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남북기독교인의 만남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정면으로 말해야 하지 않는가? <조그련> 강영섭위원장에게 몰래 딸라를 주는 일도 이제는 그만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대신 정치범수용소로 잡혀간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그동안 봉수교회에 대해 공개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봉수교회의 문제점도 정확히 잘 몰랐지만 그보다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위해 북한을 왕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북한을 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내가 여섯 번이나 갔었던 봉수교회를 고발하고자 한다. 이 고발로 나는 내가 창립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공동대표직을 사임해야 할지도 모른다. 북한은 우리가 인도적 지원과 인권개선노력을 동시에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 압박을 가할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공동대표직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과 북한인권 개선활동을 함께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행동으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 부담을 주게 되어 참으로 미안하다.
이제 이글의 결론을 맺고자 한자. 더 이상 부끄러운 거짓놀음을 하지 말자. 북한을 가더라도 일요일에 절대로 이 가짜교회를 가지 말자. 고려호텔이나 양각도 호텔에서 우리들끼리 조용히 예배를 보자.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북한이 사기극을 계속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해 주자. 우리가 계속 좋은 관계를 맺으면 어느 때고 북한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겠지 하는 기대는 이제 포기하자. 17년간이나 기다렸으면 됐지, 언제까지 더 기다릴 것인가?
이제는 진실을 말하자. 이제는 소리 지르자. 더 이상의 침묵과 속아 넘어가기는 우리를 바보로 만들 뿐이다. 그동안 저들은 계속 속아 넘어가는 우리를 보면서 얼마나 속으로 희희낙락했을까?
서경석 한기총 인권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