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 고정일 ‘장진호 전투’ 대서사를 말하다






▲’불과 얼음’저자 고산 고정일 씨
‘얼어붙은 장진호’ 이후 3년 만에 이 책을 전면개작한 ‘불과 얼음'(장진호 혹한 17일)이 출판됐다. 저자는 동서문화사 대표 고산 고정일(사진) 씨다. 그는 수 백권의 책을 출판했지만 이 책은 직접 썼다. 전쟁 중 포탄에 맞아 숨진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기록도 담겼다. 


장진호 전투는 전쟁사에서도 손꼽힐만한 동계전투이지만 유독 전투가 치뤄졌던 한국에서만은 관심이 덜하다. 미국 헐리우드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제작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하 40˚C의 추위와 수십 만의 중공군과 싸워 필사의 탈출을 진행한 미 해병대 1사단의 기록을 책으로 엮은 고 대표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 ‘불과 얼음’은 2007년 출판한 ‘얼어붙은 장진호’의 전면개작이다. 어떤 차이가 있나?


나 고정일은 한국전쟁의 죄인이다. 그때 10살이었던 나는 우리 가족에게 큰 죄를 졌다. 그 죄를 가슴에 안고 오늘을 살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 미군 통역 장교로 참전한 이범신 선생이 보내준 자료를 바탕으로 ‘얼어붙은 장진호’가 출판됐다. 이 선생은 당시 본인의 수기, 미군의 전투기록, 참전 군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2007년 ‘얼어붙은 장진호’ 출판 후 미국, 중국, 소련, 북한에 장진호 관련 자료를 입수하게 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들이 쓴 회고록에도 장진호 전투에 대한 부분이 많이 소개돼 있다. 낯선 땅에 와서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수 많은 병사들이 죽어간 진격한 기록을 담고 있다.
 
항미원조(抗米援朝)를 명분으로 참여한 중공군 부사령관 강학주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중공군의 입장에서도 장진호 전투를 볼 수 있었다. 전편을 다시 쓰다시피 하면서 생각한 것은 반공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전쟁을 양쪽 모두 정직하게 바라보는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다. 이 작품을 읽은 젊은이들은 우리나라가 미소 냉전시대 어떤 희생을 통해 세워진 나라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젊은 세대가 이 책을 많이 읽기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책은 많이 팔렸나?
 
그리 많지는 않다. 얼어붙은 장진호가 2만권 정도 팔린 것으로 안다. ‘불과 얼음’ 신작이 나온 최근 들어서야 서점가에서 관심을 끌고 독자들이 찾아들고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 장진호 전투에 대해 소개해준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서 해병대 1사단이 국군하고 경쟁하면서 평양을 탈환하고 임진강과 두만강으로 몰아쳐 올라가다 개마고원에서 중공군을 만나 장진호 전투가 발생한다. 1950년 10월 26일부터 11월 13일까지 보름 간 이어졌다. 팽덕회 총사령관 지휘 아래 총 300만 명의 중공군이 조선반도 전쟁에 참전했다.


이 중에서 송시륜 장군이 이끄는 제9병단 25만 병사가 미해병대 1사단 2만5천 병사를 격파와 흥남, 원산 탈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이 12일간 북한 산악지대를 넘어 240km를 행군, 미 해병대 2만5천명을 에워쌌다. 송시륜은 당시 미군을 우리집안에 침입한 뱀이라며 토막을 쳐서 잡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중공군 25만 명이 순식간에 둘러싸고 공격해오니 장방현 진의 미 해병대도 당할 길이 없었다.
 
미 해병대는 결국 흥남 철수 결정을 내리고 중공군의 포위를 빠져나가기로 하는데 그 17일 동안에 바로 장진호 전투의 참혹함이 벌어진다. 가장 큰 무서운 적은 추위고 다음이 중공군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영하 40도의 추위는 극한을 넘는 고통을 안겨준다.


부상을 당해도 이를 치료할 모르핀이 얼어버릴 정도였다. 동상 때문에 톱으로 다리를 잘라낸 군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또 중공군은 자신들 열 명이 죽어도 미 해병대 한 명만 죽이면 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미군들은 죽여도 끝이 없이 몰려오는 중공군 자체가 경악의 대상이었다. 
 







▲6.25전쟁 중 공황상태에 빠진 한 병사를 군목사가 달래고 있다.<사진 제공=고정일 씨>

-‘불과 얼음’에는 팽덕회가 김일성을 만나 ‘이 전쟁은 맥아더와 나의 전쟁이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당시 팽덕회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진출을 목전에 두자 김일성은 벼랑 끝에 몰렸다. 개전을 앞두고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내긴 했지만 당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중공군의 조속한 참전을 호소했다.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바지를 부여잡고 애걸하며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이 이뤄졌지만 처음부터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참전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팽덕회가 ‘미군이 쳐 올라와 압록강변에 진을 치면 더 불안하다. 이걸 막아야 한다’며 지도부를 설득해 참전이 이뤄졌다.
 
중공군은 참전군이라고 칭하지 않고 지원군이라고 명했다. 중국이라는 국가가 참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미국과의 전면전은 막기 위해서다. 당시 소련도 비행기 수백 대와 조종사를 보냈지만 모두 조선인민군복을 입혔다. 미군도 사실 알면서 3차대전에 대한 우려 때문에 모른 채 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 결정에 감복한 김일성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팽덕회는 김일성을 만나서 ‘귀하는 물러나라. 이 전쟁은 맥아더와 나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모든 전쟁지휘권은 중공군이 회수했다. 팽덕회는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끈 중공최고지위사령관이지만 당시 김일성은 유격대 중대장 수준에 불과했다.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불과 얼음은 장진호 전투에 대해 사실을 바탕으로 한 방대한 기록이다. 그런데도 굳이 소설 형식을 빌린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적 서술만으로는 저자의 메시지를 포함 시킬 수 없다. 소설에는 저자의 사상이 들어간다. 내가 생각하는 전쟁에 대한 사상을 기술하기 위해 소설문학의 형식을 빌려야 했다.
 
-고산이 겪은 전쟁은 어떤 것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역사 발전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는 말도 한다.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병사와 여자, 어린이들 얼마나 비참한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옆에서 자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을 잃었다. 기둥이 쓰러져 어머니를 덮쳤고 동생은 폭격파편이 배를 갈라 창자가 터져나왔다. 나는 그곳에서 인간이 아닌 핏덩어리로 살아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피난 기간에 여러 날을 굶었는데 나흘이 지나니 감각이 없어졌다. 미군 부대 주위에서는 미군이 먹고 남긴 음식물인 꿀꿀이죽을 구걸해 연명했다. 미군이 전투하다 떠난 참호를 뒤져 얼어버린 빵조각 비스킷이나 햄 같은 것을 파먹었다. 온 몸에 이가 득실거려 미군이 뿌리는 DDT를 수시로 뒤집어썼다.
 
-가족이 희생당한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평생 멍에로 남아있겠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60년 세월이 흘렀는데 하루에도 한두 번 이상 그날 핏빛 영상이 뇌리에 떠오른다.  60년이 흘렀지만 열 살 기억이 떠나질 않아 전쟁 후유증을 겪는 병자라 할까. 그래서 어머니와 동생에게 죄진 마음으로 항상 살고 있다. 사치스럽고 방만한 것은 생각도 못한다.


어머니와 동생이 어떻게 죽었는데 감히 내가… 아직도 ‘왜 나만 죽지 않고 혼자 살아나왔을까’ 자책감과 고뇌가 풀리지 않는다. 포탄이 떨어졌을 때 서까래와 대들보가 무너지고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그게 동생이었다. 오늘도 일상생활 속에 그날 밤 아기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고산에게 북한은 어떠한 나라인가.
 
베트남에 호치민 같은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로서 참으로 국민을 아끼는 훌륭한 지도자다. 권력자가 아니다. 호치민은 평생 국민복이 두벌이라고 한다. 호치민이 고급스런 궁을 세우고 고급음식을 먹고 그런 것 없었다. 호치민은 죽으면서 ‘공산주의로 안 된다. 미국과 타협하라.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중국 공산당 수뇌부도 청렴결백하다.


중국 공산당 또한 재산 없는 주은래 총리와 그 부인이 죽을 때 월급으로 모은 조그만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갔다. 김일성 김정일 북한은 지금 권력을 세습하고 있다. 김정일은 한국 언론사 사장들 초청해 놓은 자리에서 670만 원하는 프랑스 와인을 내놓았다. 일반 국민은 기아에서 헤매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런 정권은 지속된다면 북한 인민이 너무 불행한 것 아닌가. 
 
-고산은 출판인이면서도 많은 저작을 펴냈고 언론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고정일이 우리 사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 마디로 무엇인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동아일보 사장까지 지낸 남강 이승훈 선생이란 분이 당시 함석훈, 조만식 이광수 같은 학생을 가르치면서 조회 때마다 딱 세 번 ‘이놈들아 정신차려!’ 외치고 단상을 내려왔다고 한다. 그 의미가 상당한 것이다. 식민지 상황에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오늘 신문지상에 올라오는 어지러운 이야기들을 보면 우리 사회 지도층이 각성해야 한다는 것을 절로 느끼게 된다. 정치 경제 교육 고위층일수록 정신차려야한다. 이래선 안 된다. 좀더 겸허하게 정진하고 노력해 북한 동포 도울 힘을 기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