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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국민들에게 김일성(사망), 김정일을 제외하고 북한 고위층 인사 가운데 아는 이름을 대보라면 오진우(사망)와 연형묵, 그리고 조명록 정도일 것이다. 연형묵은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당시 정무원 총리로 남한을 방문하여 주목받은 바 있다.
그 뒤(1992년) 연형묵은 총리직에서 해임되어 자강도당 책임비서로 자리를 옮겼다. 남한으로 치면 총리가 하루아침에 도지사 정도로 발령난 셈인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좌천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다. 1974년부터 맡고 있던 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니, 충분히 이렇게 판단할 만했다.
‘좌천설’에서 ‘김정일의 오른팔’까지
그러나 자강도는 북한의 군수산업체가 집결된 곳으로, 좌천된 것이 아니라 위급한 시기에 연형묵에게 ‘중요임무’를 맡긴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됐다. 실제 1994년 7월 김일성 장례식 때 연형묵은 주석단 서열 21위로 건재함을 과시했고, 1998년에는 국방위원에 임명됐다.
2001년 2월 1일 평양방송은, 김정일이 1998년 1월 자강도에 현지지도를 갔을 때 연형묵의 가족을 열차숙소로 불러 격려했다는 일화를 보도했다. 연형묵에 대한 김정일의 두터운 신임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2001년 북한에서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 자강도 사람들이 억척스러운 정신으로 시련을 이겨냈다는 내용의 2부작 영화 <자강도 사람들>을 선보였는데, 연형묵이 김정일의 마음에 쏙 들게 자강도 현지사업을 잘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연형묵에게 붙여진 별명은 ‘김정일의 오른팔’이다.
노동신문 보도로 알려진 자강도당 책임비서 교체
지난 6일자 노동신문은 자강도당 책임비서를 ‘박도춘’으로 소개했다. 이로써 연형묵이 자강도당 책임비서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이 대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노동신문은 수년 치 신문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오자(誤字)를 찾아볼 수 없다. 오자를 남기면 사내(社內)에서 비판을 받는 것은 물론 정치적 처벌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노동신문 교정 기자들은 오자를 남기지 않는 것을 생명처럼 여긴다. 따라서 도당 책임비서의 이름을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연형묵이 좌천된 것이냐, 더 높은 직위로 옮겨간 것인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가능성 ① – 와병으로 인한 은퇴? |
먼저 연형묵은 1931년생으로 적지 않은 나이인데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심장병) 알려져 와병(臥病)으로 인해 공직을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다.
그러나 북한은 특별히 실무적인 공백이 생기는 자리가 아닌 이상 인민군 보위사령관 원응희(2004년 5월 사망)처럼 오랜 와병 중에도 현직을 유지하다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파서 은퇴했다가 죽은 게 아니라 “수령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을 바쳐 일하다 죽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가능성 ② –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승진? |
둘째, 연형묵이 더 높은 직위로 올라갔다면 남은 자리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자리를 예상해볼 수 있다.
현재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조명록인데 역시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췌장암, 만성 신부전증으로 러시아와 중국에서 치료) 한동안 북한 언론매체에 나타나지 않다가 올해 2월 ‘선군혁명 총진군대회’를 시작으로 각종 행사에 참석한 모습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많이 마르고 창백해져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여하튼 연형묵이 그런 조명록의 자리를 승계했을 수도 있지만 현재 연형묵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데 현직을 놓으면서까지 굳이 제1부위원장의 공백을 채웠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가능성 ③ – 근신 혹은 숙청? |
셋째, 장성택처럼 연형묵도 김정일의 신임을 잃고 근신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후계구도를 위해 연형묵도 숙청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연형묵과 김정일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탈북자들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연형묵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런 면에서 장성택과 다르다. 또한 김정일에게 직언을 곧잘 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북한 내각의 경공업 분야에서 일했던 탈북자 김태산씨는 1998년 김정일이 자강도를 현지지도 했을 때 연형묵이 “인민이 굶고 죽는 상황이니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하게 건의했으며, 이 때문에 호위병이 권총까지 꺼내 들었으나 김정일이 제지하여 오히려 연형묵을 칭찬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김씨는 “김정일 앞에서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연형묵 뿐”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 지난해 연말 와병설 이후 올해 4월 25일 ‘선군혁명 총진군대회’에 등장한 연형묵 |
따라서 김정일이 비록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큰 실수가 아닌 이상 연형묵을 좌천시킬 가능성은 낮으며, 혹시 그랬다면 김정일 개인에게는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정일의 현실판단능력을 붙잡아줄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연형묵이 권력을 넘보다가 숙청되었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장성택의 경우 김경희라는 배경이 있었지만 연형묵은 지금의 위치에서 무모하게 더 큰 권력을 누려야겠다는 욕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동안 김일성 김정일에게 대단히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김정일의 후계구도에 적극적으로 앞장 설 인물일 망정, 걸림돌로 여겨져 숙청되었을 가능성 역시 낮다.
가능성 ④⑤ – mission or death? |
넷째 1992년처럼 연형묵에게 또 다른 ‘중요 임무’를 주고 자리를 옮겼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엔 연형묵의 나이가 너무 많다. 올해 74세.
다섯째, 연형묵이 죽음에 임박했거나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는 전문가도 있다.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김용순은 2003년 6월 16일에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 입원치료 중 10월 26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개석상에 한 동안 김용순이 등장하지 않아 ‘뭔가 이상하다’는 소문이 돌던 중 갑자기 사망소식이 전해졌다.(김용순이 사망한 날은 고영희의 생일로, 고영희 생일파티에 참석한 후 만취상태에서 직접 차를 몰고 돌아오다 사망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사망 직전일 가능성 또는 사망했을 가능성은 모두 낮다. 사망할 때까지 현직을 유지하는 전례에 어긋나며, 사망했다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김용순처럼 노동신문에 바로 부고를 전했을 것이다. 연형묵 정도의 인물이면 장례도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다. 김용순이 죽자 북한에서는 영웅칭호를 수여하고 <빛나는 삶의 품>이라는 기록영화까지 제작한 바 있다.
어떤 경우든 좋지 않은 소식
이렇듯 여러 가능성 가운데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 중 높은 가능성으로 점쳐지는 것은 근신하고 있을 가능성, 다른 중요임무를 맡고 자리를 옮겼을 가능성이다.
근신하고 있다면 김정일을 그나마 통제하던 ‘브레이크’ 장치에서 중요한 나사 하나가 빠져 나간 것을 의미한다. 다른 중요임무라면 연형묵이 평생 담당했던 것은 ‘군수산업’인데, 이 시국에 또 무슨 일을 하려고 빠져나간 것인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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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NK 분석팀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한영진 기자 (평양 출신, 2002년 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