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임기말 부시 외교정책

지난 2001년 1월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안돼 `9.11 테러’라는 초유의 사태를 당하며 위기 속에 임기를 시작한 조지 부시 행정부가 퇴임 5개월을 앞두고 또다시 중대국면에 직면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주택경기 침체 및 금융 불안이 가중되면서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고 국제외교 무대에서도 악재가 속출하며 엎친 데 덥친 격이 되면서 `최악의 무능정권’으로 기록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부시 행정부 주변에 드리우고 있다.

특히 최근 발생한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은 탈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일방통행식 외교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부시 행정부에 러시아라는 `잠에서 깨어난 불곰’과 같은 외교 파트너의 존재를 실감케 하고 있다.

◇묘책없는 그루지야 사태 =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이라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와 같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처한 부시 행정부로선 사태를 수습할 묘책이 없다는 게 무엇보다도 고민이다.

부시 행정부로선 러시아에 외교적.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등 강력한 대응카드를 뽑자니 이라크 사태 및 이란핵문제, 테러와의 전쟁 등 중요 국제현안에서 러시아의 공조가 절실하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또 러시아의 그루지야 공격을 그냥 지켜보자니 러시아가 옛 소련 연방 국가 및 동유럽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의 이 같은 고민은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공격, 그루지야 영토의 절반을 장악한 뒤 프랑스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성립됐음에도 부시 대통령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러시아의 조속한 철군을 촉구만 하고 있는 데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부시 대통령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브뤼셀에 급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과 머리를 맞댔지만 “러시아 군이 물러나지 않으면 현재로선 러시아와는 `통상적인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는 공포탄과 같은 으름장만 놓고 있을 뿐이다.

그루지야 사태를 둘러싼 미-러간 긴장은 상당부분 미국이 초래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동안 미국은 구소련 연방국가 및 동유럽 국가들을 NATO 회원국으로 가입시키는 등 대(對)러시아 블록을 확대해가며 러시아를 압박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핵공격으로부터 유럽과 미국을 방어한다는 명목 아래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방어(MD) 시스템 배치를 강행하는 등 그야말로 일방통행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더이상 미국의 눈치만 살피던 `옐친의 러시아’가 아니었다.

지난 8년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 하에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고유가 덕분에 국부를 창출,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러시아는 미국과의 정면대결을 불사하고 나온 것.

때문에 부시 행정부로선 이제와서 동유럽 MD 배치를 철회하며 `러시아 달래기’에 나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고 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무샤라프 퇴진 =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핵심파트너로 간주했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의 퇴진은 부시 외교정책의 도덕성을 다시 도마에 올려 놓았다.

그동안 부시 행정부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통치이념으로 강조하면서도 아프간 전쟁을 이유로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독재정치 체제를 굳혀온 무샤라프 대통령에게는 온갖 혜택을 베풀어 왔다.

뿐만아니라 작년 베나지르 부토 총리 암살 사건을 계기로 파키스탄 내에서 무샤라프 퇴진 압력이 높을 때도 미국은 오히려 무샤라프를 비호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여왔다.

특히 미국은 무샤라프가 탄핵을 피해 자진 사퇴한 상황에서도 파키스탄 내에 반미여론이 확산되는 것을 의식, 새 정부와 적극적인 협력을 다짐하면서도 무샤라프의 망명 요청시 검토하겠다고 언급하는 등 국제사회에 모순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수렁으로 빠져드는 아프간 = 임기말 부시 행정부의 외교력은 아프간에서도 계속 시험을 받고 있다.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알카에다 세력이 다시 세를 얻으면서 미군 주도의 군사작전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막대한 퍼붓기식 지원에도 불구, 새로 탄생한 아프간 정부는 부패와 무능에 빠져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서와 같은 아프간 사태의 진전을 위해 미군 증파를 검토하고, NATO 회원국을 비롯해 동맹국에도 지원을 당부하는 등 손을 내밀고 있지만 어느 나라로부터도 `화끈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19일에는 아프간에서 군사활동을 벌이던 프랑스군 10명이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 미국과 동맹국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매듭 풀지 못하는 이란핵개발 = 한때 이란이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하는 대신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독일이 경제지원 등 포괄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져가던 이란 핵문제도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내부에선 이란에 대한 군사적 제재를 포함한 강경한 목소리가 세를 얻어가고 있고, 이란도 미국 등 서방과의 대결도 불사하겠다는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여전히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면서도 유엔 안보리를 통해 대(對)이란 제재방안을 강구하는 등 당근과 채찍을 동원하고 있지만 이란을 움직이는 데는 여러 가지로 힘겨운 상황이다.

◇갈 길 먼 북핵, 이라크사태 = 영변 핵시설 불능화, 냉각탑 폭파, 북한의 핵신고서 제출 등으로 그나마 나름대로 성과를 드러내던 북한 핵문제도 최근에 와서 다시 정체돼가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이 핵신고 내역에 대한 검증의정서에 합의를 거부한 채 미국이 먼저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라고 요구하는 등 물러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19일 “공은 북한쪽 코트에 넘어가 있다”며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를 위해선 핵검증체제에 합의하라고 압박하고 있지만 북한은 오히려 미국쪽에 책임을 돌리며 맞공세를 벌이며 샅바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라크 사태도 미군 증파에 힘입어 이라크 대부분 지역에서 안정을 되찾는 등 진전을 보고 있지만 미군 철수 등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또 이라크가 석유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획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여전히 막대한 돈을 퍼붓고 있어 미국내 불만이 높아가고 있어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30% 안팎에 머무르는 등 역대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 반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부시 행정부가 곧 퇴임을 앞두고 있어서 어느 것 하나라도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할 수 있는 `추동력’이 없다는 점이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