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해치는 이념은 더 이상 이념이 아니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바꾸는 힘을 주시고,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인내의 힘을 주소서. 그리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지혜를 주소서. -라인홀드 니버


1. 니버의 기도와 한국전쟁


천안함 사건을 두고,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는 한 유명 정치인의 발언에 대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부분적으로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이 존재한다.


성폭행을 당한 뒤, 오히려 일탈과 타락을 일삼으며 자신의 치욕적 기억을 애써 정당화 하거나,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시신 곁에서 수개월가량 생활하는 등의 모습은 인간이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실들에 대해 항상 초연할 수 없는 약한 존재이다. 니버의 기도는 인간이 세계와 마주하였을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한계 앞에서 갖는 간절한 소망을 보여준다. 사실을 사실로서 인식하는 지혜, 그것을 인내하는 의연함, 그리고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갈구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점차 역사가 되어 가고 있다. 전쟁을 삶의 한 부분으로 간직하는 세대가 점차 사라지고, 전후세대가 주요 경제 행위 계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역사로서의 한국전쟁’은 사실로서의 한국전쟁만큼이나 중요하다.


특히 전쟁 60주년이라는 현 시점은 한국전쟁에 대한 올바른 역사의식의 정립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의 지식인들과 대중에 의해서 생산되는 한국전쟁 담론은 위험한 수준이라 생각한다.

올바른 역사의식이란 당시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이다. 지금의 세계관과 상식을 기준으로 한국전쟁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시 전쟁을 겪은 세대에 대한 모욕이며, 나아가 또 다른 한국전쟁을 이 땅에 가져오는 안일함이다.


당시의 시점에서 ‘변화시킬 수 없는 사실’과 ‘변화시킬 수 있었던 사실’을 구별해내고,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어떻게 대응 했었는가 따져보아야 한다. 즉, 당시의 우리 국민이 과연 니버가 하나님께 갈구했던 그 지혜와 용기를 갖추었는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 점을 논해보고자 한다.


2. 1950년 6월 25일 당시 ‘주어진 사실’


그렇다면 먼저 당시의 세계 및 한반도 질서에 있어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었던 ‘사실’, 즉 주어진 조건이란 무엇이었을까?


주어진 조건1: 급변하는 세계 질서와 새로이 등장한 강대국

1950년대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편되는 시점이었으며, 이 두 진영에서 약소국들은 제3의 길을 걷기란 실로 어려웠다. 특히 일본의 항복에 의해 수동적으로 해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강대국의 세력 확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물론 냉전질서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단지 당시의 냉전질서 형성은 우리에게 있어 주어진 사실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 점은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전체 역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엄청난 변화이며, 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 균형을 유지하고 안정성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해왔으며, 이에 대해서 어떠한 민족과 국가도 저항할 수 없었던 수직적 관계 속에서 5000여년의 역사가 흘러온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바로 이러한 동아시아 질서가 최초로 뒤집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이후 미국이 동아시아 질서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동아시아는 중국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국가를 맞이하게 되었고,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극도의 혼란이었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온갖 종류의 이념과 세계관이 난립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은 극빈을 극복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당시의 우리 민족에게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는가’라는 비판은 당시의 관점에서 봤을 때 비현실적인 역사의식이다. 이러한 급격한 역사적 변화와 혼란 속에서 바로 김일성이라는 인물의 지배의 야욕이 또 하나의 사실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주어진 조건2: 김일성의 한반도 지배의 야욕

많은 이들은 한국전쟁을 ‘이념전쟁’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물론 한국전쟁은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그리고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대립의 극단적 형태로서, 제이차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떠오른 두 강대국,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의 형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본질적 이유가 결코 아니다. 이념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한 조건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여러 주장들이 ‘적용 가능한 형태’로 다듬어진 것을 말한다.


사람을 해치는 이념이란 더 이상 이념이 아니다. 이념은 사람을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이념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모순이다. 즉,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반대 세력을 무참히 무력으로 짓밟는 행위는 스스로 자신의 이념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전쟁은 결코 역사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다면 김일성에 의해 시작된 한국전쟁은 과연 이념전쟁의 테두리 안에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신성할 수 있을까?

김일성에게 있어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었다. 만약 사회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유토피아를 창건하고, 그로 하여금 인민을 해방시키고 구제하려는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또 다른 인민을 학살하고 희생시킬 수 있었겠는가? 북한군의 퇴각 당시 무참히 벌어졌던 양민 학살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해방과 이론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김일성의 한국전쟁. 그것은 결코 이념을 위한 전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념이라는 명목 아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3. 우리의 선택으로서의 한국전쟁


니버의 기도가 진정 가치 있는 이유는 바로 현실에 대응하는 인간의 올바른 태도가 극단으로 치우쳐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무조건적인 순응의 태도를 지양하고 있으며, 동시에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상만을 건설하려는 급진적 태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바탕으로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바꿀 것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의 필요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1950년 남한 정부와 국민이 선택한, 혹은 전쟁을 받아들이기로 한 우리들의 태도는 과연 얼만큼 지혜로웠던 것일까? 이 부분에서는 한국전쟁은 당시 주어진 현실 조건에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최대한을 바꾸었던 진정 용기 있고 지혜로웠던 ‘선택’이었음을 보이고자 한다.


선택1: 자유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하루아침에 갈라놓아 버렸던 베를린 장벽, 그리고 그것을 넘어가려는 수많은 동베를린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의 할머니가 있었다. 그 할머니는 서베를린으로 넘어간 직후 담에서 떨어져 사망하였다. 이러한 유명한 일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그것은 바로 죽더라도 ‘자유의 땅’에서 죽겠다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한국전쟁은 실로 처참한 전쟁이었다. 단기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전쟁을 겪음으로서 내가 죽을 확률과 그로 인한 나의 이익의 침해는 공산권 국가에서 삶으로서 침해되는 나의 이익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그러나 우리는 싸울 것을 택했다.


바로 내가 지금 처참히 내 몸이 찢어질지라도 마지막까지 자유를 외치는 한 인간의 본능을 다함으로써 생을 마감하겠다는 우리 민족의 결단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혹자는 한국전쟁을 이승만 전 대통령 개인의 권력 추구 현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유로 들어, 어떻게 한국전쟁을 남한 민족의 선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사실 이승만이라는 한 개인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동기에 의해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또한, 실제 이승만 전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가정한다 치더라도, 전국적으로 일어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학도병들의 열정, 그리고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낸 훌륭한 우리 군인들의 희생정신은 결코 한 개인의 권력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김일성 개인의 한반도 지배야욕은 이미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김일성을 설득이나 회유, 혹은 대화 등으로 변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좌우합작을 위해 북한으로 떠났던 김구 선생께서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돌아왔던 사실은 바로 김일성의 야망이 변화시킬 수 없는 사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김일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최소한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못하도록 방어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진 것이고, 이 땅에 유엔군이 참전하여 우리 민족을 지킬 수 있도록 외교라는 선택으로 이어졌다.


선택2: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유연한 대처

뜻하지 않게 식민지 국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한반도. 그러나 여기서 해방이라는 의미는 단순한 한반도의 지위 변화가 아니었다. 바로 서방세계에서 밀려들어오는 자유민주주의의 물결,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결단의 결과였다.

엄청난 가난과 식민지 시대에 겪었던 차별 등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충분히 사회주의에 동화될 수 있는 이유를 마련해주었다. 실제 대부분의 식민지 국가들은 사회주의적 독립 전쟁 노선이 매우 강화되어 있었고, 그 결과 중국을 비롯한 국가들이 실제 공산화되었던 것이다.


특히 한반도의 입장에서 중국의 공산화는 엄청난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5000여년을 중국의 정치문화 밑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이 중국과의 다른 정치 체제를 영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패권 세력이 중국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며, 실제 앞으로의 세계는 중국 중심이 아닌 미국 혹은 서방 중심의 세계가 될 것이라는 예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미국에서 공부하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묻어난 것이었으며, 식민지시대에서 실제 근대화를 경험하였던 관료 집단의 통찰력이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참으로 강력한 체제이다. 개개인의 자유화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강력한 국가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바로 미국의 힘, 그리고 서방 유럽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힘은, 개개인의 자유가 자발성과 번영으로 이어져, 사상 유래없는 강력한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국전쟁 이후 독재정치를 하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며, 이점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다는 주장의 설득력을 다소 떨어뜨린다.

그러나 그 속의 내용과 관계없이, 일단 우리 남한이 전 세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자유민주주의의 세력으로 편입되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두 번째 위대한 선택인 것이다. 미국의 마셜플랜으로 독일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아무런 자본과 기술이 없이도 서방세계의 도움을 통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 점에 우리 정치의 민주화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한국전쟁에 임한 것과,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 체제를 구축한 것은 바로 우리 남한이 전 세계의 주류의 흐름에 편입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으며, 그로인해 우리의 물질적·정신적 풍요를 이루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북한 주민이 대한민국 국민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이 글의 주장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과 남한을 모두 경험해보지 못한 채 자신의 망상과 극단적 비난에 사로잡혀 만들어낸 일종의 허구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당시 공산화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민족의 통일과 주체적 발전 능력 등 다소 비현실적인 구호에 집착해있었다면 결코 우리는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4. 결론: 또 다시 죽임을 당하는 우리의 국군


천안함 사건이 선거에 미미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물론 안보가 정치에 영향을 미쳐 소위 말하는 北風에 의해 선거의 승패가 갈리는 것은 지극히 후진적인 현상이며, 이번 선거는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더욱더 진보한 형태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반대의 진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정치적 승패가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현 상황은 참으로 위험하다. 여야의 승리여부에 상관없이 천안함 사건은 우리에 대한 적의 침략이며, 그로 인해 우리 무고한 장병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동시 지방선거의 결과가 천안함 사건을 가리고 있다.


선거에 승리한 일부 세력은 또 다시 음모론을 제기하고, 또 다시 국론은 분열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 국군이 적에 의해서 한번,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 의해서 두 번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그것은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역사의 유물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이며, 결국 얼마든지 현재형이 될 수 있는 반복가능한 역사이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역사를 구성해나간다. 또 다른 한국전쟁,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경험했던 한국전쟁을 냉철하면서도 올바른 자세로 평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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