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독 정상회담이 南北 정상회담에 주는 교훈

분단 시 동서독 간에는 7차례의 공식 정상회담과 6차례의 비공식 정상접촉이 있었으며, 공식회담 가운데 4차례 회담은 베를린장벽 개방 이전에 있었고 3차례는 베를린장벽 개방 이후 동독정권의 붕괴과정이 시작된 후 개최된 회담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전에 있었던 네 차례에 걸친 정상회담 가운데 세 차례의 회담은 서독의 요청과 소련의 종용에 따라 개최되었고 콜-호네커 회담은 동독 측 필요에 따라 소련의 승인 하에 개최된 회담이었다. 동서독 정상회담은 양측 수뇌 간의 회담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는 크나 1987년 서독 수도 본(Bonn)에서 있었던 콜-호네커 회담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질적 성과가 없는 형식적 만남에 불과했다.

동서독 간의 공식 정상회담

브란트-슈토프 간의 1·2차 정상회담 

1970년 3월 19일 개최된 동서독 간의 첫 정상회담은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69년 10월 28일 취임연설에서 양독 간의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동독 측에 협상을 제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브란트의 제의는 기민당(CDU) 정부의 친서방 정책과 공산권에 대한 강경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나 소련 및 동독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데 목적을 둔 것이며 브란트가 새로이 추진한 “신동방정책”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였다.

서독과의 접촉을 체제위협 요인으로 간주하여 가급적 기피해 오던 동독 울브리히트 정부가 이 회담에 응한 것은 소련의 종용 때문이다. 당시 미·중 접근에 위협을 느낀 소련은 유럽의 긴장완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출범, 2차 대전 후 설정된 새로운 국경선에 대한 국제적 인정 확보 등을 위해 서독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소련의 의도를 간파한 브란트 총리는 1969년 7월 측근인 에곤 바(Egon Bahr) 총리실 차관을 모스크바에 파견, 모스크바 조약 체결을 위한 비밀교섭을 진행함으로써 동서독 정상회담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1970년 3월 동독 에르푸르트에서 개최된 제1차 정상회담에서 서독 측은 ①양국이 독일민족의 단일성을 수호할 의무를 갖고 있고 서로는 외국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②상호 차별배제, 영토의 존중, 분쟁의 평화적 해결, ③상대방 사회구조에 대한 폭력적 변화 시도 금지, ④선린적 협력관계 유지 등 6개항을 제안했다. 동독 측은 ①국제법에 따른 동등한 정상관계 수립, ②서독 정부의 단독 대표권과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 ③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승인과 유엔 동시 가입, ④동독인 서독이주에 대한 1,000억 마르크의 보상 등 6개항을 제안함으로써 양측 간에는 5월 21일 서독 카셀에서 제2차 회담을 하기로 한 것 외에 실질적인 합의사항 없이 회담이 종료되었다.

1970년 5월 개최된 2차 회담에서 서독 측은 양국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정책으로서 ①무력 포기와 영토 불가침, ②할슈타인 원칙의 포기, ③상호 간의 여행, 교류 및 이산가족 상봉의 확대, ④유엔 동시가입, ⑤연락 대표부의 교환 등 20개 항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동독 측은 ①최우선 조건으로서의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인정, ②통일의 불가능성, ③유엔 동시 가입 등을 주장함으로써 이 회담도 일체의 합의 없이 종료되었다.

회담장소가 에르푸르트와 카셀로 결정된 것은 서독국민의 86%가 베를린 이외 장소에서의 회담개최를 반대했으나 동독의 거부로 불가능하게 되자, 양국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에르푸르트와 카셀이 선정되었다. 동서독 간의 정상회담에서 절차문제 등 사소한 부수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가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주최 측의 방식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절차문제로 회담이 난항을 겪는 일은 없었다. 예를 들어 동독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에서는 협상 테이블에 양국 국기를 비치했으나 서독 개최 시에는 국기를 배치하지 않았다.

또 제1차 회담 시 에르푸르트 역 청사에는 “서독연방군을 때려 부수자”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제2차 카셀회담 시에는 회담장 밖에서 서독 극우단체와 극좌단체 간에 충돌이 발생, 극우단체 요원들이 동독 국기를 훼손하고 동독대표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서로가 이를 문제시하지 않아 정상회담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1·2차 정상회담은 여건이 성숙지 않은 가운데 소련의 종용에 따라 개최됨으로써 서로 간의 견해 차이를 재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슈미트-호네커 간의 제3차 회담

제2차 정상회담이 개최된 후 11년 만인 1981년 12월 동베를린 근교에서 개최된 슈미트-호네커 간의 제3차 정상회담은 서독 측이 요청했으나 동독 측 사정으로 1980년 1월 및 8월 22일 등 2차에 걸쳐 연기된 후 개최되었으며 이 역시 동독이 소련의 종용 때문에 서독 측 요청을 받아들인 회담이다.

이 회담이 열리던 시기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 미·소 간의 제2차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Ⅱ) 교섭의 중단,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의 유럽배치에 대응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퍼싱 Ⅱ 미사일 서독배치 결정으로 이른바 신냉전 기류가 고조되던 시기로서 서독에서의 핵전쟁 위험은 높아진 반면, 서독으로서는 자기들만의 독자외교의 한계를 다시 절감해야 하던 좌절의 시기였다. 또 동서독 관계에서는 호네커 서기장이 소위 “게라 요구”를 통해 양독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①동독 국적의 인정과 서독 기본법 116조(동독인도 서독국민으로 인정한 국적조항)의 폐기, ②양측 상주대표부의 대사관 승격, ③동독 정치적 폭행사례 기록을 위한 잘츠기터 소재 중앙기록보존소의 폐쇄, ④엘베강 중앙선을 동서독 국경선으로의 확정 등을 내세움으로써 양독관계가 활로를 찾기 어려운 시점이었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평화와 긴장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긴장 고조의 원인을 상대 진영 핵무기의 유럽배치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회담 후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양측은 ①독일 땅에서의 전쟁발발을 원치 않으며, ②긴장완화와 평화를 위해 함께 기여하고, ③기본조약에 바탕을 두고 상호관계를 발전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양측은 기존의 교류·협력사업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합의를 이루고 상호 간의 입장 차이를 재확인했을 뿐 실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콜-호네커 간의 제4차 회담

1987년 9월 7일부터 11일까지 서독수도 본(Bonn)에서 개최된 이 회담은 과거와는 달리 동독이 원해서 열리게 된 회담이다. 이 회담은 경제악화로 서독의 지원이 필요해진 동독의 제의로 1984년 9월 추진했던 정상회담이 3년간 연기된 후 개최된 것이다. 1984년 회담이 연기된 것은 ①신 냉전분위기가 아직 해빙무드로 돌아서지 않았고, ②서독인 여행자가 동독 검문소에서 동독군인의 가혹행위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 동서독 관계가 냉각되었으며, ③소련이 1982년 집권한 기민당 정부에 신뢰를 갖지 못한 데다, ④동독이 1983년 및 1984년 2차에 걸쳐 서독으로부터 19억 5천만 마르크의 현금차관을 얻어간 것을 계기로 소련이 동유럽 위성국가의 독자적 서방접촉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①레이건 행정부의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화해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미·소관계가 호전되고, ②1987년 4월 동독을 방문한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호네커의 서독방문을 양해했고, ③1982년 집권한 기민당 콜 정부가 사민당의 대동독 교류·협력 기조를 계승하면서 동서독 주민 간의 왕래와 교류 확대를 희망했기 때문에 회담성사가 가능해졌다.

동독 측은 이 회담에서 경제지원과 외교적 승인 확보를 중요시한 반면, 서독 측은 동서독 주민 간의 왕래 확대와 민족적 유대의 강화에 목표를 두었다. 회담 결과, 양측은 ①「원자력 안전을 위한 정보와 경험교환 협정」 등 3개의 협정 서명, ②방사능 및 환경오염에의 공동대처, ③동독주민의 여행규제 완화, ④동독 내 반체제 인사들의 인권개선, ⑤청소년 및 도시 간 자매결연 추진 등에 합의함으로써 동서독 관계가 실질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와는 달리 이 회담이 성공한 것은 국내외 환경변화가 미친 영향 외에도 양측이 실현 가능한 분야에 논의를 집중한 데다, 이제까지 호네커의 방문을 거부해왔던 콜 정부가 외국 국가원수에 상응하는 파격적인 의전행사로 호네커를 후대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동독을 국제법적으로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내독 관계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서독 측은 동독의 국가연주, 국기 게양, 의장대 사열 등 국빈급 영접을 함으로써 동독인의 서독여행 확대 등 여러 분야에서 동독 측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콜 정부의 이러한 환대는 기민당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야당인 사민당은 초대 아데나워 총리 이후 지속되어 온 기민당의 보수적인 내독정책이 드디어 끝장났다고 평가하면서 양국 의회 간의 정상적인 관계수립과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의 폐쇄를 요구했다. 이런 비난에 대해 통일 후 콜 총리는 회고록에서 “양독 간 국경의 문을 더 활짝 열기 위해 나는 에리히 호네커의 서독방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호네커의 방문은 서독을 위해서도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였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러나 서독 측이 강력히 요구하여 회담 시 양측 대표의 연설을 동서독 주민들에게 함께 생중계하고, 이 연설에서 콜 총리가 동독 측의 반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서독정부는 통일 의지를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천명하여 동독주민들에게 희망을 준 것과 1986년 200만 명에 불과하던 동독인의 서독방문이 1988년에 675만 명으로 증가한 것은 큰 성과로 평가된다.

베를린장벽 개방 이후의 4차례 회담

1989년 12월 드레스덴에서 있었던 콜 서독총리와 모드로우 동독총리 간의 제5차 및 제6차 정상회담은 시위와 경제파탄에 직면한 동독정부가 서독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제의한 회담이다. 드레스덴 회담에서 모드로우는 동독 경제상황을 설명하고 2차 대전 후 동독만이 전쟁배상금을 지불했다는 점을 들어 이에 대한 보상(모드로우는 “부담조정”으로 표현)으로 120억 마르크를 요구했으나 콜 총리가 명목상의 부적절성을 구실로 거절했다. 양측은 조약공동체의 구성을 위한 협력, 20억 마르크의 공동여행 기금창설, 차관증액, 의무환전 제도 폐지, 정치범 석방, 브란덴부르크 문 개방 등에 합의하고 조약공동체의 틀 안에서 일련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협력해 나가기로 약속했다.

1990년 2월 18일 모드로우 총리가 17명의 각료를 대동하고 온 본(Bonn) 회담에서 동독 측은 서독 측의 인민의회 선거운동 참여는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면서 통화 통합과 기본법 23조에 의한 통일에 반대했다. 이 회합에서 모드로우는 2월 3일 다보스 비공식 만남에서 콜 총리에게 요청했던 150억 마르크의 지원을 재차 요청했으나 콜 총리가 거부하면서 50억 마르크의 긴급지원 계획을 제시하자 통화 및 경제 동맹 구성을 협의하자는 콜 총리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로 집권한 로타 드메지어 총리가 4월 24일 본에서 콜 총리와 회담을 갖고 화폐·경제·사회통합 조약 체결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독일통일 작업은 급진전 되었다.

평가 및 시사점

동서독 간의 정상회담은 1987년 콜-호네커 회담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소련의 종용 없이는 성사 자체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사례는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동서독의 경우 정상회담이 대부분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상호교류의 물꼬를 트기보다는 기존교류 관계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상회담 성과를 과도하게 기대할 경우 무리한 합의를 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 동독 측은 서독과의 정상회담이나 교류가 내부체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 가급적 이를 기피하려 했다. 따라서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할 경우 그 진의가 무엇이며 내부체제 단속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더욱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정상회담 시 견해차이가 명백한 문제의 논의는 가급적 회피하면서 합의 가능한 핵심의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소한 절차문제나 명분문제는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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