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을 빼앗기면 대한민국이 없어진다”

1951년 4월. 개성·문산 축선으로 침습해 온 중공군 제19병단의 대병력을 맞아 파평산에서 최대의 혈전을 펼쳤다.


김점곤 육군소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 12연대는 중공군을 격퇴함과 동시에 포위망에 쌓인 연합군을 구출하고 적의 춘계공세를 완전 좌절시켰다. 김점곤 육군 소장은 이 ‘임진지구 전투’로 1953년 8월 27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20호)을 수여받는다.


김 소장은 국방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군에 입문했다. 1946년 6월 ‘10115’ 군번을 부여받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개성 이서 지역의 38도선 방어를 담당하던 제1사단 12연대의 부연대장으로 임명된다. 


6.25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에 맞서 개성, 문산, 파평산, 봉일천 일대에서 방어전을 전개했다. 그리곤 한강을 넘어 시흥으로 철수했다.


이후 적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지연시킨 음성지구전투를 비롯해, 제15사단을 기습하여 이들의 남진을 저지시킨 화령장전투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지연전을 전개하며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할 무렵 제6사단과 함께 전개한 영강전투에 참전, 북한군 제2군단의 침공을 저지한다.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한 제1사단은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의 8월 공세를 겪는다.


김점곤 소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부동 전투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 왜 더 이상 후퇴를 할 수 없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다부동의 낙동강 전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지연 작전이었지만, 도착 뒤의 전쟁은 방어전이었다. 지연전과 방어전은 다르다. 방어전이 더 절실하고 처참하다. 이곳을 내주면 대구와 부산은 위험했다. 자칫 대한민국이 없어질 뻔한 위기였다. 다부동 전투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그때 다부동에서 밀리면 미군이 한국군을 일본으로 데려가 재편성해서 전투를 치른다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제주도로 옮겨가 최후 항전을 벌일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얘기다.”


한 달에 걸쳐 계속된  다부동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파리를 지키기 위해 연합군이 펼쳤던 ‘베르뎅전투’에 비유될 만큼 처절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다. 그가 지휘하는 제12연대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 전차 4대를 파괴하는 등 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다.








▲다부동 전투에서 붙잡힌 인민군 포로들.  출처: 전쟁기념관


그는 6.25발발 초기부터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압도적인 지휘력과 용병술을 보였다. 제1사단 12연대장으로 재임하면서 치열한 접전을 거듭했고 난공불락을 호언하던 평양을 함락시켰다.


평양에 입성한 제12연대는 재정비할 여유도 없이 북진을 계속했다. 10월 25일 청천강변에서 적 제1사단의 잔여부대 병력 2개 연대와 강계로부터 남하한 8로군 제71단 약 8,000명으로부터 반격을 받았다.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세의 불리함을 판단한 김 대령은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사단 공격제대로서 수차에 걸친 맹공격을 감행, 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10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적을 연파하고 청천강을 넘은 제12연대는 안주를 거쳐 진격을 계속하여 태천에 도달하였으나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평양·사리원을 거쳐 38도선 이남까지 후퇴하였다. 


이후 그는 제1사단의 우익연대장으로서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부 임진지구전투에 참전한다. 이 전투에서 그는 적의 제2차 춘계공세를 무력화시킨다. 그가 발휘한 탁월한 부대 지휘력과 임기응변의 기지 및 전략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 안개를 이용하여 침공해 온 적의 대병력을 포착해 섬멸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또한 지척에 있는 수도 서울을 방어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그는 시종일관 진두지휘를 통해  적의 대병력을 섬멸했고, 인접부대인 미 제3사단 전차중대와 보전협동으로 적에 이중 포위된 영국군 42명을 구출한다. 제1사단은 임진지구전투에서 8,00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42명을 생포하는 대전과를 거두어 적의 제2차 춘계공세를 무력화시키고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52년 10월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제9사단장으로 전보되었고, 이어 육군본부 인사국장을 거쳐 1953년에 제6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던 중 휴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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