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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목사 납치에 가담했던 조선족 협조자를 통해 북한 당국이 김목사 납치를 직접 기획 실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 공식 발표(6.25전쟁 이후)에 의하면 현재까지 487명이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 납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북한으로 납치된 피해자 13명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여온 결과, 2002년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납치사실을 시인하고 생존자 5명을 일본으로 송환했다. 지난 97년 결성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하는 전국협의회’ 상임 부회장을 맡고 있는 니시오카 쓰토무(동경기독교 대학 교수) 씨를 <데일리엔케이> 사무실에서 26일 단독 인터뷰했다. ‘구출회’는 1997년 결성 이후 ‘가족회’와 함께 일본 납치자 문제 해결에 앞장서온 대표적인 NGO다.
– 북한이 많은 일본인을 조직적으로 납치한 시기와 그 목적은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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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본격적으로 일본인을 납치한 때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1960년대부터 최근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970∼80년대 이 시기는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이후, 3호청사(노동당내 대남정책과 대외공작의 총본산)를 장악하고 대남공작을 총괄하기 시작한 때이다. 김정일은 그동안의 대남공작 성과가 없다면서 간부들을 물갈이하고 새로운 공작원 교육 지침을 내리게 된다. 그 내용이 공작원의 적구화(적대구역화), 현지화를 철저히 하기 위해 현지교사를 직접 데려와 교육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 김정일이 납치를 직접 지시했다는 것인가.
당연하다. 대남(對南), 대일(對日)공작원 양성을 위한 현지교사로 쓰기 위해 수 많은 일본인과 한국인을 납치했다. 납치 최종 책임자는 교시(敎示)를 내린 김정일이다.
– 그렇다면 일본인보다 한국인에 대한 수요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훨씬 많이 납치되었다. 북한공작원 출신 안명진씨의 증언에 의하면 공작원 교육 장소에는 한국거리가 복원되어 있고 한국인이 교관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납치된 한국인 교관이 80명이었다는 것이 안씨의 증언이다.
– 일본인 납치범이 북한 당국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에 알고 있었나.
사건 발생 당시에는 일반인은 아무도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 일본 정보기관 정도만 북한 공작선의 무선을 탐지하면서 북한 당국에 의해 일본인 납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치했다. 무선 탐지 사실 자체가 북한에 알려져서는 안되고 비밀기지를 공개하라는 요구가 나올 것을 우려해 납치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했다. 또한, 당시에는 정당, 언론기관에서 좌파들의 힘이 아주 강했다.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북한에 대해 비판하거나 공격하면 극우 반공이라고 매도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일본정부 북한 납치공작 방치가 칼기폭파사건 불러
– 일본인 납치사실을 일본 정부가 최초로 시인한 것은 언제였나.
일본정부가 손을 쓰지 않은 결과 1987년 ‘칼858기폭파사건’이 일어났다. 납치된 일본인으로부터 일본인화 교육을 받은 당시 북한공작원 김승일, 김현희는 일본인 행세를 하며 비행기 폭파공작을 자행했다. 일본화된 테러분자를 양성해 일본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고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기 위한 매우 극악한 공작이었다. 다행인 것은 김현희가 살아남아 일본인화 교육을 받은 것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 증언으로 일본에서 큰 파문이 일면서 그 가족과 국민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88년 2월에 일본 국회에서 가지야마 국가공안위원장이 처음으로 북한 납치공작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당시 문제는 언론이었다. 공안책임자가 국회에서 북한의 납치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지만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찌는 전혀 보도를 하지 않았다. 언론사에도 좌파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총련계의 테러위협을 두려워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또 10년이 지나가고 말았다.
-일본내에서 납치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슈화된 것은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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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요꼬다 메구미가 납치 됐을 때 나이가 13살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북한공작기관에서 봤다는 북한 공작원 출신 탈북자의 증언이 나왔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안명진씨다. 이 증언을 통해 일본인 요꼬다 메구미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당시 본인이 편집장으로 있던 <현대코리아>가 처음 보도했다.
그때 가족들이 많이 고민을 했다. 메구미양의 부모는 그녀가 북한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지만 공개적으로 구출운동을 하면 자기 딸에게 위험이 올 수 있다는 걱정을 했다. 그러나 메구미양 아버지는 사건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북한정부는 시인을 하지 않고 일본 정부도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려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느 정도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국민들에게 호소하자는 결심을 했다.
그 때 일본정부가 북한이 납치했다고 인정한 10여명의 납치자 가족도 함께 나서기로 했다. 그때까지 피해자 가족들은 일본정부가 비밀교섭으로 구출하는 것을 원했지만 일본정부는 결코 나서지 않았다.
-납치피해자 가족연락회(가족회)와 구하는 모임(구출회)은 언제 조직되었나.
가족회는 97년 3월에 결성했다. 가족이 나서는데 주위에서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같은 해에 구출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98년에 전국협의회가 되었다.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을 연락해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하는 전국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때부터 5년 동안 언론과 정부에 호소하고, 미국을 방문하고 유엔에도 호소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일본 국민들에게 납치 사실을 알리고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2002년에는 5년 동안 가족회와 구출회가 함께 노력한 결과, 국회내에 납치자 문제해결을 위한 국회의원모임과 지방의원연맹이 결성되었다. 납치피해자 관련 모임 4개조직이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매스컴에 알리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그 결과 2002년 북-일 정상회담에서 납치자 문제를 주요의제로 언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는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한 싸움
– 현재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하는 모임 전국협의회>의 상임부회장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 협의회의 주요 활동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2002년까지는 북한과 납치사건에 대한 사실 여부를 가지고 싸웠다.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납치사실을 인정하면서 이후 싸움은 납치자 숫자와 생사확인과 송환문제로 바뀌었다. 북한 당국은 납치피해자가 13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15명, 가족과 북한출신 공작원은 거의 100여명에 육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5명은 귀국시켰는데 나머지는 다 죽었다고 북한 당국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2002년 9월부터 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최근 북한 당국이 보내온 메구미양의 유골이 가짜라는 것이 밝혀졌다. 피해자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사망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머지 8명 모두가 죽었다는 변명이 거짓말임이 밝혀졌다. 이제는 북한에 생존해 있는 납치피해자의 생명을 구하고, 그들을 귀국시키는 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 납치자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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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코리아> 편집장으로 납치자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었다. 가족이 필사적으로 나서는 상황에서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지식인의 양심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주위에서는 납치문제에 개입하면 테러를 당할 수 있다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 김일성, 김정일 비판을 하고 있을 때 ‘죽이겠다’는 협박장을 받기도 했다. 협박전화는 수없이 받았다.
– 지난해 북한이 돌려보낸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이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져 큰 충격을 던져줬습니다. 여기에 대해 일본 국민의 여론이 매우 악화되었는데.
이번 사건은 매우 간단하다. 고온으로 화장을 하면 일본 기술력으로도 DNA를 감식해내지 못할 것으로 북한 당국은 판단했다. 그러나 일본은 최신기술로 유골에서 DNA를 감식해냈다. 이번 유골사건을 책임지고 있는 북한 당국자가 김정일에게 ‘일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김정일이 담당자를 처벌하고 새로운 책임자가 오면 귀국하지 못한 나머지 8명의 납치피해자가 모두 죽었다는 거짓말을 계속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대로가면 일본내 여론이 악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김정일로부터 피해자의 생사여부와 유골을 전달 받을 수도 있다.
대북 경제제재는 효과적인 대북 압박수단
– 또 이 문제로 일본 내에서 대북 경제제재론이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제재론의 내용은 무엇인가. 경제제제가 실제로 북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는가.
일본 단독으로 경제제재를 해서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많은 불편을 줄 수 있다. 일본은 북한으로부터 수산물과 양복원단으로 200억원 정도를 수입을 하고, 중고기계와 차량부품 100억엔 정도를 수출하고 있다. 여기에는 김정일의 사치스런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일본에게는 200억원이 많은 돈이 아니지만 북한에게는 큰 돈이다. 일본 중고기계와 부품이 제공되지 않으면 북한 군대가 어려움을 겪게된다.
– 납치문제로 인해 일본과 북한과의 수교문제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가.
일본정부는 납치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수교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제재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교문제는 물 건너 갔다고 본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내 여론에 큰 차이가 없다. 고이즈미 수상은 경제제재에 소극적이다. 자신이 평양을 두 차례나 방문했는데 성과가 다 부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수상은 핵과 미사일, 납치문제가 해결되면 수교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북한 측에 계속 보내고 있다.
– 한국정부는 납치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일관되게 내세우고 있다. 대북 협상과정에서도 ‘특수이산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북한 측의 비위를 맞추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본과 비교해 한국정부의 이러한 접근방식이 납치자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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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외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산정부와 협상할 때 힘이 동반되지 않는 협상은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2002년에 60만톤의 쌀을 보냈지만, 북한 정부는 납치자 문제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쌀을 보내지 않고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지원도 없다고 강하게 이야기하니까 김정일이 결국 납치사실을 시인했다. 이것은 우리 일본이 북한을 상대하면서 배운 분명한 교훈이다.
김정일이라는 악(惡)을 제거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연대해야
– 한국인 납북자 구출운동과 연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까지도 연대 해왔고,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연대할 생각이 있다. 2월에는 한∙미∙일이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도쿄에서 세미나를 진행할 계획이다. 아쉬운 점은 납치문제만을 담당하는 NGO가 한국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북한문제를 잘 알고 있는 운동경험이 있는 NGO에서 가족회와 함께 나서야 납치자 문제 해결이 잘될 것 같다.
– 70년대에 한국에서 유학하신 것으로 알고 있고, 한반도문제 전문가라고 알고 있다. 향후 북한체제의 미래를 전망해달라.
‘어떻게 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일기예보나 학자들처럼 어떻게 될 것인가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봐서 김정일 정권은 악한정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빨리 서로가 노력해서 악한정권을 몰아내야 되지 않겠는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미국이 김정일 정권이 악하다고 말하고 있다. 앞으로 4년을 잘 활용해서 우리가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납치자 문제를 떠나서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북한을 악이라고 표현했는데 김정일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국제적인 연대를 해야한다. 이 싸움은 한국, 미국, 일본, 중국내에 존재하는 김정일을 악으로 규정하는 세력과 김정일의 싸움이다. 눈앞에 아주 악한 존재가 있는데 필요한 것은 인류보편적인 가치관이다. 민족과 국가를 넘어 김정일과 싸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모두가 우리의 친구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