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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3년,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맞은 2008년은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민단)에게 창단 62주년을 맞는 해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거의 함께 해온 민단(초대 단장 박렬) 설립 이후 초창기부터 이끌어 온 정동화(84세) 민단 고문이 최근 방한했다.
정 고문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민단 조직국장을 맡아, 항상 7대 3으로 세력이 불리한 상황에서 조총련과 투쟁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그는 ‘재일 한국인 학도의용군 모임’의 초대회장도 역임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미 극동지구 UN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재일동포와 유학생들로 구성된 60여 명의 재일학도의용군 자격으로 ‘참전 기회를 달라’며 혈서로 쓴 지원서를 제출하여, 재일 학도병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인물이다.
전쟁 이후 정 고문은 민단 부단장, 감찰위원장, 민단 신문사 사장, 고문 등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민단을 지켜왔다. 그는 단장을 맡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단을 움직여왔다.
그는 또 2006년 노무현 정부 시기 민단과 조총련의 ‘5·17 화해성명’이 무산된 배경에 대해 “민단이 가야할 진로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며 “조총련과 상대하면서 신중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정동화 고문과의 인터뷰 전문]
-초창기 민단에 참여했던 계기가 궁금하다.
“46년 10월 일본에 민단이 결성되고 초대 단장으로 일제 때 투옥된 바 있는 무정부주의자 박렬 선생이 취임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세력 판도는 조직적, 재정적으로 조총련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그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허다했다.
당시 내가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이유는 조총련 사람들은 민족을 볼 때 노동자, 농민만 민족이고, 지주, 자본가는 반동이라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도 지주, 자본가, 지식인 식으로 분열시키는 계급투쟁 이론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6·25 전쟁 전후 시기는 일본 교포사회도 좌경세력이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민단에 뛰어 들었다.”
-당시 일본의 대학에서도 좌경세력의 힘이 강했던 시기로 알고 있는데…
“해방 직후 일본에 생긴 좌익 ‘조선학생동맹’은 순식간에 전국 조직을 갖추었다. 그들은 ‘조선인문화연구회’라는 서클을 중심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당시 와세다대, 중앙대, 명치대, 법정대 등 거의 모든 대학이 좌경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당시 명치(메이지)대에서 정치학과를 다녔는데, 명치대를 중심으로 60여 명의 우익 학생들을 규합하여 비밀리에 조직을 결성했다. 기백과 체력이 강했던 우리는 결국 몸으로 싸워 명치대에서부터 좌익을 축출하는 일을 했다.
이후 1년여에 걸쳐 일본 전국의 주요대학에서 좌익을 제압하는 데 앞장섰는데, 이 과정은 매일매일 피나는 투쟁이었다.”
-‘재일 학도의용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6.25 전쟁 발발 며칠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결국 한국군은 대구까지 밀려 가게 됐다. 부산 일각만 남은 상태여서 일본에 있던 나는 우리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와중에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참전한다는 얘기를 듣게 됐고, 나는 일본에 있는 동지들과 젊은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생운동을 하는 단체들을 규합하여 50여 명의 동지들과 ‘우리도 의용군 참전의 길을 열어 달라’며 혈서로 쓴 지원서를 들고 일본에 있는 미군 대표부로 찾아갔다.
그런데 미군 대표부에서 우리를 막아섰다. 우리는 그냥 길에 앉아 태극기를 들고 농성하면서 계속 ‘싸우고 싶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얼마 뒤 맥아더 사령관이 우리 모습을 보고 ‘왜 젊은 사람들이 저기 앉아 있느냐’며 부하에게 물었다. 부하가 상황을 설명해주자 맥아더 장군이 우리의 뜻을 알고 드디어 참전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처음 한국 언론에 공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군부대에 소속이 되어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을 때 우리도 함께 대한민국으로 들어가게 됐다. 1차로 참여한 의용군은 대부분 학생들이었고, 그 다음에 민단과 일본 전국에서 ‘우리도 나가자’고 들고 일어나 7차까지 600여 명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다.”
-민단의 역사가 60년이 넘는데, 민단세력이 커질 때는 언제였나?
“민단세력이 결정적으로 커진 것은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북에서는 조총련으로 돈을 주었지만, 그때까지 한국은 일본과 수교를 하기 전이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재일동포 정책’조차 없었다.
한일회담 이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대일정책을 추진하면서 재일교포 정책도 세웠는데, 이때부터 민단이 본국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국가에서 지원되는 돈도 받을 수 있었다.
-조총련 세력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인가?
“1959년부터 시작돼 1960년대 정점을 이룬 재일동포 북송사업 때문이다. 북한은 조총련 사람들에게 ‘이북은 지상낙원이다’ ‘세금도 없고 공부도 공짜다‘고 선전하여 조총련 사람 10만여 명 가까이 북한으로 넘어 갔다.
당시 북한은 일본에서의 차별과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도 북송사업을 뒤에서 도왔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일본 정부로선 일본사회에 많은 조선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골치 아픈 상황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어떻게든 내보내야 했다. 그런 차에 북에서 북송사업을 하니까 오히려 명분을 잡게 된 것이다.
북송된 사람들은 청진, 나진항에 내리고 난 다음부터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과 몇 달 안 가서 일본에 있는 가족, 친척들에게 편지로 돈과 옷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왔다. 특히 옷을 많이 보내달라고 했다. 조총련은 북송사업 때문에 결정적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조총련에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 했지만, 결국 일본사회에 다 알려지고 됐다. 우리는(민단) 조총련을 적극적으로 공격했고 그때부터 민단의 목소리도 커지게 됐다. 그동안 중립에 서 있던 사람들도 우리를 지지하게 됐다.
80년대, 90년대를 거치며 민단과 조총련과의 힘의 비율은 7:3으로 우리가 앞서 있다.”
-한민통(韓民統)은 어떤 단체인가?
한민통은 조총련에 가깝다. 핵심 인물은 북한이 관리했는데, 곽동의(郭東儀)란 사람이 핵심이다.
70년대에 김대중씨가 일본에 피신해 있을 때 민단은 김대중씨를 멀리 했다. 그래서 당시 김대중씨는 자신을 도우려 했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보는데, 김대중씨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한민통 좌익세력들이 있었다.
일본에 체류할 때 김상현 전 국회의원이 김대중씨와 같이 있었는데, 나는 김상현씨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일을 할 때부터 알고 지냈다. 오래 전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나의 친구여서 서울시장 방에서 김상현 의원을 알게 되어 몇 차례 만났다. 나는 김상현 의원이 야당 의원이었지만 대단한 정치가라고 생각했다. 이후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래서 김대중씨와 함께 온 김상현씨에게 ‘몸조심해라. 김대중 주변에 좌익세력이 있다’고 귀띔 해주었고, ‘주변사람을 견제하라’고 충고도 했다.
-조총련은 파친코 사업으로 자금을 모았는데, 민단은 어떤가?
“민단의 주 사업도 파친코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그나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 파친코 사업이었고, 그 사업의 절반 이상을 조선인이 맡아 했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민단이 더 많았다.
하지만, 조총련은 수입의 전부를 조직화해서 북으로 보냈다. 금융기관, 상공인들도 세금을 내다시피 강제로 돈을 징수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하지만 우리는 강제할 수도 없었고, 강제하지도 않았다. 자율적으로 회비를 내는 구조였다.
이제는 일본에서 파친코 사업은 경기기반이 많이 약해져 사양사업이 되었다.
김일성이 죽고 난 후 북한은 결정적으로 몰락하게 되었고, 조총련 내에서도 자유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약해졌다. 상공인도 민단으로 많이 전환했다. 지금은 조총련 힘이 엄청 약해졌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가 큰 정치적 이슈인데, 민단도 송환 운동을 같이 하고 있나?
“일본인 납치문제는 북한 체제의 문제다. 민단에서도 같은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다. 일본에서 납치문제는 총리도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정치,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다.
일본 언론에는 북한의 실정이 보도되지 않는 날이 없다. 일본 언론은 손바닥 거울처럼 북한을 너무 잘 안다. 그런데 한국에 와 보니 한국사람들이 북한의 실정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과거 정부 10년 동안 북한을 비판하면 ‘너는 남북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이냐?’는 말로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을 보고 걱정이 많이 되었다.”
-민단에서 한국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이제 재일동포 1세대들은 5%도 채 되지 않는다. 내 나이가 84세인데 나하고 같이 일한 사람은 다 돌아가셨고, 지금 재일동포의 문제는 2~3세대다. 1세들은 한국의 고향산천을 알고 일제시대 끌려간 사람들인데, 고향생각의 연장선이 바로 애국이다.
하지만, 2, 3세대들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아 한국과는 스킨십이 없다. 그래서 한국과 거리가 있다. 그들의 꿈은 민단계도, 조총련계도 다 좋은 대학 나와서 취직, 사업해서 대우받는 것이 희망사항이다.
말이 통하고, 글을 알아야 애국심도 생기는데 2~3세대들은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역사를 알 기회가 적다. 그래서 매년 5천명 정도가 귀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리 민단은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재일동포들의 참정권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에 ‘지방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피선거권은 아직 어렵다고 생각하고, 지방 선거권,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그러면 일본 정치인들이 우리에게 표를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 할 것이다. 우리 정부도 재일동포들의 지방참정권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