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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걸프전을 계기로 북한에서는 군수공업 현대화가 절실한 문제로 등장했다. 신형 미사일 등 미군의 현대화된 무기체계에 대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군수공업 전문가인 연형묵을 군수공장이 밀집한 자강도당 책임비서로 내려 보냈다. 김일성은 믿고 아끼는 사람들을 지방에 많이 내보낸다. 왜냐하면 유능한 사람들이 중앙에만 있으면 지방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책상머리를 지키는 사람보다 현실가형, 실무형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김일성의 간부 등용 원칙이었다.
연형묵은 인민이 좋아하는 지도자
북한 사람들은 연형묵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다. 특히 그가 맡았던 자강도 주민에게는 ‘사람됨이 우직하고 바른 소리를 잘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자강도로 내려간 지 얼마 안 되어 김일성이 사망하고, 식량난으로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이 많은 자강도는 군수공업이 밀집된 지역이다. 이 때문에 산에 굴을 뚫고 공장을 건설하는 노동자들은 배급이 끊기면 식량을 구할 수 없어 굶는 도리밖에 없다. 갑자기 들이닥친 식량난에 수많은 고급 기술자들을 잃었다.
이를 안타까워 한 연형묵은 전천군 상업관리소장 정춘실에게 예비로 비축해놓은 비상미를 풀라고 지시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자 ‘2중 노력영웅’인 정춘실은 김일성을 ‘아버지’로, 김정일을 ‘오라버니’로 부르며 양딸로 자처한 사람이었다. 정춘실은 자강도 전체 주민보다 자기 군(郡)만을 챙기면서 연형묵의 지시를 거부했다.
화가 난 연형묵은 김정일에게 ‘군수공장 노동자들이 죽어가는데 저 여자는 건사해놓은 식량을 내놓지 않는다’ 고 보고했다고 한다. 평소 주제넘게 ‘오라버니’로 부르는 정춘실에게 김정일은 ‘동무는 당의 배려를 많이 받아 교만해졌다’고 비판하면서 식량을 풀어주었다.
배짱좋고 능력있는 인물
자강도 주민에게 ‘화전’(火田)을 허용한 사람도 연형묵이었다. 김정일이 개혁개방할 기미가 전혀 없고, 식량은 해결할 방법이 없게 되자 연형묵은 자강도 주민들에게 화전을 해서 곡식을 심어먹으라고 지시했다.
산을 황폐화 시킨다고 화전이 금지되었지만 연형묵은 “산에 쓸모 없는 나무가 많으니, 3년 동안 곡식을 심어먹게 하고 유용한 나무를 다시 심으면 된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자강도 주민들은 “연형묵은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는 간부”라고 입을 모았다.
연형묵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실천주의자다. 그는 90년대 중반 식량난을 ‘김정일의 과오’로 정확히 본 사람이다. 김정일을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 나름대로 무척 애를 쓰기도 했다.
자강도에 현지시찰을 온 김정일에게 “인민들이 당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백두산(빨치산 시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발언,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화도 있다.
한영진 기자 (평양출신 2002년 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