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는 지식인들이 탄압을 많이 받았다. 특히 1950~60년대에 심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아는대로 설명해달라
중국과 소련 공산당의 당 기(旗)에는 붓(펜)이 없다. 낫과 망치, 즉 노동계급이 우선이고 지식인 계급은 배제된다.
그런데 조선노동당 기에는 ‘붓’이 있다. 북한에서 지식인은 붓으로 상징된다. 이것은 인텔리 정책에서 이중(二重)정책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텔리는 동요계급, 즉 ‘왔다갔다 동요하는 계급’이라는 것인데, 지식을 수단으로 정책 슬로건에 쉽게 맞춰 동조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조선노동당이 당 기를 만들 때는 지식인을 우대하겠다는 뜻을 표방했는데, 그것은 지식인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소련에서는 인텔리를 노동자, 농민계급의 종속적인 계층으로 보았다.
그런데 김일성은 인텔리를 추켜주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지식인들을 혁명의 중요한 기본계급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해방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새로운 건국사상 총동원’이라고 해서 대대적인 ‘건국운동’을 진행했다. 이때 인텔리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는데, 김일성이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8.15 해방을 전후하여 남한에서 북으로 간 인텔리들이 많았다. 이북출신 인텔리들은 사실 별로 없었다. 김일성이 남한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오기 위해 어떻게 열심히 했는지, 그 내용을 선전하는 북한 영화 ‘민족의 태양’이라든가, 여러가지 영화들도 있었다.
전쟁 후 다시 북한을 복구하는데도 인텔리가 필요했다. 복구 후에 북한이 안정을 찾으면서 그동안 인텔리들이 한 역할 때문에 인텔리 계층에서 자화자찬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목소리가 커지니 김일성 입장에서는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또 1950년대 북한은 주체를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공산주의 내부에서 중소(中蘇) 이념분쟁이 있었고, 추가적으로 중국과 북한의 갈등도 있었다. 김일성은 중-소 간 등거리 정책을 취해야 할 때였는데,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중국은 북한을 상당히 압박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으로서 중국, 소련 중 어느 쪽 말도 들을 수 없는 형편이라 ‘주체’라는 것을 내세워 이를 이념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때부터 ‘주체’를 말하기 시작했다.
또 당시 지식인들이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연, 혈연으로 자기끼리 뭉치려고 회합도 갖고, 회합을 통해 당 정책에 대해 자기 잣대로 비판도 하니까, 김일성은 노동계급 제일주의에 흠집을 내는 위협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또 김일성 입장에서 ‘중학교밖에 안 나온 나를 우습게 보느냐’라는 자괴심도 있을 수 있었고, 그래서 ‘중국에서도 인텔리가 문제가 됐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체를 세우는 과정을 통해 일단 남쪽에서 들어온 대표적인 우두머리격 인텔리들을 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교육상까지 지낸 최삼열이란 사람이다. 최삼열은 4·19를 주제로 남쪽의 지하혁명을 보여준 영화를 찍은 유명한 여배우(최부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김일성이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 해야겠다”는 발언에 대해 “권척(줄자)도 못 만드는 나라가 무슨 자립적 경제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최삼열은 과학원 부원장을 하고 있었는데 당장 철직(해임)되고, 딸도 스크린에서 치워져 버렸다. 그런 식이었다. 교육상, 문화상 등 남쪽에서 온 지식분자들을 그때 1950~60년대에 다 잘랐다.
아래 단위에서는 남한 출신 인텔리를 대상으로 비판토론을 진행시켰는데, 그것은 김일성이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기 위한 조직별 토의모임이었다.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이후에도 지식인들을 계속 탄압했는가?
그때는 이미 지식인들이 다 정리된 상태여서 체제를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김정일이 들어와서 지식인들을 과거처럼 적극적으로 써먹기 위해 ‘지식인도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혁명의 주력군’이라는 말로 치켜세워 주면서 이용하려고 했다.
-북한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언제부터 금지되었는가?
내가 1960년대 말 시절까지 마르크스 자본론, 엥겔스 선집, 반 듀링론, 변증법적 유물론, 형이상학 등의 마르크스 관련 서적들이 아버지의 서가에 꽂혀 있었다.
그런데 1968, 1969년 즈음부터 ‘주체를 세운다’면서 책을 다 걷어 갔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의 어떤 집에도 마르크스, 엥겔스와 관련된 책이 없어졌다. 오로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책은 김일성 어록, 저작선집만이 있었다.
마르크스를 배웠다고 하는 세대라면 주로 1950~60년대 초반까지 대학에서 마르크스 관련 강의를 받은 사람들이다. 1967~68년 들어서부터는 마르크스 강의도 안했고 서적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는 마르크스주의 범주에 속하는 철학이라든지, 변증법적 유물론 같은 것도 마치 김일성이 말한 어록처럼 해서 마르크스, 엥겔스의 테제들을 “김일성 수령님에 의하면~” 식으로 조작했다.
예를 들어 변증법이라고 하면, “김일성 동지께서 교시하신 것처럼 ‘하나의 질(質)에서 다른 질(質)로 넘어갈 때는 반드시 형태와 성질이 바뀐다’”는 식으로 양질 법칙을 설명했다.
그런데 나중에 김정일은 그런 것마저도 없애 버렸다. 변증법도 없애 버리고 주체철학만 공부하도록 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문제도 주체사상에서 다뤘다. 간부들을 가르치는 공산대학에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노동당 규약이 몇 차례 수정됐는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조선노동당은 온 사회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을 지침으로 하여’라는 문구를 빼버리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김일성주의’로 바꿔버렸다.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서 죽은 지식인들은 그 숫자가 어느 정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에 1958년에 맹아 형태로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다. 1960년대 들어 본격적인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는데, 지식인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간 것은 1960~70년대 초가 거의 대부분이다. 당시 수용소에 들어간 이유는 이른바 ‘말 반동’ 때문이었다. ‘말을 잘못한 반동분자’라는 뜻이다. 수용소로 간 사람 70~80%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1990년대 초반 북한의 경제실패를 놓고 이런저런 평가가 나왔는데, 그때 학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도 수용소로 많이 잡혀갔다. (탈북자)이민복 씨가 얘기했듯이,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분조도급제가 필요하다고 얘기했다가 잡혀간 사람도 많았다.
강진석(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오빠)의 사위로 김일성 가계의 유명한 경제 관료인 김달현은 김일성이 참가한 관료회의에서 “경제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함흥에 있는 신흥화학연합기업소 당 비서로 쫓겨났다. 이후 보위부가 계속 감시하고 도청하니까, 결국 견디지 못하고 김달현은 2001년에 침실에서 자살했다.
-1990년대 중반 식량난 때 특히 지식인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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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식량난 때 갑자기 혼란스러웠던 것은 삶의 방식이 배급제에서 자급자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많이 죽었다. 또 당에서 ‘좀 기다리면 배급이 나온다’고 하니까 이 말을 믿고 있다가 많이 죽은것이다.
당시에 빨리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3비’였다. 꽃제비, 청제비(젊은 아가씨), 선비(지식인)들이다. 이들은 돈 벌 줄을 모르는 계층이었다.
특히 선비들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 못해서 많이 죽었다. 부모가 죽으니까 꽃제비들이 생겨나고 갈 데 없는 꽃제비들도 많이 죽었다. 또 아줌마들은 생활력이 있어서 품을 팔아서라도 생존했지만 젊은 아가씨들은 부끄러워서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뭐 먹고 살길이 없었다. 맨 마지막엔 성(性)을 팔기 시작했지만, 이도 넘치기 시작하니 식량을 충분히 구하지 못했다.
우리 공산대학에도 의용군으로 온 남한 출신 교수 2명이 있었는데, 고향이 보령인 사람과 강원도 사람이었다. 고향을 너무나 그리워했지만,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하면 반동이 되니까 말을 못했다. 배급이 끊어지니까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책밖에 모르는 사람이어서 끝내 굶어 죽었다.
그때 인사말이 ‘식사했습니까?’였다. 다들 굶주림에 얼굴이 누렇게 뜨는데 그래도 젊은 학자들은 뭐라도 했지만, 노학자들은 말이 아니었다.
중앙당 비서국 사람들과 박사들, 또 기자들도 2~3급 대상자들, 급수 시험을 쳐서 상급 의사가 되면 65공급소에서 일반들에게는 주지 않는 식품과 상품을 준다. 그나마 이들을 대우하기는 했다.
-북한에서 대학 총장과 당 비서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나는가?
김일성종합대 총장은 좀 특수한 자리이고, 중앙대(기계대, 건설대, 함흥수리대, 남포선박공업대 등 특정분야 대학. 북한에는 하나씩밖에 없다) 총장이라면 당 간부급이다.
간부에 대한 규정은 당 비서국에서 하는데, 중앙당 비서국에서 하느냐, 도(道)당 비서국에서 하느냐에 따라 직급이 다르다. 중앙대 총장은 중앙당 비서국의 비준 대상이다. 높은 급이다. 총장이면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총장이라고 해도 실제에 있어서는 당 간부보다 훨씬 떨어진다. 당 간부가 노임도 많고, 훨씬 파워풀 하고 노임이라도 총장이 받는 10원은 당 간부의 1원이나 마찬가지다. 당 간부의 실제 대우는 몇 십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이후 북한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가?
북한 주민들은 최소한 먹는 문제 해결, 배고픔만이라도 잊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중국보다 한국이 더 잘 산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한국을 모를 때는 오직 중국만 바라봤는데, 지금은 밀수로 한국 영화, 드라마, 음반 등 한국 문물이 들어가면서 한국도 알게 됐다. 한국 문물을 통해 자유롭다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은 자유롭다는 게 어느 정도 제한이 있다는 것도 안다. 중국이 잘 살지만 보위부가 있고 공산당이 틀어쥐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중국 정도만 돼도 얼마나 좋겠는가?
-김 대표 개인적으로는 김정일 이후 북한이 어떻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바로 남북이 통일하는 것보다는 남한이나 국제사회의 지원을 통해 북한이 일정 기간 경제 주체로서 존재하고, 또 주민생활이 어느 정도 나아지고, 그래서 국제적인 가치관으로 주민들 의식이 어느 정도 함양됐을 때 통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국제사회의 일반적 가치들이 북한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때, 통일에 대한 주체가 됐을 때 통일이 돼야지, 그렇지 않고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먹자고 하면 반발이 엄청 클 것이다. 게릴라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정 수준의 자유를 맛보다가 ‘(남한식이나 국제기준의) 이런 제도가 괜찮네’라고 주민들이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남한) 사람들의 의식, 가치, 윤리 등 시민의식이 어느 정도 북에 침식되고, 먹고살 만할 때 통일이 가능할 것이다.
-20세기 공산주의도 이미 망했고 북한도 망했다. 그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판단하는가?
공산주의 이념 그 자체는 무지개 같은 공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만약 공산주의 사회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인간의 본성적 요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유적인데, 공산주의 이론은 사람을 너무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라고 했는데 어찌 사람이 그러는가? 공산주의는 사람을 너무 이성적 인간으로 상정해놓은 공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공산주의 실천이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양쪽 사회를 다 살아보면서 느낀 것이다.
북한에서는 모든 인간을 주체형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로지 당과 수령, 조국을 위해 묵묵히 일하다가 순직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건 안 된다. 북에서 아무리 세뇌교육에 정치학습을 시켜도 사람 본성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래서 북한당국이 계속해서 생활총화와 사상총화를 들이대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고 인간의 본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조화시키면서, 모두가 평등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공평을 추구하는 사회는 필요하다고 본다.
-NK지식인연대가 ‘지식인’이란 표현으로 다른 탈북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우리 NK지식인연대는 타 단체들과 학술적 협력, 행동의 협력을 원하고 있다. NK지식인연대라고 하니까 탈북자 1만 5천명 중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일반인하고 구별되는 특수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각인되고, 그 때문에 오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의 성격이 ‘지식을 갖고, 즉 지식을 수단으로 해서 활동하는 단체’일 뿐이다. 지식인이라는 게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괜한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명칭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논의했다. 그러다가 단체의 성격을 ‘지식을 가지고 사회참여를 준비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
지금은 시작 단계여서 각자의 역할분담과 해야 할 일 때문에 회원 자격 요건을 두었지만 앞으로 단체가 자리를 잡으면 자격 요건을 없애고 일반 회원으로 완전히 확대할 예정이다.
탈북자들은 이곳(남한)까지 오게 된 처지의 공통점과 과거 경험에 대한 공통점이 있다. ‘지식인연대’는 절대로 탈북자 사회를 구획 짓고 위화감을 주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통일된 삶을 공유하기 위해서, 우리의 지식을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활동을 통해 탈북자 사회에 이러한 우리의 뜻이 잘 전달되도록 노력해 나가겠다. 꼭 해야 될 일이다.
-탈북자 사회가 여러 단체로 분화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황장엽 선생도 탈북자들이 사상적, 조직적으로 통일되고 단결되어 한다고 얘기하며 걱정했다. 황 선생은 그러자면 여기 온 탈북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일깨워주고 교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탈북자 단체가 많다 보니 불협화음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체들이 같이 연대하는 것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북한민주화위원회’ 내에 북한전략포럼이 있는데 앞으로 학술 연구와 협력을 통해 같이 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조직 운영에 있어서도 배타적이지 않게 운영하겠다.
-끝으로 NK지식인연대의 장기 목표를 분명히 밝혀 달라
시작은 이렇게 하지만, 앞으로 단체의 활동이 더욱 넓어질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중 큰 업적이 KDI(한국개발연구원)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NKDI’를 꿈꾸고 있다. 김정일 이후 북한사회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라는 비젼을 한국의 발전상에서 찾고 싶다. 큰 그림을 그려 하나하나씩 세부적인 계획을 만들어 가고 싶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남쪽 사회를 전면적으로 분석해 볼 것이다. 그런 다음 북한에서 받아들여 할 부분, 일정 수준 도입할 부분, 버려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나갈 것이다.
가장 걸리는 문제는 우리가 학술활동을 통해서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의 시스템을 빨리 배우려면 이 사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차 통일을 위해 북한을 발전된 한국식으로 개조하려면 탈북자들에게 한국사회의 선진적인 것과 효율성 높은 기능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래야 김정일 이후 NKDI의 내용을 담은 정책을 북에 제안할 수 있다.
탈북자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한국의 ‘북한이탈주민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도 탈북자들을 특채하도록 되어 있다. 북한의 전문분야 종사자들을 남한의 비슷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큰 자리가 아니더라도 인턴부터 시작해도 된다. 탈북자들에게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더 소중하다.(끝)
[김흥광 대표 인터뷰-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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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미래’ 준비 ‘NK지식인연대’가 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