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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19일. 한 사내아이의 울음이 14호 관리소 안에서 터져 나왔다. 태어나 맨 처음 본 것은 죄수복을 입은 엄마. 말을 떼자마자 이 곳이 ‘수용소’라는 것을 알았다. 슬픔이나 분노, 즐거움과 사랑이란 단어는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 눈 뜨면 일하고 때리면 맞아야 했다. 이 곳이 어디인지, 바깥세상은 어떤 곳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22년 동안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그 곳. 사람들은 그 곳을 정치범수용소라고 부른다.>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나 22년간 수감생활을 했던 신동혁(26) 씨가 한국 언론으로는 최초로 28일 데일리NK와 인터뷰를 가졌다.
오랜 수감 생활로 인한 정신적 휴유증을 앓고 있는 신 씨는 인터뷰에 응하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일본 언론의 보도 이후, 정치범수용소에서 탈출했다는 그의 증언을 믿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이었다고 말했다.
신 씨는 평남 개천의 정치범수용소 출신이지만, 수용소의 구조나 규모 등 전체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못했다. 태어나서 탈출할 때까지 폐쇄된 마을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뭐라고 하던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얘기 하겠다”며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님이 무슨 죄목으로 수용소에 끌려 왔는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수용소 안에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일 잘하는 사람 뽑아 ‘표창결혼’ 시켜
“수용소(북한에서는 관리소라고 불림) 내에는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결혼을 시켜준다. 이를 ‘표창결혼’이라고 하는데, 수감자들의 사기를 돋궈주고 일을 많이 시키기 위해 상을 주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 이렇게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우리 부모님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수용소 안의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이 ‘표창결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5일 정도 같이 생활하다가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허름하지만 독채에서 살 수 있었다. 신 씨에게는 형도 한 명 있는데, 그들 가족은 8작업반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특별히 마을 이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작업반 명칭을 따서 부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있는 곳이 ‘수용소’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나 조상들이 죄를 지어서 그 때문에 여기에서 살게 됐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바깥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까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전혀 안 들었다. 수용소를 나오기 전까지는 마을 안에서만 살았다”
그는 10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신년이나 특별한 날 ‘표창휴일’을 받아 아버지가 가끔씩 집에 들렀다고 한다.
신 씨는 10살 이후 남자들만 사는 단체 숙소에서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12시간씩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7살이 되던 해에는 수용소 안에 있는 인민학교에 입학했다. 수용소 내에서도 학교를 운영했는데, 인민학교 5년, 고등중학교 6년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잔인한 일상의 연속…우리는 그렇게 취급받는 사람”
“오전에 4시간, 오후에 2시간 수업을 했다. 보위부원들이 선생님이었는데 교재는 따로 없었다. 국어와 수학, 체육을 배웠는데, 국어시간에는 글쓰기를 했고 수학은 더하기, 빼기까지 배웠다. 학년이란 것이 의미가 없다. 학교를 마치면 무조건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고등중학교 때부터는 아침부터 일하러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신 씨에게 펜과 종이를 주고 학교와 숙소의 위치를 그려달라고 했다. 그는 “걸어서 5분 정도 위치에 있었는데, 위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주로 농촌지원과 도로수리, 탄광 지원, 화목(나무) 수집 등의 일을 했다. 일이 힘들어서 하기 싫다고 생각도 했지만,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일하는 시간도 길어지고, 더 어려운 일을 하게 된다.”
인민학교 시절에는 간혹 여유 시간도 있어 같은 반 아이들과 술래잡기도 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었냐?”고 질문을 던지니 “친구라는 개념으로 가깝게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를 친구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즐겁다라는 말 자체도 몰랐다. 다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용소 안에서는 이들을 감시하는 보위부원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보위부원들과 마주치면 비켜서서 인사를 해야 했다. 수시로 매를 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특별히 반감도 들지 않았다.”
“보위부원에게 당했던 가장 큰 처벌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하루하루가 잔인하니까 특별히 뽑을 수 없다”고 했다. 신 씨는 수용소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질문에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구타 등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일상에 불과했다.
“말을 안 들으면 매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다. 인민학교 때부터 맞아서 머리에 피가 터지고, 간혹 죽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이틀이 멀다 하고 맞았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옥수수밥과 염장(소금)국만 배급받았다. 수용소에서 탈출할 때까지 다른 음식은 구경도 못했다. “항상 배가 고팠다. 농장일을 나가면 몰래 벼이삭이나 오이, 가지 등을 따다 먹었다. 쥐를 잡아먹기도 했다. 수용소 안의 사람들은 다들 허기져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