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날까지 北민주화 갈망한 老혁명가 ‘황장엽’

10일 고(故) 황장엽 전(前)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서거 1주기를 맞는다. 그가 남긴 회고록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남한행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막후 외교전과 13년 남한생활을 포함한 그의 생(生)을 재조명했다.


황 위원장이 서거한 날은 공교롭게도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이 되는 날인 10월 10일이다. 북한은 이날 김정일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열병식 주석단에 등단시키며 3대세습을 공식화했다. 김일성-정일-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세습독재체제를 더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눈 감기 직전까지 북한 독재 정권 타도를 부르짖던 황 위원장은 그렇게 황망하게 영면(永眠)했다.


황 전 위원장은 분단 이후 한국에 망명한 최고위급 탈북자다. 1997년 2월 12일 중국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고, 필리핀을 거쳐 그해 4월 20일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그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집대성한 ‘주체사상의 대부’로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장의위원 명단에도 서열 26위로 이름을 올렸고, 망명 당시 당 중앙위 국제담당 비서 등 요직을 겸직한 북한 최고위급 인사였다.


황 위원장이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하자 중국 당국은 신변처리 문제를 두고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김영삼 정부였던 당시, 중국은 우리의 요구(한국 직행)를 거절했고, 어느 나라도 황 선생을 받으려고 하는 나라가 없었다”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필리핀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필리핀으로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황 위원장은 회고록을 통해 “북한체제에 복무하면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허위와 기만의 도구로 내가 이용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며 한국으로의 망명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통일을 하기 위해 조국의 다른 한쪽인 대한민국을 택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내 조국에 내가 왔는데 그게 무슨 망명인가”라며 대한민국에 ‘망명’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황 위원장은 전무후무한 독재자와 최전선에서 싸우는 투사로 한국에 왔고, 북한을 민주화하기 위한 기지로 남한을 택했던 것이다.


“황장엽, 허위와 기만의 사회 北 떠나다”


황 위원장은 1923년 2월 17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1946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후 1949년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했다. 1953년 북한으로 입국해 김일성종합대학 철학 강좌장에 이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거쳐 42세 때인 1965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됐다.


이후 1972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9년 조선노동당 비서, 1984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을 지내는 등 북한 내 황 위원장의 입지는 굳건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등장 이후 가속화 된 수령독재체제에 대한 반감과 주민들을 굶어 죽어가는 상황을 방치하는 정권에 대한 분노는 가슴 속에서 점점 커져갔다. 결국 그는 1997년 2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됐다.


황 위원장은 회고록에서 “북한의 경제난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김정일을 계속 추종한다는 것은 역사와 민족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과를 범하는 것임이 명백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떠나오기 전 러시아 말로 아내에게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한 민족의 생명보다는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읊조리듯 말했다. 대한민국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밝힌 이별사였던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내와 세 딸과 아들, 손자와 손녀, 제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 황 위원장은 항상 머릿속으로 ‘가족과 동지들을 희생시키면서 선택한 이 길이 과연 바른 길인가, 과연 이토록 엄청난 희생을 보상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황 위원장 곁에서 수년 간 철학을 공부한 이광백 자유조선방송 대표는 “황 선생님은 한국행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면서 “오직 민족의 운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어 “황 선생님의 역사적 결단은 한낱 속된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민족적 양심의 부름에 순응하는 것”이라며 “분단 상황을 고착시키는 데 기여했던 한 지식인이 조국통일의 제전에 바치는 마지막 헌신”이라고 설명했다.


“北민주화와 인간중심철학 설파에 혼신”


황 위원장은 한국에 온 이후 남은 여생을 ‘북한민주화’와 ‘인간중심철학’의 연구에 쏟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원리 가운데 남한에 와서 가장 크게 발전한 부분을 ‘개인과 집단에 관한 원리’라고 밝히면서 “인간은 개인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명제를 한국에 와서 명확하게 정리했다고 밝혔다.


이 원리는 “각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가족과 국가, 인류와 같은 집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인생관’으로 확장됐다. 또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발전을 균형있게 실현할 수 있게 개인중심의 민주주의와 집단중심의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방향”이라는 정치철학으로도 발전했다.


그는 또 북한의 실정과 독재체제를 고발하는데도 열정을 다했다. 지난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김일성 시대보다 김정일의 독재 정도가 10배는 더 강하다”고 맹비난했다. 황 위원장의 이 같은 활동은 김정일 입장에서 위협적일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황 위원장 살해 임무를 받고 남파된 북한 간첩 2명이 체포되는 등 북한은 황 위원장에게 직·간접적으로 수차례 살해 위협과 협박을 가했다. 북한의 이 같은 행동은 오히려 황 위원장에게 있어 김정일에 대한 비판과 북한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더욱 확신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노라”


이 대표에 따르면 황 위원장은 생전에 늘 ‘자꾸 시간만 흐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대표는 황 위원장의 업적에 대해 “황 선생님은 남한에서 아주 큰 족적을 남겼다”면서 “그 분의 열정과 헌신적인 활동으로 북한민주화를 위한 상당한 역량의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그가 남긴 북한민주화의 씨앗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계승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인간중심철학의 사상이론을 계승, 발전시킬 실력 있는 연구자들도 양성되어 상당한 조직역량이 만들어졌다”고 소개했다.


박 의장 역시 황 위원장이 한국 사회에 남긴 족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남한의 젊은이들에게 주체사상이 한때 신화처럼 읽혀졌다”면서 “하지만 주체사상의 창시자가 한국으로 와서 본래의 ‘인간중심철학’의 내용이 변질돼, 김정일 개인숭배로 이용되었다고 진실을 전하고, 북한의 실체를 알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탈북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탈북자들이 정착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북한 주민들에게도 탈북 의지를 심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의장은 2008년 광우병 사태로 촉발된 촛불시위로 한국 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던 당시 황 위원장과의 만남을 기억했다.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양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주문을 받고 나가는 종업원을 황 선생이 다시 부르더니 여기 있는 미국소 내가 다 먹을테니 다 가져오라고 했다”면서 “미국소를 전 세계가 다 먹는데 왜 한국만 저 야단을 치는가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박 의장은 당시 황 위원장의 모습을 보면서 “얼굴에 정의로움과 용감성이 보였다”면서 “강인한 지도력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어렵게 한국에 모셔왔는데, 지난 DJ-노무현 정부 시절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면서 “모셔온 한 사람으로서 대단히 죄스럽게 생각한다”고 안타까워했다.


황 위원장은 아내를 떠나오기 전 고리끼의 ‘매의 노래’ (1895년 작으로 일종의 산문시)에 나오는 매와 구렁이의 대화, 그리고 매의 장렬한 최후가 머리에 떠올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너는 푸른 하늘을 보았지만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