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현상 근절은 불가능”…北 민심과 타협?

북한 김정일 정권이 최근 비(非)사회주의 현상에 대해 대대적인 검열·단속에 나선 것은 이를 더 이상 방치할 경우 체제 존속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가속도가 필요한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에 비사현상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 당국은 비사현상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는 만성적인 경제난과 이에 따른 주민들의 체제인식 변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기강해이, 한류(韓流) 등 외부 정보·문화 유입에 따른 생활상 변화에 뚜렷한 타개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 건설과 김정은으로의 안정적인 정권 이양이라는 미래의 청사진을 주민들에 선보여야 한다. 하지만 개혁·개방이라는 근본적 해결책을 외면한 김정일 정권은 오히려 화폐개혁(2009년 11월), 대남 군사도발이라는 악수(惡手)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정일은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비사현상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엔 체제의 근간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비사단속의 한계가 극명함에도 주민들의 옥죌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사현상, 잠재적 ‘체제불안정 요소’로 간주=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절대 독재체제는 조그마한 저항의 가능성조차 뿌리 뽑으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면서 “김정일 정권은 비사현상을 방치할 경우 장기적으로 체제불안정 요소로 발전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싹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代)를 이은 세습왕조 국가를 지향하는 김정일 정권이 비사현상을 잠재적 불안요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최근 탈북자 문제와 외부정부 유입, 밀수·마약문제 등 대표적 비사현상을 실질적인 2인자 김정은이 직접 챙기는 것도 이 같은 인식의 반영으로 해석된다.


북한이 지난해 당창건 65돌(10월10일)을 맞이해 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 공동구호에서 “사회주의 본태(本態)를 흐리는 현상들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김정일은 그동안 수령에 대한 절대적 우상화와 당(黨)·군(軍) 우선 정책, 외부세계와의 단절 등을 통해 주민들을 철저히 통제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경제난으로 인한 배급 중단과 탈북 도미노 등은 주민들의 체제인식과 사회생활 전반을 바꿔놨다. ‘수령과 당’이 아닌 ‘돈과 정보’가 주민들 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북한 체제에 조금씩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북한 당국의 인식변화는 지난해 당대표자회를 전후해 발간된 당 간부 교양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자료에서 북한 당국은 비사현상을 ‘자본주의 독소’ ‘제국주의의 사상적 침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사현상이 사회에 만연될 경우 인민들의 사상의식을 마비시켜 종국엔 제도자체를 지켜낼 수 없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북한 당국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개혁·개방·자유를 부르짖고 자본주의 문화가 침투함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김씨 왕조국가의 존망에 비사현상이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비사검열 ‘외부 정보 유입과의 전면전’=이 같은 인식에 따라 최근 북한 당국은 탈북자, 불법CD, 밀수와 한류(韓流) 등에 대한 단속에 힘을 집중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이 같은 비사현상들이 모두 정보의 유·출입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간부 교양자료는 “삐라살포, 심리모략방송(대북 라디오 방송), 불순 녹화물(CD·DVD)과 출판물을 통한 사상·문화적 침투책동은 수령과 제도에 대한 불신과 돈에 대한 환상에 젖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북한 당국이 올 초 대북 전단 행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법DVD 유통 등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거나 탈북자 가족들을 소개하는 것도 정보 유출입과 관련한 비사현상에 대한 북한 당국의 우려로 읽혀진다.


이와 관련 정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일 정권은 정보의 유출입을 가장 걱정한다”며 “비밀유지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됐다고 판단하는 북한으로선 작금의 정보통제의 구멍을 심각한 우려로 여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최근에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한류에도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주민들의 남한사회에 대한 동경은 체제에 대한 불만과 직결되는 문제다.


최근 대내매체를 통해 남한 정권에 대한 악의적 선전의 수위를 높이고 한국산 제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 같은 북한 당국의 우려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주민 반발 고려 비사 검열 수위 조절할 듯=다만 비법장사와 밀수 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단속이 약하다. 당국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나친 단속은 오히려 집단적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간부회의 등에서 “돈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상관점, 생활방식을 바꿔야 한다”며 뇌물을 받거나 비법행위(비법장사, 마약, 밀수 등)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단속과 처벌에 소극적이라는 것이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당국이 민생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 경제적 비사현상에 대한 단속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밀수와 비법장사 등에 대한 단속은 체제를 위협하지 못할 수준 정도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주민들 대부분이 장사 등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경제 활동에 대한 무차별 단속에 나설 경우 공연히 체제 불만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다. 반대로 경제이탈 현상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 체제의 위험 요소가 될 수 있기 떄문에 적절한 수준에서 단속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비사현상, 김정은 후계체제에도 영향?=수십 년째 지속되고 있는 경제난과 국제적 고립에도 북한이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와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 가운데 가동되고 있는 주민 통제 시스템이다.


따라서 체제의 가장 큰 위협 요소는 외부세계의 정보유입과 이에 따른 주민들의 의식변화다. 북한 당국이 귀국이 예정된 리비아 파견근로자 등의 입국을 막으면서까지 중동발(發) ‘민주화 혁명’ 소식 차단에 나선 것도 이 같은 인식의 반영이다.


비사현상이 당장은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힘이 되기엔 무리지만 개혁·개방 등 근본적인 체제 변화가 뒤따르지 않을 경우엔 정권 붕괴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불안요소가 산적한 후계자 김정은에겐 중대한 장애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 국책기관 전문가는 “김정일과 노동당, 군이 건재한 상황에서 비사현상이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큰 영향을 발휘하긴 어렵다”면서 “당분간 김정일 정권은 비사현상이 지나치게 확산되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거는 차원에서 검열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정 연구위원은 “비사단속 강화는 김정은으로의 권력변동과 연관이 있다”면서 “김정일 정권은 중동의 권위주의적 정권의 연쇄 몰락에 우려하고 있다. 최근 정보유입 등의 비사검열을 강화하는 것도 이 같은 우려의 반영이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김정은 명의의 주민단속을 통해 후계자의 영향력 확대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