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선배’ 최용건의 부인은 왜 중국에서 죽었나?

1963년 주덕∙하룡의 환영을 받으며 중국을 방문한 최용건(가운데 손 들고 있는 사람).

김정일이 중국에서 사망한 최용건(1976년 사망) 전 부주석의 미망인 왕옥환의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최용건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선배이자 6.25 전쟁 당시 전선사령관이었다.

최용건의 미망인 왕옥환은 왜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사망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왕옥환은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던 최용건을 자기의 침소 밑에 숨겨 구원해주면서 부부가 됐다. 중국인 부잣집 딸이었던 왕옥환은 아버지뻘 되는 최용건을 사랑하여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결혼 후 이들은 북한에서 살았다.

최용건(가명∙최석천)은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활동을 함께 했고 이 때문에 민족보위상(국방장관)을 거쳐 제1 부주석을 지내는 등 북한 내 당∙정∙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최용건은 1923~1925년 중국 운남군관학교를 다녔고 26년에는 황포군관학교(교장∙장개석) 교관으로 있으면서 27년 광저우 폭동에도 참여했다. 이후 만주로 파견되어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을 거쳐 소련 88특별여단 참모장과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빨치산 경력으로는 김일성의 연장자이자 선배였다.

특히 중국의 주덕, 주은래, 하룡 등과 절친한 사이여서 북-중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할 때 해결사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용건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 한마디 때문에 그는 북한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고 북한이 이상하게 변해가자, 최용건은 죽기 직전 부인 왕옥환에게 “내가 죽으면 이곳에 있지 말고 중국에 가서 사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은 대노하여 최용건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묻어버리고 일체 공적을 평가하지 않았다. 76년 최용건이 사망한 후 북한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최용건에 대해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빨치산 선배인 최현이 사망한 후 영화 ‘혁명가’를 만들어 최현의 공적을 선전해준 것과는 대비된다.

김일성과 함께 했던 다른 빨치산 출신들은 대부분 죽으면서 “수령님을 부탁하오” 또는 “장군님을 더 잘 모시지 못하고 가서 미안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최용건의 유언과는 상반된다. 최용건처럼 공로와 업적이 생매장 당하지 않으려면 죽을 때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던 것이다.

최용건의 유언으로 왕옥환은 중국으로 이주했지만 최용건은 북한사회에서 매장되었다. 이번에 김정일이 왕옥환의 빈소에 조화를 보낸 것은 다분히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행위가 아닌가 싶다.